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는 해와 달을 내세워 때 묻지 않은 깨달음이란 것의 허구를 들추어낸다.
해는 빛을 발하는 동시에 열을 내어 세상을 밝히고 생명을 일으킨다. 또 광활한 우주 공간에서 주변 별들을 일정한 거리에서 잡아주기까지 한다. 해는 이렇듯 생산적 존재로서 세상의 모든 생성과 소멸을 주관한다. 그 점에서 해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인식의 원천이다. 인간의 인식에서 이 해와 같은 것이 역동적 삶의 주체인 신체이다.
달은 반대로 빛은 말할 것도 없고 열도 생산하지 못한다. 끌어주는 해가 없다면 궤도에서 이탈해 우주를 방황할 것이다. 해가 있어 그 빛을 되비쳐주고 일정 궤도를 선회하면서 가까스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뿐이다. 그런 달이 무엇을 창조할 것이며, 어떻게 존재의 근원이 되고 인식의 원천이 될 수 있는가. 인간의 인식에서 그런 달과 같은 것이 정신이다.
달은 불임의 수도사와 같다. 때때로 배를 한껏 부풀려 마치 절대 진리를 잉태하기라도 한 듯 사람들을 속인다. 달이 진리랍시고 내놓은 것을 보면 태양이 산출한 역동적 진리의 잔상일 뿐이다. 그런데도 그 속임수에 현혹되어 절대 진리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해를 등진 채 달에게 빛과 열을 구하는 꼴이며, 살아 움직이는 것을 탐구한다면서 정작 아무 생명도 없는 그림자를 추구하는 꼴이다.
순수인식이란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정신을 내세워 신체를 경멸하면서도 그 오장육부를 설득하지 못한다. 절대 진리에 대한 순수인식이니 뭐니 하면서도 신체가 주는 특수하며 주관적인 즐거움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신체적 즐거움을 찾아 당당하게 세상에 발을 들여놓지도 못한다. 신체의 세계로 들어가지도 등을 돌리지도 못한 채 반쯤 열린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다. 이것이 절대에 대한 때묻지 않은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자들의 어정쩡한 모습이다.
관조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사고와 욕망 등에서 벗어난 경지에서, 달이 그러하듯 저만치 떨어져 눈길로만 대지의 아름다움을 더듬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울이 되어 사물을 되비추어주는 것으로 만족하겠다는 것이다.
자기중심적인 사고와 욕망 등의 의지에서 벗어난 순수한 관조는 쇼펜하우어 철학의 핵심이다. 온갖 번뇌를 일으키는 의지에서 벗어나 사물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
젊은 시절 쇼펜하우어 철학에 심취했던 니체도 그 같은 관조에 매료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멀리서 본 데다 저들이 쓴 그럴싸한 탈에 가려 그 뒤에 똬리를 틀고 있는 맴들을 보지 못한 탓이다. 그래서 겁도 없이 저들에게 다가갔던 것인데, 마침 그때 날이 밝아왔다. 곧 해가 솟아오를 것이다. 날이 밝아오자 정체가 드러난 달이 그 당당한 기세를 잃고 아침놀 앞에 창백해 있는 것이 아닌가. 순수인식에 대한 이상이 빛을 잃어버린 것이다. 달의 정사는 이렇게 허망하게 끝났다.
이제 달에 대한 환상, 때 묻지 않은 깨달음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 생식과 창조의 기쁨을 누리는 우리 자신의 주체적인 태양을 맞이해야 한다. 신체를 인식의 근원으로 삼아 모든 것이 관점에 따라 상대적이며 주관적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절대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때묻지 않은 깨달음이란 것에 대하여' 단락에서 정리
결론적으로 물리학에서는 이 지구의 모든 생명체를 키워낸 것이 태양이라고 하는데요. 니체 철학은 철저하게 실증과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어요. 최근에 읽고 있는 물리학 책과 니체 사상이 정확히 맞아 떨어지더라구요. 마치 양자역학의 세계를 훤히 다 내다봤던 사람처럼요.
여하튼 태양을 우리 몸에 비유하자면 정신이 아니고 육체라는 것. 우리는 육체의 활동에 따라서 성장하고 변화해 간다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 창의적인 활동도 한다는 것입니다.
정신은 육체를 되비쳐주는 거울에 불과하다는 정도로 갈무리해 볼께요. 그러니까 순수인식이 있을 수도 없고, 절대적인 의지에 따라 세상을 등지고 다 깨달았다는 듯이 세상을 관조하려는 것도 비겁하다 뭐 그런 뜻이 되겠지요.
아무리 깨달았다는 사람들도 신체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밥 먹고 똥싸고 오줌누고 다 하잖아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