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스리랑카] 뚝뚝 타고 스리랑카 일주, 3,375km 호튼 평원
만실인 띨리나 호텔에 대신 예약한 곳은 노트르담(Notre Dame D'Arcadia) 호텔이다. 넓은 잔디 마당이 매력적이었고, 외관도 멋지고 전망도 좋아 보였다. 조금 낡아 보이는 방은 짐을 막 풀어둘 만큼 넓었다. 후기가 별로 없어 불안했지만 누군가는 좋은 곳을 알아보기에, 그게 나이길 바랐다. 노트르담 호텔은 시내에서 멀고 외져서 위치와 접근성이 아쉬운 숙소였다. 하지만 뚝뚝 로드트립은 이런 단점을 가볍게 지웠다.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호텔에 묵을 수도 있고, 그 호텔에서 언제든 시내로 나올 수 있다. 그럴 때마다 차를 잡는 수고로움과 차비도 들지 않는다. 뚝뚝 로드트립은 시간과 비용을 엄청나게 아낄 수 있는 여행이며, 이동할 수 있는 거리만큼 선택의 폭을 넓혀준다.
노트르담 호텔에서 맞은 첫 새벽. 동트기 전에 일어난 나는 밖으로 나가 뚝뚝을 살폈다. 영상 10도지만 체감 온도는 영하 10도 같은 한기가 파고들었다. 입김도 완연한 겨울이었다. 추운 날에는 뚝뚝의 시동이 잘 걸리지 않기 때문에 출발 전에 초크 레버를 당겼다. 초크 레버는 기온이 낮을 때 연료와 공기의 혼합비를 연료 쪽으로 기울게 해 시동이 잘 걸리게 돕는 장치다. 시동이 걸린 다음에는 레버를 원래대로 눌러 둬야 한다. 초크 레버를 당긴지 10분쯤 지나서 시동을 걸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또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아침에 배운 ‘밀면서 시동 걸기’ 스킬을 처음으로 시도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뒤에서 뚝뚝을 미는 R과 B도 지쳤다. 이런 위기가 닥칠 때면 한 가지 생각만 해야 한다.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한다. 가까운 곳부터 살핀다.’
나는 조심스레 직원이 머무는 방을 노크했다. 이른 새벽의 소란에 밖으로 나온 그는 다행히 깨어있었다.
“정말 미안한데 잠깐 도와줄래요? 뚝뚝 시동이 안 걸려요. 초크 레버를 당겼는데도 말을 안 들어요. 호튼 평원에 가려던 참인데...”
역시 스리랑카 남자라면 누구나 뚝뚝과 친했다. 그는 뚝뚝에 앉아 이것저것 만지며 시동을 걸려고 애썼다.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정비소가 있는 시내는 너무 멀고, 그곳에서 정비사를 불러와 고친다고 해도 한나절은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봉고차가 나타났다. 피곤해 보이는 관광객이 우르르 내리더니 각자 방으로 흩어졌다. 단체 손님인 것 같았다. 그때 우리에게 관심을 보인 건 봉고차 운전사였다.
“뭐가 문제에요? 시동이 안 걸린다고요? 내가 한번 봐줄게요.”
“초크 레버도 당겼고, 밀면서 시도도 해봤어요.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어요. 호텔 직원도 포기했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봉고차 운전사는 뚝뚝에 올라 이것저것 만지더니 신경을 집중했다. 뚝뚝이 푸드덕거렸다. 그리고 곧 시동이 걸렸다. 그는 엑셀을 몇 번 당겨 엔진소리를 듣더니 내게 핸들을 넘겼다.
“경기도 광주 알아요? 내 친구가 한국에서 일해요. 우리 형도 한국에서 일하고 돌아왔고요. 한국은 좋은 나라예요.”
해외로 나가보면 거센 한류에도 불구하고 아직 한국이 어디에 붙은 나라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 비록 로켓맨의 예측할 수 없는 광기 때문이지만 오히려 북한을 더 알아줄 때도 있다. 하지만 스리랑카에서는 그런 걱정이 없다. 한국은 스리랑카 사람들에게는 한류보다도 더 매력적인 기회의 땅으로 여겨지니까. 그 덕분에 이런 호의를 넙죽 받을 때가 많았다.
