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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의 그늘 Sep 03. 2021

아름다운 시절

    "우리 이젠 앨범 주문할까?"


     남편이 여러 차례 말했을 것이다. 들을 때마다 "응 그래." 대답했지만 급한 일이 아니니 미루고 있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벌써 두 계절이 지나갔다. 이러다가 애써 고른 사진이 바래겠다 싶었다.


    돈이 아깝다는 핑계로 성장 앨범은 계약하지 않았다. 조리원에서 제공하는 서비스 촬영도 감염병이 돌며 취소했다. 이맘때 태어난 아이들이 하나씩 가지고 있을 법한 스튜디오 앨범이 없다는 아쉬움에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 중 잘 나온 을 인화하여 앨범을 만들기로 했다. 우리 아이 뽀얀 얼굴과 환한 미소가 돋보이는 것으로, 혹은 그날의 일이 생생히 기억나는 것으로. 어느 한 시기에 치우치지 않게 월령별로 균형 있게 추렸다. 이렇게 정성스럽게 골랐건만 사진이 배송되고 반년이 넘도록 책꽂이 맨 위에 아무렇게 방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진을 보관해  비닐 커버는 오래된 먼지가 찌들어 끈적거렸다. 남편과 나는 들러붙은 먼지가 에 묻지 않도록 조심조심 사진을 빼내어 하나씩 방바닥에 펼쳐 놓았다. 그런데 때마침 잊고 있던 사진이 떠올랐다. "아! 우리 아이 초음파 사진." 

    정기검진을 갈 때마다 주는 초음파 사진은 잉크가 쉽게 번져 손자국도 잘 나고 적은 물기에도 훼손되기 쉬웠다. 그래서 따로 정리해둬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제야 생각이 난 것이다. 한 장씩 산모수첩을 넘기자 오려지지 않은 초음파 사진 묶음이 두름처럼 길게 내려왔다. 사진 묶음을 하나씩 떼어내어 '눈', '발' 등 신체 부위가 조그맣게 적힌 부분을 경계삼아 작은 사이즈로 오려갔다. 사진 안에 전체 윤곽이 한 번에 다 담기던 임신 초기부터, 초음파 기계로 아기 모습을 부분 부분 더듬어가던 막달까지. 오랜만에 태아 시절 아이를 바라보니 작은 모니터를 통해 뱃속의 아이를 만나던 날들이 새록새록 생각이 났다. 그리고 그때의 마음이 떠올랐다.




    계단을 올라 역을 나서면 육중한 건물이 일렬로 놓여 있는 큰 도로가 있었다. 은행 등 금융기관, 공공기관 등이 입주해 있어 서울 테헤란로 같은 업무지구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거대한 빌딩이 만들어내는 큰 그림자를 밟으며 몇 걸음 걷다 보면 지역의 유명 뷔페가 나온다. 병원을 다니던 아침시간엔 어김없이 커다란 음식물 통이 놓여 있었는데, 코를 찌르는 냄새를 피하려 음, 하고 숨을 참은 채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지나갔다. 뷔페 건물을 끼고 좌측으로 돌아 1분 남짓 걸으면 널찍한 삼거리가 보였다. 여기부터는 나지막한 상가 건물들 놓여 있어 전보다 시야가 트이고 빽빽한 느낌이 덜했다. 나는 세 개의 길 중 가장 남쪽을 향한 길을 따라 걸었다. 식당, 동물병원, 지상 주차장, 자동차 대리점 등등. 옹기종기 모여있는 상가와 그 뒤의 오래된 아파트를 지나치며 걷다 보면 산부인과 이름이 크게 적힌 철제 주차장이 나타났 바로 병원이 보였다. 지하철을 주로 이용했던 내게 병원은 역과 떨어져 있어 다니기에 좀 애매했다. 하지만 그 길은 우리 아이를 볼 수 있어 늘 설레는 발걸음이었다.

