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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블 May 17. 2021

도망치지 않는 것

- 어른이 되면서 배워가는 것들

“당연히 도망가고 싶었지.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

인생에 한 번 겪어야 할 일이라면 지금 헤쳐 가보자고…”    


엄마가 대답했다. 아빠가 당신을 힘들게 할 때 도망치고 싶지 않았냐는 나의 물음에.    


 

처음 엄마의 대답을 들었을 땐, 그때 우리를 버리지 않아 줘서 감사하단 생각을 했다. 난 엄마 없는 삶을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까.      



내가 고등학생 때였나. 그때쯤 부모님은  자주 다투셨는데 어느  엄마가 술에 취해 귀가했다. 그때 현관문을 열어주던 내게 엄마는 눈물이 가득  눈빛으로 내게 말씀하셨다. 너희 때문에 내가 살아,라고. 그때  어떤 표정을 지었던가.



지긋지긋한 부모님의 싸움에 질려서 그냥 이혼이라도 했으면 생각했던 때였다. 늦은 밤 건넛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에 이어폰 소리를 최대치로 올리고 제발 이 순간이 끝나기를 빌었다. 싸움으로 집 안의 어떤 물건도 깨지지 않았지만 내 마음은 매일같이 깨지고 부서지고 있었다.    


  

한참 후 또다시 엄마의 대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때 엄마가 도망치지 않고, 부딪혀보겠다고 했던 마음은 무엇일까.      



엄마는 언제나 자식을 끔찍이 생각하셨다. 난 너희들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그래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너희를 버리지 않겠다고. 그 시절 그 말에 어떤 감정도 들지 않았다. 모든 엄마가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했던 거 같기도 하다.      



커가면서 그게 아님을 알았다. 모든 부모의 마음이 같지 않음을 알았다. 내가 그 시절 엄마의 나이와 닮아가면서 나라면 그럴 수 있을까를 종종 생각했다. 금세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라면 그러지 못했을 거다. 당연하게 도망쳤을 거다. 난 지금도 자주 도망치니까.     



엄마를 떠나 이곳으로 도망쳐왔고, 회사가 힘들어 도망치기도 여러 번이었다. 또 인간관계가 힘들어 상대방에게서 도망치기도 했다. 나에겐 상대와 부딪힐 에너지가 없었다. 그냥 내가 모른 척하거나, 뒤돌아버리면 수월하게 해결되리라 생각했다. 친구들은 나를 착실한 아이로 알았지만, 난 선택적으로 착실한 아이였다. 안전한 것들에게서 안전한 삶을 꿈꿨다.      



그러다 나이가 들면서 좋아하는 것들이 생기고,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서 이것들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레 들었다. 지키려면 용감하기도, 싸우기도 해야 하는데… 혹시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용감한 마음을 만들어주는 걸까. 난 언제나 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내가 지키고 싶은 것들 앞에선 갑옷이 생긴 것처럼 용감한 마음이 삐쭉 올라왔다.     



아, 엄마도 그랬던 거구나. 엄마도 우리를 사랑하고 아껴서 지켜주고 싶었던 거구나. 엄마라는 존재가 나의 튼튼한 성이었구나. 단 한 번도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의 나는 마흔 살이 되면 세상과 미련 없이 이별하리라 생각했다. 어린 내가 보는 어른들의 세상은 힘들게만 보였고,  왼쪽  번째 손가락에 있는 작은 점은 숫자 40 아보였다. 20살이 되면 어른이 된다고 생각했던 나는  후로 20년쯤  산다면 충분히  세상을 경험했으리라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얼굴에 화르르 열이 오를 만큼 부끄러운 생각이지만 그때 나는 무척이나 진지한 꼬마였다.    


  

이제 나는 점점 그 나이와 가까워져 간다. 당연하게도 지금의 나이가 되어서야 깨닫는 것들이 많다. 그리고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것을 깨닫게 될지 궁금해진다. 부디 엄마의 마음을 반쯤이라도 깨달을 만큼 살기를 바란다.     



 시절 힘들게 보이던 어른들의 세상은 보이던 것만이 전부가 아님을. 그리고 좋아하는 것들이 생기면 도망치지 않아도  만큼 용감해지기도 한다는 것을. 나는 날마다 배우며 살아간다.





- 사진출처 / 언스플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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