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주요 도시들을 기항하는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는 몇 년에 거쳐 한 번씩 진행하는 선박의 수리, 보수작업인 드라이닥(dry dock)을 위해 마침내 일본 크루징을 매듭짓고 동남아시아를 향해 유유히 항해하기 시작했다.
드라이닥은 싱가포르에서 2주 동안 이루어지게 될 예정이지만 선사는 단순히 '일본-싱가포르'라는 단일적인 코스로 스케줄을 강행하는 것이 아닌 싱가포르로 향하는 동안 만나게 되는 동남아시아의 포트 몇 군데를 기항하는 상품을 제공하였다.
시즈오카와 오사카에게 잠시 작별인사를 전한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는 가장 먼저 아시아에서 야경이 예쁘기로 소문난 홍콩을 기항하게 되었다.
스타 크루즈에서 근무를 하는 동안 가장 많이 기항했던 포트인 홍콩. 수십 번도 넘게 방문했던 곳이라 별다른 감흥이 없이 지겹기만 할 줄 알았는데, 이게 웬일인가. 12월임에도 불구하고 갱웨이를 벗어나자마자 느껴지던 습한 공기, 익숙한 말소리와 풍경들은 마음속 한편에 깊이 잠들어있던 옛 추억을 단번에 상기시켜주었다.
포트 근처의 거리들은 웬만큼 꿰고 있는지라 핸드폰 없이도 방황하지 않을 자신이 있던 나는 우리는 집 앞마당 마냥 거리를 활보했고, 함께한 언니의 넓은 마음 씀씀이 덕분에 홍콩에 올 때마다 자주 먹었던 나베원(샤브샤브)을 점심 장소로 택할 수 있었다.
그리웠던 제니쿠키와 버블티, 군것질거리가 빠지면 섭섭하니 적당히 먹을 만큼만 구매해 배로 돌아온 나는 많은 추억이 담긴 제2의 고향인 이곳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이틀 뒤,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는 베트남의 두 포트를 순차적으로 기항하였다. 햇볕은 따가웠지만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의 날씨였기에 오랜만에 코리안 마피아들의 모임을 추진했다. 휴식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은 멤버들을 고려해 짤막하게 거리를 둘러본 우리는 근사한 식당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메뉴판에는 군침이 도는 메뉴가 가득했고, 그중 가장 눈에 띄는 몇 가지 음식만 주문한 후 맥주를 한잔 기울이며 먹고 마시며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저렴한 물가와 친절한 사람들, 그리고 적당한 근무 스케줄 덕분에 웃음꽃이 지지 않았던 일정. 여러 부문에서 부담 없는 곳이라 자주 오면 좋겠다고 다수의 크루 멤버들이 입을 모아 말했던 포트였던 베트남.
또다시 이틀 뒤, 우리는 마침내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드라이닥 목적으로 기항한 것은 아니라 크루즈 접안이 가능한 항구에 정박을 시켰다. 이날은 많은 크루 멤버들의 사인오프(sign off; 계약을 마치고 배를 떠나는 날)가 이루어졌고, 선내에 필요한 품목과 물자가 쉴 새 없이 오갔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케테이와 함께 어울려 자주 시간을 보냈던 디에고를 배웅하기 위해 나는 갱웨이 근처로 잠시 올라왔다. 웃으며 인사하는 그의 담담함에 나와 함께 온 유리카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루의 씨 데이(sea day)를 거쳐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는 말레이시아의 대표 포트인 코타키나발루에 정박했다. 반나절도 채 주어지지 않은 시간 탓에 삼삼오오 모인 대부분의 크루 멤버들은 셔틀버스 타고 근처의 쇼핑센터로 향하였다. 사정상 혼자 나오게 된 나는 맛있어 보이는 식당을 골라 메뉴가 나오길 기다렸다. 그런 나를 발견한 부띠끄 부서 친구인 카라는 반갑게 인사했고 함께 점심을 먹으며 간소하게 담소를 나누었다.
