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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멍난 숟가락 Jan 14. 2018

떨리는 차슈덮밥

소개팅 메뉴를 고르는 어려움에 대하여

소개팅 메뉴를 고르는 고충을 나는 이해할 것 같다.      


몇 년 전, 친구가 제일 아끼는 소꿉친구라면서 소개팅을 해준 적이 있다. 안정적인 직장에, 훈훈한 외모에, 다양한 취미생활을 즐기는 건실한 청년이라고 했다. 만나보니 실로 그러하였다. 어디 하나 흠잡을 데가 없는 반듯한 청년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그는 첫 만남에서부터 나를 시험에 빠뜨렸다. 소개팅 장소를, 뷔페로 잡은 것이다! 그는 종로 모 뷔페로 나를 안내하고서는 이렇게 말했다.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 당연하다. 나도 그 많은 음식 중에서 내가 뭘 제일 좋아하는지, 어디부터 손을 대야할지 몰랐으니까. 아니, 그보다는 정말 난감했다. ‘첫 만남부터 내 정체를(대식가!) 드러내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그러나 자연스럽게 한 접시, 한 접시 뜰 때마다 고민은 눈 녹듯 사라졌고, 꼭 내 소꿉친구와 재회한 듯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반가웠다, 친구야!” (라는 뉘앙스로) 인사하며 헤어졌다. 그 후, 그 친구(내 맘대로 친구)를 다시 만난 적은 없다.      


그 후, 선배가 주선한 소개팅에서 나는 또 한 번 소개팅 메뉴를 고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됐다. 장소는 주말의 삼청동이었다. 당연히 사람은 많았고, 어딜 가나 차는 미어터졌다. 그러나 그는 근처 회사를 다니는 터라, 삼청동 일대를 훤히 꿰고 있다고 했다. 그는 맛있는 파스타 집으로 가자며, 차를 몰았다. 그런데 삼청동을 돌고, 돌고 또 돌아도 그가 가고자하는 파스타집은 보이지 않았다. 현실에 존재하긴 하는 걸까 싶을 정도로 행방이 묘연한 파스타집이었다. 그렇게 다시 돌고, 돌고, 돌다가 갑자기 멀리 등대처럼 불이 켜진 간판이 하나 들어왔다. 그 간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파. 스. 타” 정말로 파스타집이었다!     

 

게다가 더 놀라운 건, 그 집 메뉴판이었다. 한쪽에는 파스타 종류가 써져 있었고…… 한쪽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사주 3만원, 궁합 5만원. 그러니까 그곳은 사주카페 겸 레스토랑이었는데 홀에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중년 아저씨 한 명인 걸로 봐서는 그 분이 서빙 겸 요리 겸 사주까지 보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 소개팅남과 궁합을 볼 일은 생기지 않았다.     


몇 년 후, 또 다시 낯선 누군가를 만나러 갈 일이 생겼다. 장소는 광화문 촛불집회 현장이었다. 좀 걷다가 추워서 눈에 띄는 카페에 들어갔고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그가 평소 가는 식당 중 한 곳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일본식 라멘과 덮밥을 파는 작은 가게였다. 그는 메뉴판을 펼쳐서 뭘 먹어봤고, 맛이 어떤지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나는 그가 즐겨먹는다는 차슈덮밥을 시켰다. 차슈가 가득 올려져 있고, 분홍색 생강절임이 곁들여진 차슈 덮밥 한 그릇. 그 소박한 식사가 마음에 들었다.    

 

소개팅에서 중요한 건, 음식의 종류도 가격도 아니다. 그건 우리가 프로필이나 이력서를 보고 누군가와 친구가 되지 않는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은 상대가 어떤 음식을 고르느냐를 보고, 그 사람의 센스를 점검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 본질적인 건 따로 있다. 둘 사이에 놓인 음식 너머, 상대의 어디를 응시하고 있는가. 그 옛날 <사랑의 스튜디오>에 나오던 화살표처럼 서로를 향한 그 시선이, 상대의 마음에 가닿느냐, 마느냐. 중요한 건 바로 그거다.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앉았던 그날, 소박한 두 그릇의 차슈덮밥 사이로 건너온 질문들은 내 마음에 안착했다. 비록 상대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먹는 내내 조금 긴장이 됐지만……. 나중에 그 차슈덮밥을 떠올렸을 때, 나는 다시 이름을 붙여주었다. 떨리는 차슈덮밥이라고. 그리고 그 떨리는 차슈덮밥은 2017년 나의 올해의 식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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