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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한 빌리지 Nov 09. 2019

숲을 보는 사람이 과학하는 삶

63. 호프 자런 <랩걸>

느빌의 책장을 개편했습니다! (도대체 몇 번째 개편...)


한 편의 영화와 한 권의 책에 대해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드리기 위해, 한 달에 책 1권과 영화 1편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했습니다. 10월의 주제는 자연이며 대상 도서와 영화는 호프 자런의 에세이 『랩걸』(2017)과 맷 로스 감독의 <캡틴 판타스틱〉(2016)입니다. 지금이 10월이 아닌 것 같은 건 기분 탓입니다.

랩(실험실); 정말 개인적이면서 정말 보편적인 과학자의 삶에 대하여


1) 랩에서의 삶


랩(실험실)을 상상했을 때, 실제로 거기에 발걸음을 들이기 전에 내가 생각했던 것들은 이랬다. 최고는 아니더라도 최첨단이라 불리는 기계들이 있고, 학문하는 사람으로서 자기 분야에서의 앎, 깨달음이란 순수한 기쁨을 성취하며 늙어가는 공간이라는 느낌. 틀린 이야기는 아닐지도, 그 이전에 맞닥뜨리는 수많은 일에 대해 하나도 몰랐던 것이다. <랩걸>에서는 랩-혹은 연구자들이-이 추구하는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 맥락을 쌓으며 겪는 일들 하나하나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저자 호프 자런이 탄소 동위원소 분석을 통해 화석 삼림에 대해 밝혀낸 사실, 이제 널리 받아들여지는 교과서 속 배경 설명이 된 수십 편의 연구 저널 속의 발표 결과라는 그 진보는 온전히 자런과 그 연구자들의 것이다. 외부 사람들에게는, 심지어 같은 과의 다른 랩실 사람들에게도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쉽게 설명하기도, 농담하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실험이 진행되지 않으며 얻는 깨달음, 방위 산업에 심각하게 치우친 예산 편성과 보수적인 아카데미아에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 의식주를 해결하기 힘들 정도인 재정적인 압박, 주 60시간/80시간 이상 근무하며 연구가 삶이 되고 인생에서 바닥을 찍고 올라가는 경험 등은 자연과학계 랩에서 공유하는 보편적인 일로서 아는 사람들에겐 공감이 되고, 몰랐던 사람들에게는 과학자의 삶을 엿보게 해주는 대목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으며, 무에서 유를 찾아가는 단서를 찾아야 하고, 나의 실수와 접근 방향을 자책하고... 어느덧 저자가 독립적인 연구자로서 척척 가설을 세우고 대상을 정해 표본을 채취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모습을 보며 나 또한 함께 성장한 듯한 만족감을 느꼈다.


식물이 인간 사회에 가지는 의미는 세 가지뿐이기 때문이다. 식량, 의약품, 목재. 이 세가지 중 어느 것도 사막에서는 얻을 수가 없다. 그래서 사막 식물을 연구하는 과학자는 정말 흔치 않고, 그렇게 하는 과학자는 종국에 가서는 자기 분야의 비참함에 이골이 나고 만다. p203
좋은 소식은 이런 기계는 한 번만 만들면 된다는 사실이다. 이런 물건으로 집에서 체중을 잰다든지 정부 기관에서 편지 무게를 재겠다고 우리에게 제작 요청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계는 미워도 되고, 엉뚱해도 되고, 쓰기 불편해도 되고, 비효율적이어도 된다. 그냥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기계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과학 연구를 위한 기구들은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다. p267
five green plants @chuttersnap


2) 인간 관계와 우리의 열망


저자 호프 자런과 그의 영혼의 파트너 빌의 관계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대학원에 진학해 석사-박사 과정을 이수하고, 박사 후 과정을 거쳐 교수가 되기까지는 보통 10년 이상이 걸린다. 그리고 학위가 올라갈수록 연구 분야는 세분화되고, 그 과정을 지나다보면 좁은 사회에 놓이게 된다. 그런데 가족은 아니면서 오랜 기간 좁은 사회에서 함께 지낸 인간관계는 흔치 않을뿐더러, (그들만이 공유하는) 끈질기게 목표와 추구하는 태도와 학문적 열망에서 느끼는 좌절감은 그 관계를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외부 사람들에겐 설명하기 어렵고, 설명하려 했다가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오해만 불러일으키니 과학자, 연구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고립되는 게 아닐까.


빌과 나는 더 권위 있는 동료 과학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법을 가지고 작업을 했다. 나는 기가 막히게 멋진 각각의 화석보다 놀랄 만큼 오래, 안정적으로 유지됐던 숲 전체에 천착하고 있었다. 이 숲은 번갯불에 콩 볶듯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진 생태계가 아니었다. 이 형태의 생태계는 수백만 년 동안 존재했었다. (...) 도대체 어떻게 이 생태계는 지속되었을까? 이제는 땅속 영양분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정도 되는 액체 상태의 담수도 극지방에 존재하지 않는다. p281


3) 식물 이야기


나는 옥수수가 조직 1그램을 만드는 데 물이 1리터가 들어간다는 것을 기억했다. 옥수수는 공기를 당으로 만들고 당을 이파리로 만드는 생화학적 장치를 식히기 위해 물을 땀처럼 배출한다. 미시시피 강변의 계절이 바뀌는 과정에서 봄에 잎 만들기를 끝낸 낙엽수들은 이제 성장을 멈췄을 것이다. 나무들이 땀을 덜 흘리는 것은 식물들이 자라는 시기가 끝났고, 시스템이 평형 상태에 도달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맞다, 여름이 깊어지면서 남쪽 지방은 점점 더 더워졌지만 나무들은 이미 겨울 준비를 시작했던 것이다. 그에 따라 성장 속도는 느려지고, 따라서 땀도 덜 흘리기 시작했다. 이 나무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온도에 따라 수동적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온도는 그들 세상의 일부에 불과했고, 그들의 세상은 이파리를 만드는 목적에 집중하고 있었다... p215


『랩걸』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저자의 삶과 교차하며 전개되는 식물 이야기이다. 앞서 발췌한 구절에 나온 미시시피 프로젝트 외에도 스스로 뿌리를 절단하거나 주름이 모두 접혀 닫힐 때까지 몸을 수축하고, 죽은 척까지 하며 사막에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한 약 100종의 부활초가 있으며, 경화 과정을 거쳐-세포 안에 순수한 물은 흘러나오고 당, 단백질, 산이 농축된 화학물질이 부동액으로 작용하여 영하의 온도에서도 시럽 같은 액체 상태를 유지하는- 긴 겨울에 대비는 나무들이 있다. 이를 토대로 누군가는 빛의 변화(계절의 변화이기도 한, 24시간의 순환주기 중 빛이 존재하는 시간)가 나무들의 경화 과정을 촉발한다는 것을 증명했고, 저자는 급속도로 변화하는 이 세상 속에서 식물들이 항상 신뢰할 수 있는 한 가지 요소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함을 안다말하기도 한다.


각 식물들에 대한 이야기는 저마다의 깨달음을 준다. 항상 신뢰할 수 있는 요소를 찾는 것, 부수적인 것들은 평형을 이뤄놓고 목적에 집중하는 것, 우리의 입장이 아니라 나무와 식물의 입장에서 생각하자는 것... 같은 이야기에서도 누군가는 다른 깨달음을 얻을 테지만, 이와 같은 깨달음으로 과학자들은 웃고, 또 앞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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