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과 종교, 사상의 줄다리기는 끝나가는가
홍수전과 마디가 실패한 곳에서 마르크스와 레닌이 성공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회주의적 인본주의가 이슬람교나 그리스도교 신학보다 철학적으로 더 정교했기 때문은 아니다. 그보다는 마르크스와 레닌이 고대 문헌과 환몽을 조사하는 일보다 당대의 기술적, 경제적 현실들을 이해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쏟았기 때문이다. 증기기관, 철도, 전신, 전기는 전례 없는 기회뿐 아니라 전대미문의 문제들을 만들어냈다. 도시 프롤레타리아라는 새로운 계급의 경험, 필요, 희망은 성경시대 농부들의 그것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이러한 필요와 희망에 답하기 위해 마르크스와 레닌은 증기기관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탄광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철도가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전기가 정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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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저자는 종교들의 영향력이 과거에 비해 실질적인 힘이 사라지고 있는 이유를 과거의 시대에 머물기 때문이라고 한다. 수렵과 농경사회를 기반으로 했던 신들은 더 이상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현시대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질문에 답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럼에도 영향력은 크겠지만 입지는 이전 같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한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동의를 하지만 의문점이 들기도 한다. 이 책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역사적인 관점에서, 거시적인 관점에서만 봤을 때 인간이 이룩해 온 기술의 발전과 정복, 개발을 바라봤기에 기술과 과학이 신의 영역을 감당해 낼 것이라고 바라보지 않았을까.
얼마 전 영화 '그래비티'를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중 한 가지는 인간의 지식과 자본의 엄청난 양과 질을 집약해 만들어낸 결과물들이 우주에 나갔을 때, 자연 속에서 밝혀낸 사실은 아직도 바다의 모래알 같고 견고하지 않다는 점이다. 영화에서 닥터 스톤(산드라 블록)이 짧은 탄식과 함께 "I hate space."란 문장을 내뱉을 때 자연 앞에서 한 없이 작고 연약한 인간으로서 답답한 진심이 느껴졌고 나 또한 영화를 보는 내내 무중력 속에 무기력하게 허우적대는 느낌이었다.
나는 비록 알고리즘을 연구하거나 하물며 오픈소스에 기여해본 적도 없는 초보 개발자이지만 어떤 서비스를 구현하면서 공학자, 과학자로서 연구를 하거나 기술을 구현을 하면 할수록 인간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기대감보다는 자연의 무한함과 광대함에 겸손해지는 것이 더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한편, 인간은 죽음 앞에서 아무도 정답을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에 절대 도달하지 못하는 곳에서 기인한 상상력은 극단적인 상황이 올 때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기후의 변화가 먼 미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판도라의 상자를 열기 시작한 이 시대에서 인간의 결정에 대한 자연의 대답을 경험할 때 그 변주들을 기술이 충분히 커버해낼 수 있을까? 살아남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분명 혼돈의 시대는 올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공산주의가, 사람에게 순식간에 매력을 얻을 수 있었던 건 사람들이 죽음 이외에 더 이상 고통을 피할 수 없겠다는 결론에 도달했을 때였다. 이런 종교와 사상이 대 혼돈의 시대에서 기술을 앞질러 이성적인 판단을 뒤엎지 못할 거란 장담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