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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굿모닝선샤인 Jan 31. 2022

육아맘의 커피 예찬론

아이가 잠들면 커피 한잔을 들고 책상에 앉는다



커피를 좋아한다. 출산 전, 학교에서 일할 때에도 하루에 3잔은 기본으로 마셨다. 아침에 출근해서 믹스커피 한 잔을 마셔야 하루 일과가 시작되는 기분이었다. 달콤 쌉쌀한 커피가 식도를 넘어가 빈 위 속으로 싸하게 퍼졌다. 그 싸한 느낌이 역류성 식도염을 키우고 있는 줄도 모르고 줄기차게 마셨다.


수업 1교시가 끝나고 한 잔을 더 마셨다. 첫 수업은 고됐다. 아이들도 나도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상태였다. 점심을 먹고 5교시 시작 전에 한 잔을 더 마셔야 오후를 버틸 수 있었다. 그렇게 하루 3잔은 고정되어 내 일상을 견디는 힘이 되었다. 사실 카페인에 예민해서 오후 3시 이후에 커피를 마시면 그날 밤은 꼴딱 새워야 했다. 잠이 도무지 오지 않았다. 오후 3시는 카페인 데드라인이 되어 그전에 3잔을 다 마시려 욕심을 부렸다.



나의 커피 사랑(카페인 의존증)은 임신과 함께 끝이 났다. 소중하게 선물 받은 아이에게 카페인을 전달하고 싶지 않았다. 좋아했던 커피를 멈출 정도로 나는 엄마가 되어가고 있었다.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하루 커피 한 잔은 괜찮다고 주위에서 부추겼지만 마시지 않았다. 혹시라도 만에 하나라는 생각에 참고 또 참았다. 출산 후 모유 수유 기간에도 카페인을 섭취하면 아이가 잠을 안 잔다는 말에 주저했다. 잠을 잘 안 자던 첫째, 밤새 칭얼거리기가 잦았던 아이였다.


1년 6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단유를 했고 이제 커피가 허락되었다. 주말부부였던 터라 토요일마다 육아에 희생된 허리를 치료하러 한의원에 다녔다. 침을 맞은 후 맞은편 작은 개인 커피숍에 들어갔다. 바깥이 훤히 보이는 큰 창가에 자리를 잡아 아이스 라테를 주문했다.



산후풍으로 차가운 음료는 마시지 않았는데, 그날따라 시원한 음료가 당겼다. 게다가 커피라니. 길쭉한 유리잔의 영롱한 얼음 사이로 우유가 깔려있었다.  위로 진한 에스프레소 샷이 레이어드 되었다. 투명한 빨대가 사선으로 꽂혔다. 보기만 해도 아름다운 작품  점을 바라보는 황홀했다. 빨대로 음료를 한번 휘저었다. 얼음이 유리잔에 부딪히며 '짤랑'하는 경쾌한 방울소리를 냈다. 청량한 소리가 에스프레소의 진한 향과 섞여 퍼졌다. 빨대에 입을 대고  모금 빨아들였다. 깊은  속의 시원한 바람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짜릿한 한기가 온몸에 퍼졌다. 순식간에 바다로 옮겨져  여름의 파도가 일렁이는 풍경이 보이는 듯했다. 신세계였다. 이렇게 시원하고 고소하고 맛있다니!  후로 기회가  때마다 라테를 주문했다.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에 온전한 커피 마시기란 미션 임파서블과 다름없었다. 칭얼대는 아이를 안아주고 기저귀를 갈아주면 뜨끈한 커피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여름날, 가득 부어놓은 아이스 라테 속 얼음은 다 녹아 사라져 있었다. 밍밍한 커피만 남겨졌다. 뜨겁게도 차갑게도 마실 수 없는 식은 커피만 놓여있었다. 그마저도 원샷을 해야 했다. 언제 또 사고를 칠지 모르는 아이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화장실에도 안고 가야 할 정도로 내 프라이버스 따위는 보장해 주지 않는 껌딱지였다.