    작은 모니터 속의 아기. 나는 발치 위에 놓인 까만 초음파 영상 속에 얼룩덜룩 잡히던 흑백의 형체로 아기를 만났다. "오늘도 작품 사진을 만들어 볼까요. 여기는 제가 좋아하는 발바닥이고요. 여기는 손이에요. 그리고 다리...." 아기가 손가락 마디만 하던 임신 초기에는 화면 속의 형체가 딱 봐도 사람의 윤곽 같아 쉽게 아이를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커갈수록 전체의 모습을 담을 수 없었고, 때로는 어디인지 분간하기 힘들어졌다. 그럴 때면 아이들 좀 더 똑바로 보기 위해서 유심히 모니터를 바라보았지만 초음파가 금세 배의 다른 쪽으로 이동하며 순식간에 다른 장면으로 전환되었다.  

    아이와의 만남의 시간은 오분 남짓했다. 진료실 자리로 돌아온 선생님은 출력된 사진 아래 눈, 코, 발 등 부위를 적은 뒤 산모수첩에 붙여주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병원에서 올려준 영상을 다시 돌려 보곤 했다. 회색의 선과 무늬 같은 게 나타났다 빠르게 변하기를 반복하는 홀로그램 같은 영상 속에서 태아의 모습은 여전히 알아보기 힘들었다. 게다가 병원에서는 의사 선생님의 설명이라도 있었건만, 집에서 보는 영상은 그야말로 정적이었다. 그러던 중 오른편에 하얀 파동이 나타나며 커다란 소리가 시작된다. '쿵쿵쿵쿵.' 아이의 심장소리이다. '태아는 심박수는 보통 어른들보다 빠르다던데, 정말 우렁차구나.' 고요를 깨는 굵고 힘찬 소리는 병원에서와 달리 새롭게 느껴졌다. '쿵쿵쿵쿵.' 그 소리는 뱃속에서 아이가 보내는 신호 같아 신비로우면서도 다시 한번 나를 안도케 하였다.   




    병원에 다니던 날이 얼마 지나지 않은 일처럼 또렷하게 느껴졌다. 생각해보니 아이를 품었던 그 해는 다른 때보다 더 선명한 기억들이 많이 남아 있는 듯하다. 회사에서 매번 비슷한 일상을 지내다 연말이 되면 '벌써 한 해가 지나버렸네.' 생각하곤 했는데. 그 해의 호흡은 느릿했던 거 같다. 참 느릿해 예정일을 기다리는 마음이 안달이 날 때도 있었다. 대신 나를 둘러싼 풍경과 흐르는 감정들로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을 채워갔다. 나들이를 앞두고 두근대는 마음으로 하루하루가 가기를 세는 어린아이처럼 기다림이 주는 애틋함을 만끽하였다.  


    "좋았던 거 같아."

    "뭐가?"

    "임신했을 때."


    감상에 젖는 나를 보고 남편이 말했다. "그때 갑상선 수치 높아져서 대학병원 다니고 그랬잖아, 입덧은 좀 심했나. 매일 회사 화장실에서 토하고, 뭔가 눈치 보면서 회사 다니고." 그랬었지. 생각 않고 있었네. 임신할 때 몸도 힘들고 아이가 어떻게 되지 않을까 걱정도 많았던 거 같다. 하지만 입덧을 떠올리면 메스꺼움을 잊으려 먹었던 초코 아이스크림의 단맛이, 대학병원 가는 길은 이른 아침의 선선한 공기가 함께 기억나는 걸 보면 그 시절은 대체로 아름다운 느낌들로 남아있다. 그리고 오랜만에 정다운 모습을 하고 내게 찾아와 와락 안기는 그 시절의 기억들이 반갑다가도, 소중한 이를 꿈에서 만난 듯 아련하고 서운했다.

    내 인생에 이처럼 기대로 부푼 날이 또 오겠지.

    색채가 희미해져 가는  속에 맑은 가을 하늘만큼이나 또렷했던 시간들. 그땐 왜 몰랐을까. 지금 와서 보니 선물 받은 시간인 것 같아 고맙다는 마음이 든다. 그리고 앨범에 아이 사진을 붙여 넣는 이 순간도, 작은 손이 내 검지를 잡고 여기저기 졸졸 이끄는 날들도 너무도 그리울 것만 같아 먹먹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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