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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주 Jun 27. 2021

스몰토크를 위한 넷플릭스

회사에서 처음 '퇴사'라는 말을 입 밖으로 냈던 날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키보드 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사무실을 가로질러 부서장의 자리 앞에 멈춰 섰고, 이내 고개가 이쪽을 향했다. 아까 화장실에서 거울 보며 연습했던 여유로운 모습 그대로 ‘저 퇴사하겠습니다’를 외쳤다.


아니, 계획은 분명 그랬는데 눈이 마주치자 퇴사하겠다는 말을 렉걸린 PC 마냥 떠듬거리고 말았다. 몇 차례의 시도 끝에 간신히 의미를 전달하는 데에 가까스로 성공했고, 둘 사이로 10초 정도의 끔찍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이어진 완벽한 동상이몽.


얘는 하라는 마감은 안 끝내고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거야.'

'아니, 몇 달을 퇴사할 거라고 잔뜩 티내며 다녔구만. 이 양반은 왜 당황스러운 척 쳐다보는 건데?'


온갖 생각이 들던 찰나, 먼저 침묵을 깬 건 상사 쪽이었다.

“너는 무슨 퇴사한다는 말을 '점심에 뭐 먹을까요?’라는 말처럼 하냐?”

당장의 답변을 미루는 동시에 위트가 섞인 답변. 역시나 고단수였다.


퇴사한다는 말을 메뉴 고르듯 건넨 탓인지, 그날 점심 국장님과 백반정식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야 했다. 몹시 민망하면서도 서먹한 자리였는데 그중에서도 본론을 꺼내드는 게 가장 어려웠다. 일을 잘하지도, 그렇다고 의욕적으로 덤벼들지도 않았던 터라 퇴사한다는 말 한 마디면 미련 없이 이별하는 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건만, 퇴사를 결심한 이유를 꽤나 소상히 설명해야 했다.


“아 그러니까, 저는 내향적이라 사람들 만나고 다니는 게 뒤지게 힘드네요. 아무래도 적성이 아닌가 봐요. 그럼 안녕히...”

“괜찮아. 사람 만나는 건 나도 힘들어. 계속 하다보면 버틸 만 해.”

“그것만이 아니라요... 글 쓰는 게 도통 늘지 않는 것 같고... 여차저차 하여 이곳과의 인연은 정말 여기까지인 듯합니다. 진짜로 안녕히...”

“괜찮아. 기사 쓰는 건 꾸준히 하다보면 늘어.”


능력부족을 자책하며 밝힌 퇴사의사는 경험부족을 근거로 반려됐다. 당사자가 괜찮지 않다는데도 한사코 괜찮다는 말로 우주방어를 펼칠 줄이야. 결국 가고 싶었던 회사의 채용공고를 봤고, 그곳으로 이직하기를 결심했다는 말까지 털어놔야 했다. 동공이 잠시 흔들리더니 이내 결심한 듯 그동안 고생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뜬금없는 당부 한 마디도 덧붙였다.


“그래, 다른 건 모르겠고 다음 회사에 가걸랑 점심식사는 꼭 팀원들이랑 같이 먹어라.”


첫 회사에서 나는 완벽한 이방인이었다. 업으로 삼을 만큼 여행을 좋아하는 이들과 업이 된 바람에 별 수 없이 여행을 해야 하는 집돌이 사이에는 좀처럼 넘기 힘든 간극이 존재했다. 물론 저마다 가진 삶의 철학이야 다를 수밖에 없다지만, 스몰토크마저 자주 방향을 엇나갔다. 간신히 꺼낸 수십 발의 화두가 무용으로 돌아가 버리니, 제아무리 강철멘탈이래도 대화 의욕을 잃을 수밖에. 의도적으로 회사 사람들과의 사적인 시간을 회피하게 됐다.


