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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주 May 22. 2022

스몰토크는 후회를 싣고

쇼 머스트 고 온

못하는 것을 애써 계속해야만 할 때, 그런 순간의 괴로움을 나는 잘 안다. 내게 있어 그건 출근과 운동, 그리고 집중과 명상 같은 것들이다. 이쯤 되면 온통 못하는 것 투성이인 거 같지만 특히나 능력치가 떨어지는 건 ‘대화'다.


어눌한 말투와 엉거주춤한 행동거지. 이미 시작부터가 난관인데, 여기에 더해 평범과는 다소 동떨어진 정신세계와 눈이 여섯 개 이상 모이면 목청이 파르르 떨리는 새가슴까지 타고났다. 더군다나 최근에는 자존감까지 한껏 낮아져 늘 부정적인 결론으로 이야기를 귀결시키고 만다. 대화에 부적합한 피지컬과 멘탈을 고루 갖춘 인간인 셈이다.


못하는 것을 하지 않으면 해결되는 간단한 문제건만  애석하게도 나는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성질을 타고나버렸다. 이 지독한 천성 탓에 어색함이 감도는 순간이 오면 좀처럼 입을 다물지 못하고 나불대기 시작한다. 어색한 상황에서 수다를 참는 방법을, 나는 여즉 익히지 못했다.


그리하여 회사에서 맞딱뜨리는 나의 가장 큰 적은 정적이다. 업무야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것만 해도 24시간이 모자라고, 때때로 공공의 적(클라이언트)을 미워하는 말도 나눌 수 있지만 문제는 ‘마가 뜨는 순간’이다. 회의의 전과 후, 점심시간과 같이 무언가로 채워야 하는 시간은 좀처럼 견디기가 힘들다.


대화에 능숙하지 않으면 잠자코 있으면 되련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도저히 정적을 견디지 못하는 나의 지독한 성격은 침묵의 타이밍에 제대로 발현된다. 이 빌어먹을 주둥이! 내가 소환한 악마의 아가리는 정적이 감돌자마자 테이블 위로 난입해 저절로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야말로 지옥의 쇼타임이다.


얼마 전 김은경 작가의 책 <내 문장은 어디서부터 고쳐야 할까?>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읽었다. 스스로를 두고 ‘어색할 때 끝도 없이 나불대는 부류의 사람’이라고 밝힌 작가는 이러한 상황, 그러니까 눈앞에 놓인 침묵을 견딜 수 없어서 별 수없이 시작하는 수다를 두고 ‘쇼 머스트 고 온’이라 했다. 대화가 점점 산으로 가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도저히 멈출 수 없다는 고백. 나는 긴 말줄임표로 끝나는 한 페이지 분량의 글을 종이가 닳을 때까지 읽으며 웃고 울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주둥이 쇼를 벌였기 때문에 박장대소 했고, 그중 대부분 실언대잔치로 마침표를 찍었기 때문에 책을 쥔 채로 오열했다. 


내가 벌이는 아가리 쇼의 가장 큰 문제는 나도 모르는 나의 내밀한 이야기가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는 거다. 나도 몰랐던 나의 마음을 다수가 알게 되는 기묘한 자리. 나의 치부를 이 자리 모두가 공유하는 비극적인 순간을 스스로 자초하고 만다. 나의 어리석은 생각과 부족한 인간성은 순식간에 알쓸기잡(알아도 쓸모없는 기이한 잡소리)이 된다. 매번 후회하고 또 다짐하면서도 나는 늘 정적이 놓이면 다시금 말문을 연다. 그리곤 이불킥으로 점철될 게 뻔한 그지깽깽이 같은 일을 반복하고야 만다. 나는 그야말로 K-아가리 시지프스다.


얼마 전 프로젝트 때문에 구성된 낯선 조합으로 야식을 먹던 자리. 그곳에서 대화의 고수를 만났다. 정적이 흐르던 찰나, 그러니까 헛기침을 내며 나의 주둥이가 시동을 걸려던 순간에 한 사람이 대화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요즘 취미가 무어냐, 마라탕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재료는 무엇이냐, 당신이 만난 최고의 로제떡볶이 브랜드는 또 어떤 곳이냐는 아주 사소하고 디테일한 질문들을 테이블 위로 올렸다.


내공 가득한 질문을 연타로 던지는 그를 보면 순수하게 감탄했다. 떡볶이를 입을 오물거리는 동시에 대화무쌍을 벌이는 그의 모습이, 아두를 한 손에 안은 채 조조의 대군을 돌파하는 조자룡의 그것처럼 보였다. 이런 잡담의 프로들, 아이스브레이킹의 귀재들을 보면 내가 감히 범접 못할 거대한 재능을 마주한 것 같은 초라한 심정이 된다.


나는 깻잎논쟁이나 MBTI처럼 기깔난 아이디어를 내지 못하고 늘 감춰야 할 치부와 수치스런 흑역사를 대화에 끌고 오는 인간이기 때문에. 목요일 즈음이면 나의 주말 일상과 단상들을 탈탈 털고 난 뒤라 더이상 떠벌릴 거리가 바닥나고 만다. 그때가 되면 내 절친들의 에피소드를 정적을 깨는 불쏘시개로 던지고 만다. 며칠 전에는 오이소주로 해장을 했다는 마감도비의 에피소드를 웃음 한 번의 값으로 나름 비싸게 팔았다.


이따금씩 떠드는 모습이 신이 나 보인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안다. 이것이 어색함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필사적인 발악임임을. 나의 수다는 그 자리의 정적을 쫓으려는 일종의 씻김굿 같은 것이다. 


정적을 참지 못하는 이 저주받은 성격을 고치기 위해 이것저것 시도해 보았지만 정통한 방법을 아직도 찾지 못했다. 매일 출근하면서 딱 5초만 상대방의 말을 기다리자고 결심하지만 짙은 다짐이 무색하게도 침묵이 흐르고 나면 나는 또다시 오디오를 채우기 위한 필사적인 토크를 시작한다. 숨 쉬는 걸 의식하는 순간 숨 쉬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게 되듯 정적을 견디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부터가 고역이다. 침묵이 시작될 것 같은 찰나, 나는 단 하나의 쉼표도 허용치 않는 미친 작곡가가 된다. 쇼는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에. 나는 쉴 새 없이 TMI를 나불대며 부끄러운 치부를 뽐낸다.


오늘도 늘 그렇듯 괜한 말을 내뱉고 또 후회했다. 집으로 들어가면 애꿏은 이불을 뒤꿈치로 쾅쾅 두들길 것을 알기에 동네 골목을 산책하며 시간을 축냈다. 후회와 부끄러움으로 점철된 하루. 하지만 어쩌겠어. 쇼가 시작되면 또다시 주둥이로 춤을 추는 광대인 것을. 분명 내일도 쇼 머스트 고 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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