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혐오에 빠졌던 내가 돌아기에게 사랑을 배운다.
나는 자기혐오가 심한 사람이었다.
나는 예쁘지 않다.
나 스스로 '나는 예쁘지 않구나'를 느꼈던 게 몇 살쯤이었을까. 어렸을 때 우리 엄마는 나에게 입버릇처럼 '세상에서 제일 예쁜 우리 딸'이라고 하곤 했다. 정말로 내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줄 알았지. 근데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내가 받는 이 거절이 내 외모 때문인 것 같았고, 어디서나 자신이 없었다.
쌍꺼풀이 없는 내 눈이 싫었고, 유독 낮아 보이는 내 코, 보름달처럼 둥근 내 얼굴형까지 모든 게 다 싫었다.
그렇게 나는 내가 싫었다.
자기를 부인하고 ... 나를 따르라
나는 개신교 모태신앙이다. 어릴 때부터 예수 안 믿으면 지옥에 가는 거라고 배우며 자랐다. 이십 대 중반까지는 아주 열렬한 신앙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 이유로 교회를 다니지 않게 되었고, 우리 엄마가 들으면 까무러치겠지만 무신론자에 가깝다.
성경은 네 스스로를 부인하고 예수를 따르라고 한다.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고 신이며, 신이 주는 생각대로 살아가는 것이 유익하다고 한다. 물론 성경이 진짜로 전하고자 하는 바는 자기혐오가 아니겠지만,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배운 건 자기혐오뿐이었다.
내가 하는 생각은 다 나쁜 거야, 내가 하는 결정은 다 틀려, 하고 싶은 대로 살면 안 돼.
그렇게 나는 나를 잃어갔다.
쓰고 진한 사회생활의 기억
대학 졸업도 전에 시작했던 첫 사회생활은 나에게 굳은살 같은 것을 남겼다. 일 년 반의 시간이었지만 지금도 결코 짧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강렬했다. 뭐, 이때의 경험으로 지금의 단단한 내가 있는 것이긴 하나, 후배들에게 굳이 권하고 싶지 않을 경험이다.
내가 일을 배웠던 사수는 모든 게 어리숙하고 어설펐던 스물네 살의 나에게 온갖 가스라이팅을 해댔다. 그때는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가 대중에게 알려지기도 전이었는데, 이 사람과 일 년을 함께 하고 나니 내가 정말 쓰레기같이 느껴지고, 정말로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는 사람이 되었다. 뭐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도 되는 젊은 나이임에도 내 인생은 이미 글러먹었다고 생각했다.
웃기게도, 그때 당시는 열렬한 신자여서, 스스로 죽겠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지만, '지나가는 차에 치여서 내일 출근 안 하고 싶다.' '어쩌다 크게 다쳤으면 좋겠다.' '교통사고 같은 게 나서 죽었으면 좋겠다.' (? 자살하면 안 되니까ㅋㅋ) 이런 생각들을 했었다.
외모, 가치관, 삶에서 자기혐오를 열심히 실천하던 나는 문득 지난날들이 후회스러웠다.
내가 좀 더 예뻤더라면, 종교에 젊은 날 바치지 않았더라면, 이 회사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또는 이 선배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러나 내 지난날들이 한 번에 합리화되고 지난 선택들이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나 스스로 인정할 수 있게 된 건 남편을 만나고 결혼하게 되면서부터다.
남편은 나의 현재 회사 입사 동기의 학교 선배인데, 소개해준 친구도 예상하지 못하게 어쩌다 보니(?) 우리는 결혼까지 하게 됐다.
나는 가끔 우리의 만남을 신기해하면서, 이 친구가 소개시켜주지 않았다면, 내가 이 회사에 입사하지 않았다면, 내가 그전회사를 그렇게 그만두지 않았더라면, 너를 만날 수 없었을 텐데,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많이 사랑한 사람은 남편이 처음이었고, 그렇게 결혼까지 하게 되었으므로, 내 인생은 모든 게 최고의 선택이 되었다.
자기혐오가 뿌리 깊게 박힌 나는 남편에게 연애할 때부터 이런 질문을 수도 없이 했었다.
"나를 왜 좋아해? 나랑 왜 사귀는 거야?"
감정표현이 좀 서툰 우리 남편은 이런 질문을 해댈 때마다 진땀을 뺐다. 고민 끝에 그가 항상 하는 말은,
특별한 이유가 무엇이 있겠냐, "너니까 좋아한다."
나는 그 이유가 별로 와닿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나는 예쁘지도 않고, 성격이 온순하고 착하지도 못하고, 엄청난 학벌이나 직업을 가진 것도 아니고, 우리 집안이 대단한 것도 아닌데, 왜 날 좋아하지?
돌이켜 생각해 보니 저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내 안에 뿌리 깊은 자기혐오로부터 시작했던 것 같다. 나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데, 이 사람은 왜 나를 좋아할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날 좋아한다니까 좋긴 한데, 이유를 모르겠어서 불안했다.
아기가 생겼다. 힘든 임신기간을 이겨내고 내 인생 최대 업적인 출산을 해내고 나니 (나를 닮았다고들 하는데 나는 잘 모르겠는) 아기가 태어났다. 어떤 엄마들은 아기를 낳자마자 모성애가 샘솟는다는데, 사실 나는 그런 거 잘은 모르겠고, 처음엔 나에게 주어진 의무처럼 아기를 키우기 시작했다.
점점 나를 보고 웃어주고, 나에게 기어오고, 나에게 박수를 쳐주고, 나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이 아이.
이번 주면 돌이 되는 우리 아이는 소파 위에 등받이를 잡고 서서 창밖을 바라보는 걸 좋아한다. 그렇게 창밖을 바라보는 우리 아이 옆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나도 우리 아이를 그냥 이유 없이 사랑해.'
우리 아이가 (내 눈엔 무지 예쁘지만) 예쁘지 않아도, 공부를 잘하지 못해도, 가끔 속을 썩여도, 남들 다한다는 만큼 못해도 사랑할 것 같다. 그냥 네가 내 아이이기 때문에, 그냥 네가 좋다.
이제야 우리 남편이 나에게 했던 대답이 조금 이해가 된다. '자기니까 좋아하지'
이유가 없고 조건이 없는 사랑이 진짜 사랑이었음을 이제서야 깨닫는다. 그리고 나도 그런 사랑을 받고 있고,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임을.
우리 아이와 함께한 지 일 년, 내가 이 아이에게 가르쳐 준 것보다 아이가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이 더 많다.
고마워, 엄마와 함께 해줘서. 앞으로 엄마의 남은 인생동안 열렬히 사랑할게, 앞으로도 잘 부탁해 우리 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