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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주 Nov 20. 2021

직장의 연금술사

우리 회사엔 연금술사가 있다. 우리나라도 우주를 향해 로켓까지 쏘아올리는 시대이니 회사에 연금술사 하나쯤 있는 것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오해를 덜기 위해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직장인을 연금술사로 만드는 사람이 있다고 말해야 할까. 사실 모든 회사가 마찬가지일지도 모르겠다.


직장의 연금술이라는 건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진지한 톤앤매너를 유지하는 동시에 유머가 담긴 아이디어를 가져오라거나 심플하면서도 눈을 사로잡는 화려한 콘텐츠를 만들어내라는 것. 나는 이런 정신 빠진 요구를 들을 때마다 좌뇌와 우뇌가 능지처참 당하는 잔혹한 상상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털어낸다.


지난 회사를 돌이켜 보면 대낮부터 술주정을 부리는 것 같은 요청을 들이미는 이들, 똥덩이를 금덩이로 치환해 오라는 요구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빌런이 회사에 꼭 한 명씩 존재했다. 나는 그들이 꼭 직장에 연금술사가 있다고 착각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직장의 연금술사는 대부분 디자이너일 때가 많았다.


모니터에 그림판 화면조차 띄어본 적 없을 것 같은 양반들은 포토샵이나 일러스트레이터가 꼭 기적의 연금술인 것마냥 굴었다. 있지도 않은 도깨비방망이를 휘둘러야 하는 디자이너는 현실성도 없고 구체성도 결여된 요청을 듣고서도 묵묵하게 작업을 해내야 했다.


"뭔 도비인가 그 있잖아요. 그림 만드는 프로그램에서 마우스 딱딱 누르면 되던데? 그거! OO씨는 금방 하던데?"

"아, 네네. 대충 알겠어요."


지시대명사와 의태어로만 채워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모니터에 시선을 돌리는 모습이 참 의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디자인 요청을 그는 정말로 알아들었던 걸까. 그게 아니면 정확한 오더를 달라고 항변할 시간을 차라리 디자인 작업에 투자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걸까. 그의 무심한 태도보다 놀라운 건 실제로 연금술에 가까운 일이 종종 일어났다는 거다.


디자인 요청을 빙자한 헛소리를 잔뜩 내뱉고 난 뒤 다소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디테일을 꼼꼼하게 챙기면서도 깔끔하며 위트까지 두루 갖춘 디자인이 도착했다. 그 꼬급진 디자인은 뭐랄까, 현실성과 구체성 중 어느 것도 충족시키지 못한 개판 오분 전 상태의 요청과는 전혀 달랐다. 디자이너가 정말로 도깨비방망이를 휘두르기라도 한 것처럼, 돈이 되는 콘텐츠로 탈바꿈했다. 매번 이런 식이니 나 또한 그를 연금술사라고 착각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회사에서 디자이너를 연금술사처럼 부리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절대 그러지 말 것'을 매번 다짐했다. 여기서 말하는 '그러지'라는 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요구를 뻔뻔하게 들이밀지 말자는 것. 스스로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기획을 남들에게 떠넘기지 말자는 것이다. 뻔하고 우습지만 나는 정작 그게 못된 짓이란 걸 알면서도 매번 염치 없이 '그런 짓'을 저지르고야 만다.


"OO님, 급하게 요청드려 정말정말정말 죄송합니다. 그런데요, 혹시 30분 안에 가능하실까요...?"


마감을 고작 몇 시간 앞둔 시간. 나는 죄송하다는 인사로 시작한 장문의 메시지를 보낸다. 늘 포토샵만 켜면 덜덜거리는 내 노트북과 똑 닮은 빌빌거리는 자세를 한 채로. 문제는 급하게 요청드려 죄송하다 하면서도 그 다음 날에도, 그 다음 주에도 매번 밭은 일정으로 동료에게 연금술을 강요한다는 거다. 알면 좀 미리 할걸. 남들에게 된통 피해를 끼치면서도 여유롭게 열패감을 느끼는 스스로가 비겁하고 영악하단 생각이 스쳤다.


직장에 또다른 부류의 연금술사가 있다면 그건 바로 나다. 아무도 나를 무엇이든 뚝딱 만들어 내는 일잘알 연금술사라 생각지 않겠지만, 연금술이란 건 자고로 창조와 파괴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분류하자면 나는 주로 파괴를 담당하는 쪽이다.


고작 이 물렁한 주먹으로 무엇을 파괴하느냐 싶지만 평일마다 내 기분과 일상을 아주 착실하게 파괴하고 있다. 가끔은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기분까지 박살내는 짓도 저지르곤 한다. 심지어 최근에는 프로젝트의 존망까지도 위태롭게 만들었으니 요목조목 뜯어보면 꽤 무지막지한 이 구역의 파괴왕이다.

직장인으로 일하면서 연금술의 가장 기본이 되는 '등가교환의 법칙'이라는 것도 어렴풋이 알 거 같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그와 동등한 가치를 지불해야 한다는 진리를. 직장에서도 일잘알이 되려면 시간과 노력과 재능을 버무려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그러니 재능이 모자란 나는 노력과 시간을 남들보다 더 투자해야 한다는 사실 또한 이제는 잘 알고 있다.


나도 언젠간 도깨비방망이를 휘두르듯 뚝딱 기획안을 만들어 내는 팀원A처럼 가락국수 뽑듯 카피를 술술 뱉어내는 선배처럼 될 수 있을까. 업무를 후딱 해치우는 직장의 연금술사는 바라지도 않으니, 누군가의 기분을 박살내는 파괴의 연금술만은 행하기 않기를. 시간과 노력은 얼마든 지불할 테니까 이제는 무엇이라도 잘해낼 수 있기를. 오늘도 여지 없이 거지발싸개만도 못한 문서를 작성하면서도 내일은 조금 더 나아질 거라는 야망을 감히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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