점심시간이 특히 고역이었다. 매일 점심시간이 다가올 참이면 ‘오늘 도통 입맛이 없어서요’라고 둘러대곤 회사 근처 패스트푸드점에서 끼니를 대충 해결하거나 파워워킹으로 청계천 일대를 돌았다. 비나 눈이 내려 상황이 여의치 않은 날이면 책상에 얼굴을 파묻고 오지 않는 잠을 청하기도 했다. 굶주림은 기꺼이 견딜 수 있었지만 식탁 위에 놓인 1시간 분의 어색함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퇴사 직전 받은 그 조언이 퍽 인상적이어서 회사를 옮긴 뒤에는 밥때가 되면 사람들을 쫄래쫄래 따라다녔다. 팀원들과 식사를 같이 하다보면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얻게 되는데, 각자 담당하고 있는 업무(대화의 공백을 매우기 가장 쉽고), 업무처리 중 힘든 점(때때로 해결책을 듣기도 한다), 외주 작업비용에 대한 고민(알음알음 좋은 외주자를 소개받을 수 있다) 등 당장의 업무에 도움이 되는 내용도 꽤 많았다.


물론 위계가 정해진 상사와의 시간이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다. 근로시간에 들어가지도 않는 온전한 내 시간인데 굳이 업무시간처럼 보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다만 점심시간이 일주일에 5일, 하루 8시간 넘게 한 공간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가장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 있는 시간이라는 걸 이제는 알고 있다. 퇴사하는 막내 직원에게 구태여 ‘다른 회사에서는 팀원들과 밥을 먹으라’는 조언을 건넨 이유가 있었다. 회사 동료와 친구가 될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역시나 적당한 거리는 필요하니까. 적당한 거리라는 건 적당히 먼 동시에 적당히 가까워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대체로 즐겁고 배울 것도 많지만, 문제는 대화가 툭툭 끊겨 정적이 흐르는 날이다. 일말의 침묵도 견디지 못하는 괴랄한 성격 탓에 할 말이 떨어지면 주제가 사적인 얘기로 속절없이 흘러가기도 한다. 프라이버시의 기준이야 제각기 다르다지만, 가끔은 스스로 정한 선을 넘어버리는 실수를 범한다.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고 궁금해 하지도 않는 내 이야기. 그런 말들을 꾸역꾸역 내뱉은 날이면 머리를 감다가 뒤통수를 벅벅 긁어내며 욕설을 뱉는다. 


‘어휴 지랄, 그런 말은 또 왜 해가지고...’


사람이 또 죽으란 법을 없는지, N년차 동안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서 나름의 요령을 체득했다. 대화 소재가 바닥났을 때 단번에 전환시키는 스몰토크를 던지는 거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가 얼마나 망했는지부터 넷플릭스 상영작이 얼마나 잔인한지, 스타벅스 핑크색 레디백을 구하려면 새벽 5시부터 줄을 서야 했다 등등. 주제는 다양할수록 좋다.


침묵이 다가오는 불안이 서늘하게 느껴지기 시작할 때면 잽싸게 짱구를 굴리기 시작한다. 이때 주어진 시간은 대략 5초 정도다. 출근길에 읽은 뉴스, 주말에 본 넷플릭스 영화의 줄거리를 쥐어짜내 툭 하고 식탁 위로 올린다. 그걸로 이야기가 오가는 동안 발을 동동 구르며 다음 주제를 고민한다. 외향적인 사람들이야 대화를 유려하게 이끌어 가는 게 패시브 스킬처럼 갖춰져 있겠지만 내향 of 내향인인 나에게는 스몰토크를 하는 것도 마냥 쉬운 일이 아니니까. 화두를 던지는 게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철저한(동시에 처절한) 준비가 필요하다.


출근을 앞둔 일요일 저녁이면 넷플릭스를 켜고 ‘가장 핫 한 콘텐츠’를 부지런히 찾는다.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적당한 투자다. 시즌제는 너무 설명이 장황해지니 분량이 짧고 어렵지 않은 내용이 딱 좋다. 지난 주말에도 넷플릭스에서 스몰토크용으로 제격인 코미디 영화를 찾았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법한 내용인데다 가볍고 유쾌하기까지 하다. 다가올 점심시간, 식탁 위에 침묵이 흐른다면 이 영화를 화두로 던져보리라.


월요일의 스몰토크를 대비해 찾은 영화의 제목은 이거다.

스트레스를 부르는 그 이름, 직장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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