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주 Jan 17. 2022

첫 번째 새해 목표

나른한 주말 오후 단골 카페에 반쯤 누운 채 때늦은 연말 회고를 시도했다. 인스타그램 피드를 보아하니 다들 스스로에게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주던데, 가만히 있으려니 괜히 뒤쳐지는 마음이 들어서다. 너덜해진 다이어리를 꺼내 작년 이맘때쯤 적어둔 것들을 체크해 나갔다.


주 3회 러닝(X)

아침 명상(X)

매일 다섯 줄 쓰기(X)


죄다 깔끔하게 실패해버린 탓에 다이어리가 꼭 수학시험지 마냥 X표투성이였다. 기분만 울적해지는 To Do 리스트 점검은 미뤄두고 대신 갓 뜯은 2022년 다이어리에 이렇게 적었다.


2021년 행복했던 일


분명 다사다난한 한 해였는데 그럴듯한 단어 하나를 써내지 못했다.


애꿎게 머리만 쥐어뜯다가 스마트폰 속 사진을 뒤적였다. 갤러리에는 떡볶이와 곱창전골 같은 배달 리뷰용 사진들이 줄지어 등장했다. 그래, 일상이 박살나던 순간에도 야식만큼은 꾸역꾸역 잘 챙겨먹었지. 엄지손가락을 마저 움직이자 이내 내가 찾던 사진이 나왔다. 마스크 밖으로 기쁨이 흘러넘치는 부모님의 얼굴. 2021년에 내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분명 부모님과 함께 갔던 부산여행이었다.


갑작스레 부산을 향한 건 사실 호텔 바우처 때문이었다. 인심 좋은 선배로부터 받은 호텔 바우처는 사용기한이 그리 넉넉지 않았고, 나는 당장 인숙에게 전화를 걸어 거의 일방적으로 여행 날짜를 잡았다. 용돈을 받을 때마다 빈말처럼 내뱉었던 효도여행은 그렇게 어영부영 시작됐다.


부모님은 꼭 소풍을 앞둔 소년소녀처럼 굴었다. 오전 10시 출발하는 기차를 8시로 앞당기라고 닦달했고 그 바람에 우리는 점심이 채 되기도 전에 부산역에 도착하고 말았다. 정표는 역에 내리자마자 흡연구역을 찾아 사라졌다. 서로를 찾아다니며 길이 두어 번 엇갈리는 동안 인숙은 30년 전 부산여행을 회상했다.


“저 양반, 예전에 왔을 때도 꼭 저랬어. 그래서 엄마가 어떻게 했느냐면...”


그날 화가 잔뜩 났다는 인숙은 정표를 떼어 놓곤 혼자서 해운대를 향했다고 했다. 뒤늦게 쫓아온 정표와 대판 싸웠다는 이야기까지 꼼꼼하게 덧붙였다. 그간 내가 알지 못했던 에피소드를 듣고 있자니 꼭 두 사람의 타임루프 드라마를 엿보는 것 같았다.


해운대에 다다른 우리는 체크인까지 시간을 때우기 위해 해안가를 산책해야 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도 인숙의 표정은 더없이 밝았다. 동백섬을 향하던 길에서 인숙은 갑자기 추억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예전에 해운대 왔을 때 말이야. 화장실에서 너네 누나 발 닦아주다가 청소하시는 분한테 왕창 깨졌거든. 왜 모래를 여기서 닦느냐고. 그때 그 화장실이 저긴 거 같다야. 근데 있잖냐, 세 살 짜리 애기가 제 발이 까끌거린다고 엉엉 우는데 어쩌겠어. 누나도 기억하려나 모르겠네.”


그건 30년 전, 그러니까 인숙이 딱 내 나이만큼 젊었던 날의 이야기였다.


저녁엔 지인에게 추천받은 곱창집으로 향했다. 배도 고프지 않다던 인숙과 정표는 연탄불 위에 놓인 곱창과 대창을 순식간에 먹어 해치웠다. 몹시 당황스러웠다. 지금껏 부모님이 곱창 같은 건 좋아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었으니까. 이왕 호텔에 가까운 맛집이 있으니 가보자며 미안함을 안고 온 참이었다.


“엄마도 곱창 좋아해?”


잘 익은 곱창을 상추에 싸서 복스럽게 먹던 인숙은 핀잔을 주었다. 여태껏 그것도 몰랐냐면서. 엄마도 곱창을 좋아하는구나. 삼십 년 만에 알게 된 인숙의 취향이었다. 우리는 곱창전골을 마저 비우고 그 안에 밥까지 넉넉하게 볶아먹었다. 나는 부모님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이튿날 이른 시간부터 조식을 챙겨먹은 우리는 체크아웃 시간을 꽉 채워가며 호캉스를 즐겼다. 인숙이 바다가 내다보이는 야외 스파에서 몸을 녹이는 동안 정표와 나는 테라스에 앉아 맥주를 한 캔씩 비웠다. 인숙을 향해 손 흔드는 여유도 잊지 않았다. 제대로 된 호캉스는 처음이면서 우리는 누구보다도 능숙하게 호캉스를 누렸다. 시간이 더디게 흐르던 이 여행이 무척 근사하게 느껴졌다.


짧은 여행을 마치고 인숙과 정표는 대전으로, 나는 곧 홀로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서울에 도착하자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인숙은 집에는 잘 도착했느냐며 나이 든 사람들 데리고 다니느라 고생했다고, 고맙다고 말했다. 순간 목이 턱 막히는 바람에 제대로 된 인사도 못한 채 통화가 끝났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 대답하지 못했다. 나도 엄마 아빠와 함께 다녀서 무척이나 좋았다고. 나한테도 그 여행이 내 생애 최고의 날 중 하나였다고.


다이어리를 펼쳐 올해 부모님과 하고 싶은 TO DO 리스트를 잔뜩 적었다. 경주로 호캉스 가기. 함께 있는 사진 자주 찍어두기. 엄마 아빠가 좋아하는 음식 발견하기. 사랑한다고 말하기. 더 이상 부모님과의 시간을 유예하지 않기.


촌스럽기는 해도 꽤 근사한 목표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전 12화 직장의 연금술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