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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주 Dec 04. 2021

실패하지 않는 사람이 있나요


오늘도 어김없이 스마트폰 화면에 타깃광고가 날아들었다. <일 잘하는 PM이 되고 싶다면>, <눈치껏 못 배웁니다, 일센스>. 읽기만 해도 일잘러가 될 것 같은 매력적인 제목들이 당장 구독료를 결제하라고 들이댄다. 일은 못해도 돈 쓰는 거 하나만큼은 기깔나게 해내는 나는 단번에 결제창까지 다다랐다. 습관처럼 간편결제 비밀번호를 누르려던 찰나, 퍼뜩 정신이 들어 손가락을 놀려 팝업창을 재빠르게 닫았다. '카피를 참 영약하게도 잘 뽑았네'라는 감상 뒤에 어제 데드라인에 쫓겨 엉망으로 넘기고 온 그지 같은 슬로건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때늦은 부끄러움이 밀려와 이른 아침부터 쌩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목구멍으로 쓴 커피를 넘기면서 며칠 전 SNS에서 보았던 직장인 밸런스 게임을 떠올렸다.

밸런스 게임의 가장 애석한 점은 현실에서는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분명 게임 속에서는 우하하 팡파레를 외치며 '밭 가는 소'를 택했는데 현실은 전자(숨 쉬듯 자괴감 느끼기)의 삶에 가까웠다. 엘레베이터에서 이따금씩 마주치는 스테디셀러 작가, 옆 팀에 있다는 N만 유튜버... 굳이 그들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이 회사에서 자괴감을 느낄 거리는 공기처럼 무궁무진했다. 당장 나만 빼고 죄다 일잘러인 팀원들과 일하다 보면 내 밥값을 제대로 해내고 있지 못하다는 자책감이 무시로 찾아오기 때문이다.                  


오늘도 근무시간 내내 노션을 뻔질나게 드나들며 투두리스트를 작성했건만 반도 해내지 못하고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해치웠어야 했던 일을 잔뜩 남겨둔 채 집으로 도망치며 지하철이 꼭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죽어야지 진짜.' 무능함과 부끄러움을 느끼다가도 내일 쳐내야 할 일을 아른거렸다. '그래, 일단 내일 일은 끝내고 나서 죽어야지.'


저녁 8시 정각에 맞춰 2030 직장인을 정조준 한 듯한 광고가 눈치 없이 팝업창을 띄웠다. <일을 못하는 사람에게는 이유가 있다>라니. 영악함을 넘어 필요 이상으로 가혹하다는 생각이 스쳤다.


바야흐로 일잘러의 담론이 득실거리는 시대다. 그들처럼 일을 잘하고 싶은 마음에 콘텐츠를 뒤져보다 보면 세상에는 나 빼고 죄다 일잘러 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일잘러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일못러로 사는 건 참으로 외로운 일이다. 다들 일을 즐기는 방법, 자신의 성과를 연봉협상에 이용하는 요령에 대해 고민하는 동안, 나는 월급값만 겨우 해내려고 발악하고 있었다.


일잘러의 시대에서 일못러로 나고 자란 스스로가 꼭 도태된 돌연변이 같았다. 분명 세상의 절반이 일잘러라면 그 절반은 일못러일 텐데, 나 같은 사람들은 죄다 어디로 다 숨어버린 건지. 일못러들은 다들 죄인의 심정을 한 채로 집에 돌아가 벽에 머리를 쥐어박고 있느라 바쁜 걸까. 그렇다면 나도 어딘가에 머리를 냅다 들이박고 숨어버려야 하는 걸까.


자책의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사회에서 만난 선배A와 약속을 잡았다. 오랜만에 만난 선배에게 숨 쉬듯 자괴감을 느끼는 근황을 토로했다.


"사무실에서는 숨이 잘 안 쉬어져. 들숨에는 자괴감이 밀려들어 오고 날숨에는 자존감이 숭숭 빠져나가는 거 같아."


하소연을 무심하게 듣던 선배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야, 자기가 일못러라고 느끼는 사람은 일못러가 아니야. 진짜 일존못러는 자기가 일못러인지도 몰라."


참, 하다 하다 일못러 자격에도 미달이라니. 그러고 보면 이전 회사의 사수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스스로 부족하다는 자각이 있다면 그것만으로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어찌 됐든 회사일이라는 건 결승점 없는 장거리 달리기니까. 더딘 속도로 뛰던 사람도 꾸준히 내달리다 보면 중간쯤은 갈 수 있을 거라는 조언도 함께 주었다.


결국 태도의 문제라는 거다. 지금 당장은 일못러라도 염치라는 게 있는 인간이라면 능히 일을 잘하기 위해 노력할 테고, 결국 일잘러가 되진 않더라도 일못러 정도는 탈출할 수 있을 거라는 식의 이야기. 꼭 <토끼와 거북이>에 나올 법한 유치한 위로였지만 어쩐지 그럴 듯한 말처럼 들렸다. 열등감도 결국에 일존못러가 결코 가지지 못한 미덕이라는 거니까. 일못러라고 스스로를 박해하며 심해어처럼 몸과 마음이 잔뜩 찌부된 뒤에야 알았다. 내가 일못러는 돼도 '일존못러'까지는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메타인지를 해냈으니 이제 남은 일은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하는 것뿐이다.


때로는 '나는 그냥 일못러일뿐 일존못러는 아니다'라는 각오가 우스운 자기연민이나 기만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세상에 내가 나를 연민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연민해 줄까. 꼴사나운 착각보다는 못나도 솔직한 편이 낫다고 위안하며, 오늘도 스스로를 실컷 연민하고 기만한다.


요즘 누구도 등을 두드려 주지 않는 날에도 든든한 뒷배가 있는 것처럼 굴며(내가 일존못러까지는 아니다!) 일한다. 물론 어김없이 <파주는 못 말려>에 들어가기 충분한 흑역사를 만드는 날도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 세상에 어디 실패하지 않는 사람만 있을까. 자주 실패하고 실컷 박살도 나면서도 일못러의 그늘을 1mm씩 벗어나는 중이라고, 오늘의 실패가 결코 내년까지 이어지지는 않을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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