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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주 Oct 23. 2021

저도 트윈헤드-휴먼이 되고 싶어요

N잡, 퍼스널 브랜딩, 사이드프로젝트... 유튜브 알고리즘이 이끈 영상을 보고 있으니 스스로가 나태한 인간처럼 느껴졌다. MZ세대의 일원이면서 제대로 된 부캐 하나가 가지지 못해 생긴 자격지심일까. "퇴사해야지, 유튜브 해야지"라는 지켜지지 못할 직장인의 선언처럼 부캐를 만들겠다는 나의 다짐은 매번 유예됐다. [ ]N잡러 준비, [ ]사이드잡 구상하기... 다이어리 언제 적어둔 지 모를 바래진 글씨를 보니 몇 달째 미뤄둔 업무를 끊임없이 쳐박아두는 듯 찝찝한 기분만 들었다.


부캐라는 단어를 자꾸 두드려 대니 얼마 전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갑자기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뭐 그리 많이 만드냐며 "부캐시대에 본격적으로 뛰어드는 거야?"라는 놀림에 "그러는 너의 노션 워크스페이스는 열다섯 개쯤 되지 않니?"라고 받아쳤던 그 일화가. 유독 이 괴짜 후배와의 대화가 길어질 때면 이야기가 산으로 가곤 하는데 이날 부캐를 소재로 시작한 이야기도 결국 언덕을 하나 넘고 말았다.


후배는 물었다.

"회사용 부캐를 잔뜩 만들다가 그런 문제가 생길 수도 있잖아요. 직장인의 자아가 늘어날 수록 생겨나는 자아 간의 불화는 어쩐대요? 자아분열 생기면, 그거도 산재처리해 주나요?"

"글쎄, 이런 건 압박면접에서도 받아본 적 없는 질문인데..."


본캐도 망했다고 생각한, 그래서 부캐고 나발이고 게임을 접고 싶은 심정이던 우리는 부캐가 능력자들의 전유물이라는 오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회사일 하나 하는 것만으로도 초죽음이 되는 우리와 달리 부캐를 끊임없이 만들어 일하고 또 일하는 이들이 꼭 능력이 강화된 신인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신인류, 그러니까 트윈헤드-휴먼이 보여주는 '성공하는 부캐의 서사'란 아래와 같다.


1. 일찌감치 회사일을 끝내고도 여력이 남은 일잘러들은

2. 시간을 들여 자아를 탐구하기 시작하는데...

3. 그 결과 부캐를 만들어 사이드 프로젝트에 착수하고

4. 결국에 북토크까지 해내는 유명하고 유능한 트윈헤드-휴먼이 된다.


하루를 30시간 쓰는 듯한 강철 체력과 헤르미온느 뺨 치는 업무 처리능력, 그것도 모자라 두 개의 머리로 자신의 존재감을 한껏 뽐내는 트윈헤드-휴먼들이 대단하게만 보였다. 본캐 하나만으로도 허덕이는 나는 부캐를 가진 이들이 부러우면서도 미웠다. 가지고 싶은 걸 가지지 못한 골룸의 심정이랄까. 누가 나에게 부캐를 앗아간 것도, 누가 부캐를 키우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닌데도 유능한 트윈헤드-휴먼들이 '파이프라인'이나 '퍼스널 브랜딩' 같은 말을 운운하며 부캐 키우기를 종용할 때마다 괜히 마음이 심란해졌다.


우연찮게도 부캐에 대한 해답을 얻은 건 한 아티스트의 공연, 정확히는 이날 공연의 호스트인 윤석철이 남겼던 '부캐는 또 다른 인격이 아닌 일종의 공간'이라는 한마디 덕분이었다. 부캐시대가 도래하기 전부터 윤석철은 자신의 넘치는 재능을 아끼지 않고 뽐내는 성실한 아티스트였다. 본캐인 재즈피아니스트 윤석철은 솔로와 트리오로 부지런히 활동했고, 밴드 안녕의 온도의 보컬일 때는 수줍게 노래를 하기도 했다. 작년에는 스스로를 재단사에 비유하며 <Tailor>라는 프로듀서 앨범을 발매하기까지 했으니 그가 소유한 부캐의 머리수를 헤아리면 히드라 쯤은 될 법했다.


이렇게 한 사람의 본캐와 부캐를 나열하고 나자 '부캐는 또 다른 인격이 아니라 일종의 공간'이라는 표현이 꽤 정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석철의 부캐가 만드는 음악이 분명 본캐의 재즈와 닿아있으면서도 결코 동일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당장 나부터도 그의 본캐와 부캐를 같은 듯 다른, 각각의 독립된 아티스트처럼 소비하고 있었으니까.


부캐라는 게 새로운 자아가 아니라 다른 공간을 두는 것이라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부캐가 별게 아니라 그냥 노션 워크스페이스 하나를 새로 파는 일과 비슷하다는 거니까. 그러면 트윈 헤드 휴먼이 되려고 없던 머리를 하나 더 뽑아내야 하는 고통도 없을 테고. 더이상 부캐 생성을 닦달하며 스스로를 박해하고 괴로워 하는 일도 없을 테니까.


결심이 선 날 '파주의 주머니'라는 이름의 워크스페이스를 생성했다. 머리를 하나 더 뽑아내는 대신 공간을 만드는 방식으로 부캐 생성을 우회 시도한 셈이다. 고작 마우스 클릭을 몇 번 했을 뿐인데도 부캐가 생겼다는 은근한 성취감이 들었다. '파주의 주머니'라는 이름의 노션 페이지에 쓰다 만 메모와 글감들을 한껏 쟁여 넣었다. 새로운 공간을 조성하고 있다는 묘한 만족감이 함께 찾아왔다. 나만의 공간에서 사부작사부작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행위 자체가 나에게는 큰 위안이 됐던 거다.


그간 부캐 만드는 방법을 하염없이 고민하며 축낸 시간이 아까웠다. 이제는 스널 브랜딩이나 파이프라인 같은, 여러 번 들어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쫓는 대신 개썅마이웨이를 택하기로 했다. 트윈헤드-휴먼들이 말하는 부캐가 고작 이런 것 따위는 아니겠지만. 될 대로 되라지! 까짓 거 망하면 워크스페이스 하나 더 파면 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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