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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쇼코는 왜 Oct 03. 2019

누군 늙고 싶어서 늙니?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에이징 월드: 내일도 날 사랑해 줄래요>


소설 '은교'를 아직까지도 문제를 가진 작품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당시에도 센세이션 했고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그 소설의 '문제의식'을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나는 '늙음'에 대한 것을 말하고 싶다. 시인 '이적요'는 늙었기에 은교에게 사랑한다고 할 수 없었고 늙었기에 자신의 제자에게 밀렸으며, 늙었기에 그렇게 죽어갔다. 소설은 '늙음'을 전면에 내세우진 않지만 모든 사건을 연결할 포인트를 바로 이적요의 '늙음'에 두고 있다. 그렇게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든다. 늙는다는 건 뭘까? 기준은 어디고 몇 살부터 늙는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주름과 흰머리, 몇 가지의 병을 가진 그 몸들은 추한 걸까? 간혹 우리는 '늙은 사랑'에 대해 주책맞다는 표현을 하곤 한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늙은 사람'을 지칭하는 많은 신조어들이 등장하고 우리는 그것을 사용하고 있다. 물론 대부분은 부정적인 것들이다. 좁혀질 수 없을 것 같은 '젊음'과 '늙음' 사이의 간극과 편견이 가득한 지금, 내가 다녀온 전시가 이에 대한 해답을 내줄 수 있길 바란다.


로렌 그린필드, <코튼 볼>, 2012


'불안의 욕망'으로 인한 '미'의 추구, 죽음에 가까워짐을 인지할수록, 그리고 자신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인지할수록 사람은 자신을 감출 도구를 필요로 하게 된다. 그렇기에 화려하고 비싸고 자신의 외형을 부풀리는 무언가를 자꾸만 찾게 되고, 그것은 노화에 대한 불안을 완화시킨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생성된 노화의 이미지는 수술, 미용 등 그것을 해소할 방법까지 같이 주지만 그것은 일시적이다. 그리고 애초에 노화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낸 게 자본주의이기에 노화에 대한 고민은 깊어질 뿐 해소되지는 않는다.


로렌 그린필드, <비버리힐스 베르사체 매장의 프라이빗 오프닝 행사에 베르사체 핸드백을 들고 있는 재키와 친구들>, 2007 / <있는 것은 아름답다>, 조세피나 사진


두 개의 사진을 비교해보자. 왼쪽은 <에이징 월드>의 작품이고, 하나는 예전에 다녀온 <있는 것은 아름답다> 전시의 사진이다. 죽음 앞에서 초연한 인간의 꾸미지 않은 모습과 그것을 거부하기 위해 거대한 장식물 뒤에 자신을 감추는 사람은 단연 비교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아이러니 속에 빠져있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노화를 감추기 위해 다시 한번 자본주의 속으로 뛰어들어 그것들이 만든 젊음에 동화되고자 한다. 외적인 것에 대한 집착이 만들어낸 이 악순환의 구조는 죽음을 초월하지 않고서야 계속 존재하겠지만 그것에 대한 본질적인 고찰은 계속돼야 할 것이다.


안네 올로프손, <내일도 여전히 날 사랑해 줄래요>-안네(왼), 미아(오), 2004
안네 올로프손, <내일도 여전히 날 사랑해 줄래요> 왼쪽부터 크리스티나, 우샤, 마리안, 리즈, 2004


나이 듦에 있어서 남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만큼이나 중요한 건 내가 나를 보는 시선이다. 우리는 화장과 성형수술 등에 대해 외부의 시선에 너무 많이 신경을 쓴다고들 하지만 그보다 앞서는 시선은 자기가 스스로를 보는 시선이다. 즉 자기만족이 우선되는 것이다. '안네 올로프손'은 이런 시선의 층위에 대해 고민한 것 같다. <내일도 여전히 날 사랑해 줄래요>라는 작품은 자신의 신체적, 외형적 변화를 감지하기 시작한 40대의 여성들의 초상을 사진으로 담아낸 것이다. 이 작품을 자세히 보면 얼굴에 오래된 유화 작품 같은 실금이 가 있는데 이는 세월에 대한 강박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느껴지는 강박은 세 가지의 시선에 의해 구성된다. 첫째 작품을 보는 나의 시선, 둘째 카메라를 보는 모델의 시선, 셋째 모델을 보는 작가의 시선이다. 얼굴에 그어진 실금은 단순히 주름을 나타낼 수도 있지만 더 깊게 들어가 보면 노화로 인해 나타나는 개인적, 사회적, 집단적, 가정적인 위치에서의 불안까지도 나타낸다. 사회는 이미 나이가 든 사람에게 관용적이지 않다. '연령 차별주의' 젊은 사람이 경험이 없다고 어리다고 차별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이가 든 사람들은 그들 나름의 차별을 받고 살아간다. 그런 나이에 대한 차별과 강박은 나이가 들면서 벗어날 수 없는 굴레로 작용하는데 이는 개인을 위축시키고 소심하게 만든다. 작품은 이런 시선들과 정면으로 마주한다. 그녀들의 눈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오형근, <진주 목걸이를 한 아줌마>, <호랑이 무늬 옷을 입은  아줌마>, <밝게 웃는 아줌마>, 1997


마지막으로 '오형근' 작가의 <아줌마> 연작을 살펴보자. 일단 지금까지 봐왔던 작품들보다 훨씬 친숙하다. 우리나라에서 '아줌마'만큼이나 특징이 명확한 것도 드물 것이다. 드세고, 진한 화장에 조금은 촌스럽지만 화려한 옷을 입고 낯 가리지 않고 가끔은 부끄러운 행동까지도 하는 그런 이미지를 우리는 살면서 들어왔고 겪어왔고 옆에서 봐왔다. 하지만 이런 특징들 속에 갇혀버린 아줌마 개인에 대한 고찰을 해보려는 노력은 부족한 게 사실이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엄마'라는 존재도 남들이 볼 때는 그저 아줌마일 뿐이다. 우리 엄마가 과연 저랬던가? 생각해보면 고개를 저을 사람도 꽤 많을 거라는 말이다. 


작가가 작품을 선보인 1997년에는 지금보다 '아줌마'에 대한 논의가 부족했다. 지금에 와서야 '아줌마'는 특정 연령대의 여성을 낮잡아 이르는 말처럼 느껴지지만 그 당시만 해도 친숙한 호칭으로 '아줌마'를 불렀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에 '오형근' 작가의 작품에는 우리가 아줌마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이 그대로 들어가 있다. 우리는 아줌마에 대해서 만큼은 여전히 97년도의 시선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 전시의 영문 제목은 'Will you still love me tomorrow?', 직역하면 '내일도 여전히 날 사랑해 줄래요?'다. 이건 나를 사랑해주는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늙음에 대한 편견이 만든 사회적 시선과 그것 때문에 오는 개인의 과장된 행동들, 혐오가 가득한 이 시점에 누구라고 다음날 자신이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리고 자신을 스스로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누가 자신할 수 있을까? 자신을 사랑하고 그것을 넘어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는 게 필요한 시대가 마침내 오고 있다. 



기간: 2019. 08. 27~2019. 10. 20

장소 및 시간: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평일 10:00-20:00, 주말 10:00-19:00

홈페이지: https://sema.seoul.go.kr/ex/exDetail?currentPage=1&glolangType=KOR&exGr=&museumCd=&targetDate=&searchDateType=SOON&exSearchPlace=&exNo=316642&startDate=&endDate=&searchPlace=&kwd=EXF01&kwdVal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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