이 날따라 유독 찜통더위가 기승이라 시원한 슬러시와 군것질거리를 사들고는 행여 늦을 새라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프런트 부서 아야코를 만나 셔틀버스 대기라인에 줄을 서서 이 포트를 오래 즐기지 못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맘때 크루즈 선내는 크리스마스 시즌으로 매우 분주하였다. 하지만 그만큼 곳곳에 배치된 화려한 장식들은 각종 볼거리를 선사했고, 모두들 성탄절을 의미 있게 보낼 준비에 한껏 들떠있는 듯했다. 각 부서의 매니저들은 팀원들에게 크리스마스 리스 제작 의사 여부를 조사했는데, 1등 한 부서는 소정의 혜택이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 리스 만들기에 정성을 다했다.
카지노 업장의 문을 닫은 깊은 밤, 매니저 존이 팀원들을 위해 시크릿 산타(마니또와 유사함) 이벤트 자리를 마련하였다. 서로가 준비한 선물을 주고받으며 크루 메스에서 특별히 준비한 음식과 함께 얼마 남지 않은 2018년의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아침, 나는 여러 명의 바 부서 친구들과 함께 태국 코사무이의 보풋 해변으로 향했다. 너나 할 것 없이 우리는 해안가로 뛰어들어가 헤엄치며 스트레스를 날렸다. 모래 위에 누워 따갑게 내리쬐는 햇볕 아래에서 광합성을 하거나 물가에 앉아 모래성을 쌓았다. 맛있는 음식과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오프 듀티를 즐긴 우리는 찰나였지만 즐거운 하루였다며 곧 있을 근무를 위해 씩씩하게 배로 돌아왔다.
분명 카지노 부서인 나보다 짧은 휴식시간이 주어졌을 텐데 이 정도의 에너지를 쏟고도 곧잘 일했던 친구들. 역시 크루즈승무원은 잘 놀고, 일 잘하는 사람들에게 딱인 직업이 틀림없는 것이야!
다시 싱가포르로 돌아온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반나절 정도만 머무른 후 인도네시아 발리로 향했다. 태국에서 인도네시아를 항해하는 동안 새해를 맞이하게 되어 선내에서는 뉴 이어 파티를 진행하였다. 근무 중이던 우리는 매니저의 재량 아래 잠시 동안 카지노 업장의 문을 닫고 샴페인을 한잔하며 떨리는 마음으로 카운트다운에 동참했다.
근무를 마친 후에는 유니폼을 벗어던지고 오늘을 위해 준비한 개량한복을 차려입고서 크루바를 찾았다. 모든 친구들에게서 입고 있는 한복이 예뻤단 칭찬만큼 2019년은 어떤 해일까 매 순간 설레었던 밤.
2019년의 첫날은 어디서 보내게 될까 궁금했던 반년 전, 인도네시아 발리가 될 줄은 몰랐다지.
더욱이 친구들과 함께 방문하게 된 이곳은 스타 크루즈 근무 시절 다녀갔던 바로 그 장소였기에 내겐 너무 뜻깊었던 순간. 그 자리 그곳에 위치한 식당, 음식, 바다, 뷰 등 모두 예전과 일치하는 바람에 괜스레 눈시울이 붉어졌다.
1월 4일, 긴 시데이를 거쳐 다시 돌아온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프르. 이번에는 기필코 KL TOWER에 방문하고야 말겠다고 다짐했고 사전에 크루 투어를 예약했었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쌍둥이 빌딩의 경관은 간만에 짜릿한 기분을 선사했다.
짧은 숄립(shore leave; 기항지 관광)을 뒤로하고 배로 돌아온 우리는 반나절의 듀티 후 크루바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특히 이날은 크루즈 스탭 부서 유마가 얼마 전 상품으로 게스트 객실 하루 이용권을 제공받아 우리는 그곳에서 특별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텐더 보트 라인업에 정신이 혼미했던 태국 푸켓. 그렇지만 그 따가운 더위를 견디고서라도 꼭 하고 싶었던 건 바로 이 코끼리 타기 투어!