혼자서 여유롭게 뜨겁거나 차가운 온전한 커피를 마시고 싶었다.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라테를 테이크 아웃했다. 공원과 호수를 돌면서 커피를 마셨다. 내가 원하는 온도 그대로의 커피를 즐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유모차 홀더에 커피를 올리고 걸으면서 풍경을 바라봤다. 커피 한 모금이 몸속으로 퍼지면 온몸의 세포가 살아나 부스팅이 된 듯 에너지가 솟았다.


아이가 유모차에서 잠들면 근처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의 새하얀 예쁜 인테리어와 말끔한 테이블 위에 앉으면 지저분한 집안 살림은 잊혔다. 일상 속 시끄러움은 잠시 접어두고 가방 속에서 읽고 있던 책을 꺼냈다. 둥글넓적한 분홍색 라테 잔이 놓이고 테이블 위 작은 꽃 한 송이가 마음을 밝혀주었다. 커피 한 잔 올려둔 테이블 위에 앉으면 책이 읽고 싶어졌다. 게임이나 sns로 고고한 분위기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1시간 남짓 짧은 시간 동안 라테 한 잔과 책 몇 페이지의 여유를 만끽했다. 그 시간이 정말 소중하고 반짝였다. 책 속에 펼쳐진 환상의 세계에 빠져들어 노이즈로 가득한 육아 현실은 사소해졌다. 다른 가능성을 꿈꾸게 했다. 현실에 엉덩이를 붙이고 구덩이에 침잠하는 나를 건져 올렸다. 그 시간은 내 등뼈 위의 날개가 간질거리며 돋아나게 했다. 다시 날아오르고 꿈을 품고 비상하는 것을 허락해 줬다.


2019년 12월 코로나가 발발했다. 2020년 1월, 둘째의 백일이었다. 2월부터 두 아이 가정 보육이 시작되었다. 커피 머신을 구입했다. 카페에 나갈 수 없으니 집안에 카페를 차렸다. 커피 머신과 우유 거품기를 들였다. 책상 한쪽을 카페처럼 말끔하게 치우고 하얀색 시폰 커튼을 달았다. 책상 위에 책을 몇 권 세워두고 생화를 꽂았다. 지친 육아시간을 견디며 내 영혼을 돌볼 나만의 카페를 차렸다.


둘째가 6시에 앵앵거리며 일어나면 제일 먼저 커피를 내렸다. 우유를 데우고 거품을 올렸다. 따뜻한 라테 한 잔은 부드럽게 속을 달래주며 하루를 살아낼 에너지를 선물해 줬다. 죽어있던 정신이 깨어나는 듯 생생해졌다. 내 앞에 닥친 하루를 어떻게 살아내야 할지 희망과 위로를 전해줬다.




낮잠 시간, 둘째를 겨우 재웠다. 까치발로 조심조심 방문을 닫는다. 아이가 난리 법석으로 난장판을 벌인 거실 풍경을 유유히 지나친다. 잠시 집안일은 내려놓고 외면한다. 커피 한 잔을 들고 내 책상 위에 앉는다. 소박하게 허락된 나만의 시간이다. 책을 펼치고 커피 한 모금을 마신다. 헐떡거리는 오전 일과를 마치고 잠시 멈추어 숨을 돌리는 시간이다. 커피의 쌉싸름함과 따뜻한 우유의 고소함이 섞여 마음에 퍼진다. 기분 좋은 에너지가 충전된다. 잘하고 있다고, 잘할 수 있다고, 지치지 말자고, 더 좋은 날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나를 위로한다.


그 누가 어떤 말로도 육아에 지친 마음을 위로해 줄 수 없었다. 혼자만의 작은 시간은 큰 힘이 되었다. 커피와 함께하는 시간은 내 앞에 닥친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용기를 주었다. 나만의 커피타임은 이 시간을 지혜롭게 살아내려는 의지였다. 희망을 끌어올리려는 필사적인 꿈틀거림이었다.


오늘 하루도 아이의 짜증과 질투와 싸움으로 도망치고 싶은 순간들이 여러 번 찾아올 것이다. 잠든 아이를 끌어안고 화내서 미안하다고 눈물을 훔칠 것이다. 그럼에도 내 마음을 돌아보고 성찰하고 내면을 단단히 다지는 시간을 끊임없이 챙기려 한다. 그렇게 나는 엄마가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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