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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매 맺는 기쁨 Jul 22. 2024

아니무스와 아니마

신화로 읽는 남성성, He 파이널 에세이, 로버트 A. 존슨

나는 남편의 섹시한 몸에 끌렸다. 그는 나의 다정함에 끌렸다고 했다. 나는 유혹을 원했고, 남편은 쉼을 원했다. 우리가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 나는 그가 아닌 나의 내적 기사(아니무스)와 사랑을 나눴고, 그는 내가 아닌 그의 영원한 뮤즈(아니마)에게 연정을 받쳤다.

내가 남편에게서 느낀 것은 단연 나의 '영원한 아버지'였다. 그리고 남편이 나에게서 본 것은 단연 그의 '영원한 어머니'였을 것이다. 우리는 조금씩, 아니 사실 한쪽으로 무척 치우친 불균형적인 내적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서로에게 끌렸다. 우리는 서로의 반려가 될 운명이었다. 외현적으로 우리의 관계가 역기능적일지라도 우리의 내적 궁합은 실로 환상적이었다.


우리가 환상에서 벗어나 진실한 서로를 대면하고 진지한 관계를 이어나간 것은 첫째 아이가 태어난 이후였다. 우리의 사랑은 그제야 시작되었다. 우리는 그때 살을 가진 여자와 피를 가진 남자로 서로를 만났다. 우리 관계의 역동은 아이를 양육하며 더욱 입체적으로 드러났다. 우리는 새 생명 앞에서 서로의 허물과 그림자를 알아차렸다. 서로의 고통과 불안, 두려움을 발견하였다.


나의 무의식을 들여다보자. 나는 아버지의 힘을 연모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쟁취하고 정복할 힘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칼을 휘두를 권리와 성적으로 방탕할 이유, 그리고 무모하고 충동적인 자질을 타고났었다. 그는 지배자였다.


나는 피지배자인 어머니를 불쌍히 여기며 그녀가 가진 여성적인 힘을 하찮게 생각했다. 어머니는 그저 참았다. 자식을 품고 견뎠다. 어머니는 도망칠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학대를 받으면서도 자기 자리를 지켜야 했다. 그것이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요구하는 유일한 아내로서의 자질이었다. 그것이 아버지가 어머니와 결혼한 단 한 가지 이유였다. 아버지는 나와 마찬가지로 유기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여러 가지 시련으로 어머니를 시험했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준 시련은 '당신은 내가 이래도 나를 떠나지 않을 건가?'라는 주제로 함축되어 있었다. 나의 어머니는 한동안 너무도 훌륭하게 자기 역할을 해냈다. 교도소를 들락날락하는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며 생계를 책임졌고, 아버지 대신 사람들 앞에 조아려 용서를 빌었다. 나의 어머니는 할 수 있는 만큼 그렇게 자신의 아이를 지켰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려 했을 때, 아버지는 받아들일 수가 없어 어머니에게 무릎을 꿇고 '나를 떠나지 말라며' 빌었다. 아마도 당시 나의 어머니에게 다음 단계의 영적 각성이 있었던 것 같다. 그때 어머니는 아버지와 이혼했다.


이 역동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삶은 그들을 지배하는 무의식적 힘의 발현이었다. 그것은 나의 숙명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피로, 어머니의 살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나는 여성이면서도 내 안의 여성적 힘을 조롱하며 희롱했다. 나는 주로 남성적 힘을 사용했다. 나의 기사님, 나의 아버지, 나의 아니무스의 힘이었다. 부모님의 관계가 나의 무의식에서 재현되었다.


나는 전쟁하고 선포하며 삶의 문제를 해결해 나갔고, 그것을 자랑삼았다. 나는 경직된 지식에 나를 의탁했고 고지식하고 깐깐한 사람이 되었다. 나는 쉬질 않았다. 나는 안식할 수 없었다. 내 안에는 지배와 폭력이 난무했다. 나는 어머니의 사랑이 아닌, 아버지의 사랑으로 아이를 키웠다. 성숙한 남성의 힘이 아니었다. 조약하고 희미한 남자아이의 힘이었다. 그래서 늘 조급해졌다.


