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름편지 Aug 12. 2021

윤회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 :: <인어공주>

 

“에리얼. 이번엔 성공해야해.”


 마녀는 투명한 약이 든 병을 건넸다. 마지막 약이었다. 이 밤이 지나면 나는 다시 땅으로 가야 한다. 여기. 내가 나고 자란 바다. 나의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미래가 있었다. 약병을 손에 쥐고 주위를 둘러봐도 죽어서 굳은 해초들만 보일 뿐이다. 마녀도 이 약을 마지막으로 내게 주고 떠난다. 마녀의 손바닥에는 날카로운 흉터가 셀 수 없이 패여있다. 모두가 떠난 곳에서 약을 만들기 위해서 자신의 피까지 내야 했겠지.


 “그리고 이거.”


바다 물 빛을 담은 옥색 손잡이 끝에는 서슬 퍼런 날이 달려 있다. 칼이다.


“이걸로 그의 심장을 찔러. 그럼 끝이야.”


마녀의 표정은 덤덤했지만 눈에는 고통이 서려 있다.


“네가 더 잘 알겠지. 이 칼을 써야 한다면 넌 땅에서 죽는거야.”


 마녀의 미간이 좁아진다. 끝은 해결이 아니다. 그야말로 끝이 나는 것이다. 나의 바다도. 햇살을 받고 있는 저 땅도. 결국 이렇게 될 수밖에 없나. 사실은 모두가 답을 알고 있으면서 피하려고만 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끝에 다다라있다.






 땅의 밤은 압도적인 고요함이 있다. 피부에 닿는 차가운 공기가 땅 위에 있다는 것을 실감나게 해준다. 저 멀리 검은 파도가 돌에 부딪혀 부서진다. 바다 안에서는 파도의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처음 이 곳에 와서 들었던 파도 소리는 선율 같았다. 끝없이 부서지고 언제든지 다시금 몰려오는 소리. 땅에는 내가 사는 곳 못지 않은 아름다움이 가득하다고 생각했었다. 이제는 땅에만 남았지만.


 조금씩 태양이 나면서 꼬리가 두 갈래로 갈라진다. 언제 봐도 기묘하다. 솜씨 좋은 마녀 덕분에 이제는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 없이도 인간의 다리로 변할 수 있다. 오랜만에 다리로 걸으려고 하니 등뼈가 아프지만 다행히 가까운 곳에 성이 있다. 아침 빛을 받아서 한층 더 반짝이는 하얀 성이 보인다. 지난 10년 간 낡았지만 터무니없는 흰 빛은 여전하다.


 “에리얼.”


 익숙한 목소리. 그는 내게 줄 것이 있다.


 “당신도 나이를 먹긴 하는구나. 이 아침부터 깨어있고 말이야.”

 “귀하신 분이 오는데 문안 인사는 드려야지.”


 능청스런 왕의 말에 웃음이 터진다. 마음이 이상하리만치 가라 앉는다. 당장이라도 왕의 멱살을 잡고 늙은 인간들 앞에서 계약 위반이라고 소리쳐야 하는데 마음은 벌써 다른 곳을 보고 있다.


 “오늘이 이 성을 오는 마지막 날이 될거야. 다음은 없다는 거 당신도 알겠지.”


 처음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인간들이 바다에 기대하는 거대한 생명력 같은 것은 우리에게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었다. 바다의 결을 따라 타고 흐르는 재생의 힘. 그게 우리의 전부였다. 바다 안에서 평생을 살았지만 바다 속 모두가 땅과 연결되어 있었다. 볕이 들지 않는 바다 밑을 향해 끝없이 들어오면 땅이 있다는 사실을 인간들은 생각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인지 우리의 체온이 변했다. 바다가 조금씩 더워지고 있었다. 갖은 애를 쓰며 적응해봐도 바다는 빠른 속도로 변해갔다. 생명은 그보다 더 쉽게 사라졌다. 먹을 것이 동이 나면서 다른 바다로 떠나가는 이들이 생겼다. 하지만 어디를 가도 순간에 머물 뿐 같은 일은 반복됐다. 그 즈음부터 나는 땅과 바다를 오갔다. 풋내기 왕자가 왕에 오르기까지 많은 인간들을 만나고 땅 위에 일어나는 불행을 지켜봤다. 칼로 저미는 듯한 고통이 여기서도 일어나고 있었지만 땅은 변하지 않았다. 인간들은 영원함을 믿었다. 그러나 영원히 지속되는 풍요는 없었다.


 “보여줄 것이 있어.”


 왕은 성의 서쪽 정원으로 향한다. 정원에만 봄이 내려 앉은 것처럼 화려한 꽃 향이 난다. 내 머리색을 닮은 짙은 다홍색의 꽃이 만발해 있다. 내가 이 성에 처음 왔을 때부터 왕이 심기 시작했던 꽃이다.


 정원을 지나자 넝쿨 다발로 묶은 것 같은 창고가 나온다. 성 구석구석을 아는 나도 처음 보는 곳이다.


 “여긴 어디야?”


 안으로 들어서니 벽 한 면에 수십 개의 홀로그램 화면이 늘어져있다. 한 화면 안에 다시 여러 개가 있다.


 “네가 이 성에 처음 온 그 날. 여기로 와야 했었는데.”


 왕의 얼굴이 종이처럼 구겨진다. 대체 여긴 뭐하는 곳이고 저 화면은 어딜 보여주는 건지. 가까이서 보니 화면 오른쪽 아래에 글자가 써져 있다. 화면 안에는 끝도 없는 황무지와 모래 사막이 펼쳐진다. 다른 화면은 거대한 불이 솟는 산이 있고 땅이 갈려져 그 위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화면에 있는 인간들은 하나같이 괴로워하고 있다.


 이건 만들어진 화면이 아니다. 화면 아래 나라 이름과 시간이 지금 이 순간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에리얼. 네가 그랬지. 땅의 것들만 살아남았다고.”


 왕의 눈빛이 나를 향해 있지만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래. 아니야. 너의 바다처럼 우리도 죽어가고 있어. 나는 너에게 더 이상 줄 것이 없어.”


 왕이 말하는 중에도 화면은 끝없이 움직이며 지옥 같은 고통이 펼쳐지고 있다. 저 곳에도 바다가 있다. 바다의 흔적만 남아서 땅 위로 짙은 구불거림만 남았지만 나의 삶이 저기에도 있다.

 눈을 감으면 집이 보인다. 영원히 그 자리에 있을 것처럼 견고한 나의 집.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지금은 모두가 떠난 내 고향.


 마녀가 준 칼을 품에서 꺼낸다.

 나는 집으로 갈 수 없다. 여기에 머물 수도 없다.


 “넌 알고 있었겠지. 지금이 마지막이라는 걸.”


 왕은 말이 없다.


“너도 나도 모든 것들이 사라져야 끝이 나는거야.”


 마녀가 약을 주고 떠나던 밤 내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바다와 땅의 힘으로도 안된다면 끝이 와야 해. 끝은 시작이니까. 우리가 모두 사라지고 나면 시작이 올거야.]


  왕의 심장을 찌른 칼이 조금씩 흔들린다. 아니, 이 건물이 통째로 흔들린다. 성의 동쪽에서부터 밀려오는 파도가 보인다. 땅에서 처음 보는 높이의 파도가 하얗게 빛나는 성을 완벽히 부순다. 저 검푸른 파도는 차례차례 세상을 집어삼킬 것이다.


 끝은 곧 시작. 나는 땅에서 죽어도 바다로 돌아가게 될거야.




작가의 이전글 수험 생활을 마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