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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윤 Nov 12. 2019

그렇습니까? 휴먼입니다

도서 <인간의 흑역사>


영국 언론인 톰 필립스가 쓴 저서 『인간의 흑역사』는 ‘실패의 역사’를 담고 있다. 원제는 ‘Humans: A Brief History of How We F*cked It All Up’ 제목에서 드러나다시피 한 마디로 인간이 말아먹은 것들의 역사다. 아니, 근데 첫 장은 나름 ‘힐링 에세이’류 같이 써놨다. “진짜 큰 바보짓을 저질러본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이 얼마나 따뜻한 문장이란 말인가. 문제는 다음부터다. 그래놓고 300페이지 가까이 서술하는 건 학습력 없고, 마음대로 생각하고, 까먹고, 오해하고, 그래서 끝내 실패하고 나중엔 후회하는 인간의 이야기다. “도대체 왜 그랬던 걸까?”라고 물으면, 이런 시니컬한 대답이 도착한다. 아, 새삼스럽게 무슨. 인간은 항상 그 꼴이었어. 


『인간의 흑역사』는 320만 년 전 나무에서 떨어진 유인원, 루시의 어이없는 횡사를 ‘바보짓’의 시원이라 소개한다. 우리가 올림픽 개회식마다, 애국가 영상, 혹은 글로벌 기업의 광고를 볼 때마다 되새기고 또 되새기는 멋들어진 인류와는 거리가 멀다. 저 멀리 ‘신석기 혁명’이라 불리는 농경문화의 시작부터 기발한 발명과 과학기술, 문명의 진보로 이룩한 멋진 인류의 역사!를 저자는 다르게 보길 택한다. 많이 냉소적이고 많이 날카롭게 꼬집는 건, 우리 인간 존재와 우리가 만들어온 '흑'역사다. 나와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와 책을 쓴 저자 모두를 포괄하는 종(種)이고 역사이지만, 정말 얄짤없다. 얄미운 의성어와 비꼬기 스킬에 아야, 아파해도 반박하긴 힘들 것이다.


인류의 발전사는 인간의 사고력과 창의력이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는 이유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바보같이 꼬박꼬박 사고를 치는 이유이기도 하다.  - 본문 P.13 


루시가 나무에서 떨어진 이래로(사실 ‘루시’는 발굴자들이 듣고 있던 노래에서 따온 이름일 뿐) 인류는 예술, 과학, 통신 등 화려한 업적에 필적할 만한 끔찍한 실수들을 벌여왔다. 오스틴은 사냥의 유용함을 위해 오스트레일리아에 영국산 토끼를 들여와 생태계에 혼란을 초래했다. 마오쩌둥은 곡식을 쪼아먹는 참새를 박멸하다가 메뚜기 떼의 창궐을 낳았다(이는 대기근의 주요 원인이 되기도). 세부 사항을 고려하긴커녕 처음 구상이 틀리지 않았다고 굳세게 믿었던 스코틀랜드의 다리엔 식민지 사업 추진자들, 갤런당 3센트를 더 벌기 위해 화학물질을 개발해 전 세계를 납 중독으로 고통받게 한 미즐리 등도 이 ‘바보짓’의 생생한 예시들이다. 그래서 저자의 한숨은 지당하다. “하이고” 


한 사람, 혹은 한 순간, 아니면 수많은 사람, 오래도록 준비된 순간이 행한 ‘바보짓’들은 돌이킬 수 없는 역사를 만들어왔다. 인간의 생엔 리셋 버튼이나 뒤로 가기 버튼이 없기 때문에, “어, 이게 아니네, 취소”(p.76)할 순 없는 노릇인 거다. 아무리 후회해도 다리엔 행 배가 스코틀랜드를 뜨는 순간으로 되돌릴 수 없으며, 미즐리가 남긴 유산을 지워간다고 해서 전 세계에 남은 납이 사라질 리 없다. 때론 오해였고, 오판이었고, 욕심이었고, 꿈이었고, 계획이었던 일들은 그렇게 지울 수 없는 ‘흑역사’를 만들어왔다. 잠 안 오는 날, 문득문득 찾아와 이불을 뻥뻥 차게 하는 우리 일상의 ‘흑역사’보다 훨씬 더 크고 어마무시한 실패들을. 


과거의 일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역사가의 일이 아니다. 역사가는 역사를 밝혀내고, 서술하고, 전후 맥락에 비추어 고찰할 뿐이다. 옛날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파악해 설명하고, 권력과 갈등이 뒤얽히면서 오늘날의 세상이 만들어진 과정을 더듬는다. 모두 선악의 판단을 내리지 않고서도 할 수 있는 일들이다. 사실 역사란 골치가 지끈거릴 정도로 복잡하니, 과거를 재단한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과거를 재단하는 게 바로 이 책이 하는 일이다. - 본문 P.161


어쩌면 이 책의 모든 사례는 “그때 알았더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들”의 총체다. 다시 말해, 그 모든 선택들이 결과로서 발휘된 현재에 이 책의 좌표가 있다는 뜻이다. 『인간의 흑역사』는 서술대로 현재의 시선에서 “과거를 재단”하는 일을 한다. 그땐 시대적 배경 때문에, 정치사회적 맥락이 그랬기 때문에, 생명과학에 무지했어서라고 부연해주는 것이 통상적이지만, 모든 걸 다 따져보고 나서도 저자는 “그거 다 ‘바보짓’이었어”라고 대담히 서술한다.   


한편 그런 맥락에서 이 책과 이 책이 놓인 동시대 또한 ‘바보짓’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저자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가 벌이는 수많은 사업과 일들. 오늘 일하고, 소비하고, 먹은 것들, 그리고 과거 사람들이 한 실수를 '바보짓'이라고 평하는 이 책 역시 미래에서 보았을 땐 ‘바보짓’일 수 있다는 소리다. 그리고 우린 “이미 좀 많이 망친 것 같”(p.266)으며, 앞으로도 다양한 실패 시나리오가 준비되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인간은 높은 확률로 과거와 같은 실수를 저지를 것이며, 그날에도 과거를 돌아보며 “그때 알았더라면”이라고 후회하지 않을까. 


하지만 저자는 최소한의 희망을 잃지 않는다. 마지막 문장엔 이 실패의 역사를 배우고, 또 반면교사 삼으면 앞으로 펼쳐질 시간은 ‘흑역사’가 되지 않을 것이란 기대가 담겨 있다. 비록 아주 작은 기대이고 짧은 서술이지만. 루시라 이름 붙여진 유인원은 나무에 올라갔다가 떨어지는 실수를 범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수많은 루시의 후예들은 실수를 저질렀고 참혹히 실패해왔다. 그것은 자신, 옆 사람, 공동체의 사람들, 인류 전체, 생태계 전반을 위협할 만한 실패들이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기대를 건다. “어쩌면 언젠가는 우리가 나무에 올라가 떨어지지 않는 날이 올 것이다(p.270).”라고. 여러 인지적 오류와 탐욕, 이기심 등이 지금도 매일 같이 작용하지만,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래, 어쩌면. 정말, 어쩌면.  



▶두 줄 평◀
'흑역사'의 역사를 망라, 
시니컬한 자기객관화를 보는 재미도  



 


인간의 흑역사


원  제: Humans

저  자: 톰 필립스 | 옮긴이 홍한결

펴낸곳: 윌북

발행일: 2019년 10월 10일

면  수: 276면









※이 글은 아트인사이트에 게재한 글임을 밝힙니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44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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