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즈승무원을 준비하던 당시 참으로 생소하게 들리던 선박 용어 중 하나, 바로 드라이닥(dry dock)이다.
학교 다닐 적 수업시간에 교수님께서 재차 강조하셨던 단어였는데 역시 한 귀로 듣고 흘려서 그런가, 졸업 후 오랜만에 이 단어를 접하게 되었을 땐 처음 듣게 된 것 마냥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아마 여러 컨트랙을 끝마치는 그 순간까지도 내 귀를 스치지 않았던 상황도 한몫해서 그랬던 것 같다.
언젠가 교수님께서 승무원 생활을 하던 시절의 에피소드를 들려주신 적이 있다. 교수님께서는 매 컨트랙이 이상하게도 이 시즌을 피해 갔다며 한 번도 드라이닥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처음엔 그럴 수가 있을까 싶었지만 여러 번 승선을 하게 되면서 선내 흐름을 인지하다 보니 그 말씀에 절로 수긍이 갔다.
나 역시 굳이 드라이닥을 해야 하나 싶었지만 막상 드라이닥을 앞두고 분주해진 선내 상황이 알게 모르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게 아니던가. 더욱이 이미 드라이닥의 경험이 있는 친구들의 '한 번쯤은 해볼 만해'라는 발언을 두어 번 듣다보다 보니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될 거란 생각에 미묘하게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드라이닥의 시작을 앞두고 매니지먼트에서는 드라이닥 멤버를 대상으로 사전조사를 했다. 우리에게는 총 3가지 옵션이 주어졌는데 이중 반드시 하나를 선택해야 되었다.
1. 선박에 머무르며 근무를 하지 않는 대신 기본 급여 $9.1667을 수령
2. 선박에 머무르며 근무하는 조건으로 $9.1667 + $25 수령
3. 집으로 돌아가서 휴식(항공료 지불 X)
카지노 부서의 2/3 이상은 두 번째 항목을 선택했고, 그 후로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우리는 드라이닥 스케줄을 제공받았다. 스케줄은 두 가지 조로 오전-새벽 6시 45분부터 오후 1시, 오후-12시 45분부터 7시로 나뉘었다.
다른 부서 친구들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듣자 하니 그들은 하루 전날 오프를 통보받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던데 우리는 감사하게도 개개인의 오프 듀티 날짜를 스케줄에 미리 명시해주어 계획을 세우기에 매우 수월했다. 모두들 한동안은 드라이닥 스케줄만 들여다보며 언제 어디를 관광하면 좋을까 고민하며 밤을 지새우곤 하였다.
우리 카지노 부서는 'Key Runner'이라고 하는 업무를 배정받게 되었는데, 아주 단순한 업무라 타 부서 크루 멤버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키 러너는 선박을 방문해 수리, 보수 작업을 진행하는 컨트락터(=contractor; 건설/운반 등의 계약자)들이 캐빈을 수리하기 위해 닫혀있는 캐빈 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한다. 문을 열어준 후에는 그저 일이 잘 진행되고 있는지 간간히 살펴보며 문 앞에 앉아 핸드폰을 하거나 개인 시간을 보내면 된다.
매일 근무하게 되는 카지노 업장이 아닌 새로운 근무조건과 새로운 환경에서 무언가를 한다는 건 상당한 재미를 선사했다. 나는 어느새 하루빨리 드라이닥 시즌이 다가왔으면 좋겠다고 마음이 바뀌었고, 매일 밤 부푼 기대를 안고 잠자리에 들었다.
싱가폴 셈바왕에서 2주 동안 진행될 드라이닥을 코앞에 두고 오피서팀은 현재 승선해있는 전 크루 멤버들을 불러 모아 간단한 브리핑을 진행했다.
사실 하루 전날 각자의 캐빈으로 관련 안내문이 배달되었으나 이들이 일부러 시간을 내어 한 자리에 모이게 한 이유는 그 내용을 최종적으로 정리하고 중요한 대목들을 한번 더 읊으며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하자는 뜻일 테다.
마지막으로 모두들 사고 없이 안전하고 무탈하게 업무를 수행하도록 신신당부를 받은 크루 멤버들은 각 부서별 미팅을 진행하기 위해 해산했다.
매니지먼트의 지시 아래 우리는 카지노 업장 내부의 모든 테이블과 머신을 각각 비닐로 뒤덮었고, 의자들은 걸음에 방해되지 않는 한쪽 구석편에 모아 커다란 비닐로 그 공간을 봉쇄하다시피 묶었다.
슬롯머신과 카지노 테이블을 전부 교체하지는 않고 조명과 같이 수리가 필요한 일부분만 손을 본다고 하였는데, 큰 변화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새롭게 바뀐 후의 모습이 기다려지는 건 사실이었다.
마침내 드라이닥이 시작되었고 선내 곳곳에 배치된 의자, 탁자, 소파, 디스플레이 등과 같은 물품들은 차례로 커다란 비닐봉지와 천으로 덮였다.
나를 제외한 세 명의 친구들은 드라이닥 첫 날 오후 조에 배정이 되었다. 아침 일찍 일어난 나는 심심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선내를 배회해보았는데 이른 시간이었지만 벌써 많은 컨트락터들이 시끄러운 굉음을 내며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오후에 내가 근무하게 될 장소인 승객들 객실 주변 역시도 선내 바닥에 비닐이 깔려있었고 이미 여러 가지 도구들이 오고 간 흔적이 보였다.
높은 철제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갱웨이를 벗어난 우리는 수리, 보수가 진행 중인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색한 느낌이 물씬 풍겨지던 그녀의 모습. 어쩐지 푸른 바다 위를 자유로이 항해하던 아름답던 자태가 쉽사리 연상이 되질 않았다. 마치 보아서는 안 되는 그녀의 맨 얼굴을 훔쳐본 듯한 느낌이었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