아이의 입이 나의 젖을 빨 때, 아이의 작은 몸이 나의 몸에 닿을 때 나는 잠시 여성의 힘의 경도되었지만, 그뿐이었다. 젖을 먹이고 안는 것 외에 아이를 키우는 모든 과정을 아버지의 힘으로 하려 했다. 그래서 나는 무서운 어머니가 되었다. 나는 좌절스러웠다. 생명을 품고 키울 수 없는 나의 황량함에 기가 막혔다. 어디서부터 잘 못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좌절감에서 나의 영적 여정이 시작되었다, 사실 아이를 키우는 것 자체가 나의 영적 여정 그 자체였다.


이제, 나의 남편의 무의식을 한번 들여다보자. 그는 어머니의 힘을 연모하고 있었다. 무능한 남편을 대신하여 억척스럽게 아이를 키우고 가정을 돌보는 그의 냉정한 어머니는 그의 유일한 생존 기반이자 안식처였다. 남편은 '따뜻함'이 그리웠다. 그는 무의식적 여성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사했다. 그래서 그의 아니마는 한없이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연약한 것을 품고 돌봐주었다. 지친 마음을 달래주었고, 평화와 안식을 주었다. 그는 남성이면서도 그 안에 있는 남성성을 미워했다. 어머니를 박해하고 아이들에게 수치심을 주는 아버지를 증오했다. 그래서 그는 주로 여성적인 힘을 사용했다. 그의 공주님, 그의 어머니, 그의 아니마의 힘이었다. 성숙한 여성의 힘이 아니었다. 예민하고 기복이 심한 여자아이의 힘이었다. 그래서 늘 불안했다.


그는 자기 힘으로 무언가 성취할 때 잠시 남성의 힘에 매료되었지만, 그뿐이었다. 일하고 관계를 맺는 일에 여성의 힘을 사용하려고 했다. 그는 어머니의 힘으로 사회인으로 살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야망이 없는 남성이 되었다. 그는 두려웠다. 항상 그 자리에 머무르려고 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나 잘 지키자며 모험하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늘 정체되어 있었다. 그도 그런 자신이 갑갑했다. 그래서 그 또한 자신만의 영웅의 여정을 시작하였다. 그의 가장 황폐한 곳에서 그의 구원 역사가 태동되었다. 사실 가장이 되는 것이 그의 영웅의 여정이었다.


무의식의 횡포를 알아차리고 무의식을 자원으로 삼기 위하여, 나에게는 여성성의 회복이, 남편에게는 남성성의 회복이 요구된다. 나는 생산해야 하고 내부와 연결되어야 한다. 남편은 삶을 구조화하고 외부와 연결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내면의 여성성과 남성성을 조화시켜야 한다. 대극이 사라진 곳에서 '진실한 나'는 회복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염두해야 할 것이다.


여성성이야말로 존재의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힘이다.

여성성은 남성성의 힘을 신뢰해야 한다.

남성성은 여성성을 위해 일해야 한다.

남성성은 여성성에게 유혹당하거나 유혹해서는 안 된다.

성장은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생의 군더더기를 덜어내야 한다. 그래야 눈앞의 성배의 성을('진실한 나'의 장소) 발견할 수 있다.

우리의 구원은 내면 깊은 소망을 깨닫는 것이다.

여정에 필요한 것은 모두 구비되어 있다. 삶이 인도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내적 힘을 분별하지 않아야 한다. 내 안에 나쁜 것은 없다. 그것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완벽이란 없다. 중요한 것은 나로 완전해지는 것이다.


나는 나의 여성적 면모를 사랑하고 싶다. 나는 남편의 영감이고 싶다. 나는 그의 영웅적 면모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나는 그를 깊이 존경하고 사모하고 싶다. 나는 그가 나를 통해 낳은 그의 아이들을 어머니로 사랑하고 돌보고 싶다. 내가 꾸린 가정에서 안식한 남편은 우릴 위해 세상에서 땀 흘리고 자신의 세계를 곤고히 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나의 영적 여정이며 목적일 것이다.


나와 남편의 무의식은 우리 힘의 근간이 될 것이고, 진실한 자신이 됨으로 태초에 있었던 창조의 힘이 우리 안에서 복원이 될 것이다.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아난다 캠퍼스에서 살림명상 중입니다.

살림명상 중, 책을 읽고 쓴 에세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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