난생처음 타는 코끼리, 아니 난생처음 코끼리를 가까이에서 본 우리는 신기함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한 가지 아쉬웠던 건 순서에 따라 아기코끼리에 올라타게 되어 거대하고 웅장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는 없었다는 것. 투어 내내 꿈틀거리고 씰룩 거리는 엉덩이의 반응에 즐거웠지만 행여 아기 코끼리가 우리 무게를 견디지 못할까 봐 노심초사했었다.
코끼리 투어 후 푸켓 거리를 찬찬히 둘러보며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도 먹고 수다를 떨며 여유로운 오후를 보냈다.
다음날, 말레이시아 랑카위에 정박한 우리는 오전 9시가 되기 전부터 갱웨이를 벗어나 빠른 걸음을 했다. 크루즈 스탭 부서 친구인 말레이시안 샤우의 부름(?) 아래 모인 우리는 차를 렌트해 한적한 케다왕 비치로 향했다.
해변을 자유로이 거닐며 '음료 먼저 구매하세요'라는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한 바에서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있는 그대로 느꼈다. 좋아하는 칵테일을 한잔씩 손에 들고 기분에 따라 춤을 추고 서로의흥을 돋궜다. 이후 주변을 둘러볼 겸 조금 걸어 나온 우리는 번화가의 식당에 자리해 물놀이하느라 허기진 배를 달래느라 진땀을 뺐다. 샤우가 추천해준 캉콩은 다시 먹고 싶을 만큼 특히나 맛있었다.
이 흥겨움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는 다음날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에 정박하였다. 구명조끼의 버클을 단단히 채운 후 요트를 타고 한참 이동하여 도착한 목적지에는 새로운 세계가 펼쳐져있었다.
멀리서 보았을 땐 설마 싶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생각 이상으로 투명하고 깨끗했던 바닷물. 청정지역에 발을 들인 것에 대한 죄책감이 느껴졌을 정도였다. 이날 데이 오프였던 나는 시간 걱정 없이 자유롭게 맥주를 마시며 이곳 만이 가진 특유의 분위기에 흠뻑 취했다.
그 후로 다이아몬드 프린세스는 베트남의 어느 포트를 기항했지만 나는 IPM(In Port Maning; 당직)이었던지라 체력 비축을 위해 캐빈에서 원 없이 휴식을 취했다. 그렇게 이틀 뒤 우리는 태국 파타야에 도착하였는데, 이날은 단순한 관광의 개념이 아닌 카지노 부서 팀빌딩의 목적으로 다 함께 자리를 이동하여 모두들 한껏 들뜬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버스를 타고서 사전에 예약해둔 리조트를 방문하였다. 크루즈에서는 안전과 관련하여 선내에 항시 대기해야 하는 인원이 있어야 하기에 거의 모든 멤버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일은 매우 이례적이다. 흔치 않은 기회를 제공해준 매니지먼트 측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며 이 순간을 마음껏 즐기기로 했다. 매니저와 슈퍼바이저 가를 것 없이 다 함께 어울려 사진 찍고 물놀이를 하고 점심도 먹으며 단합할 수 있어 뜻깊었던 시간들.
마침내 올 것이 왔다. 드라이닥 시작 전 마지막으로 기항하게 된 포트, 캄보디아. 처음에는 어느 세월에 싱가포르에 도착해 드라이닥을 진행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그동안 동남아시아의 여러 포트를 기항하며 생겨난 잊지 못한 추억들 때문인지 어쩐지 시원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상상 이상으로 관광객이 정말 많았던 시아누크빌. 시원한 음료와 달달한 군것질거리를 양손 가득 들고 거리를 거닐었다. 저렴한 과일과 거부감 없는 맛있는 음식, 편리한 교통수단인 뚝뚝은 캄보디아의 매력에 푹 빠지게 해 주었다.
12월 14일부터 1월 18일까지, 동남아시아의 주요 포트들을 경험할 수 있게 되어 빈틈없이 즐거웠던 순간들.
크루즈승무원이 아니라면 쉽게 누릴 수 없는 독특한 환경 그 한가운데에 있는 나는 여전히 이 공간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짧은 시간 동안 다양하고 또, 무수히 많은 경험을 할 수 있게 되어 정말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