시동이 다시 꺼질까 고맙다는 말만 전하고 서둘러 출발했다. 어느새 날은 밝아지고 있었다. 나는 시동이 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호튼 평원까지 한순간도 정차하지 않고 달리려고 애썼다. 춥고 외로운 길이었다.
새벽 일찍 일어난 이유는 호튼 평원(Horton plain)의 맑은 모습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2,100m가 넘는 호튼 평원은 이른 시간일수록 맑을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동트기 전에 출발하려고 했는데 한 시간 정도 늦어졌다. 빠르지도 늦지도 않은 엇박자 때문인지 길은 조용했다. 호튼 평원 입구에 도착해서 입장료로 1명 당 약 13,000루피를 치렀다. 경악할만한 가격이었다. 하지만 그만한 가치 있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이곳에는 세상의 끝(World`s end)이라고 불리는 트레킹 코스가 있기 때문이다. 처음 이름을 들었을 때 결코 모른 척할 수 없는 작명에 감탄했다. 수많은 후기는 이곳을 걸으며 만난 잊지 못할 순간에 대해서 말했다. 호튼 평원에 대해서 궁금증이 일었다.
호튼 평원은 1988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2010년에는 중부 고지대의 다른 보호구역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선정되었다. 사실 호튼 평원은 예전부터 남다른 곳이었다. 영국 식민지 때도 호튼 평원의 개간과 벌목을 금지하는 등 자연적, 문화적 가치를 보존하려 했다.
주차장은 택시와 여행사의 승합차가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다. 뚝뚝을 구석진 자리에 주차하고 방문자 센터로 갔다. 호튼 평원에서 1회용품 사용이나 음식물 쓰레기를 남기는 것은 철저히 금지되기 때문에 가방을 열고 소지품 검사를 받았다. 꼭 필요한 불편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본격적으로 트레킹을 시작하려는데 부슬비가 내렸다. 체온이 떨어지는 걸 막기 위해 매점에서 초콜릿을 사 먹었다.
호튼 평원 트레킹 코스는 세 개의 주요 지점이 있다. 베이커 폭포(Baker`s fall), 세상의 끝(World`s end) 그리고 작은 세상의 끝(Mine world's end)이다. 들머리와 날머리가 같은 순환형 9km 코스이며 난이도는 쉬운 편으로 여유롭게 둘러보는 데 3시간 정도 걸린다. 평소에 산책을 즐기는 기초체력만 있다면 누구나 완주할 수 있지만 미끄러운 흙길, 돌계단이 많기 때문에 반드시 운동화를 신어야 한다.
호튼 평원을 걸으며 기대하는 건 예사롭지 않은 자연과 신비로운 동식물을 만나는 것이다. 누군가는 환각이라고 느낄 정도로 많은 사슴떼를 보았다고 하고, 아주 드문 일이지만 안개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표범을 만난 사람도 있다. R은 냇가에서 수달을 보았다는 후기를 보고 기대했다. 이 밖에도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파충류나 새도 곧잘 목격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은 거대한 식물원이기도 하다. 스리랑카에만 존재하는 고유종과 멸종위기종이 서식하고 있어 다양한 생태계를 구성한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조금씩 옷에 스며들었다. 구름과 비 때문에 제대로 보이는 게 없었다. 속도를 높였다. 체온이 떨어지지 않게 신경 써야 했다. 나는 더위에 강한 만큼 추위에 약했다. 미리 준비한 핫팩을 꼼지락거렸다. 우비를 입고 다가오는 여행자가 보였다. 그들은 맑은 호튼 평원을 보았을까. 때로는 무심하게, 때로는 서로를 응원하며 지나쳤다. 30분쯤 지나자 몸이 풀리고 열이 올랐다. 그때 B가 소리쳤다.
“어, 어. 안개가 걷힌다.”
그러고 보니 비도 잦아들었다. 바람이 안개를 멀리 날렸다. 점점 초원이 넓어졌다. 갈대와 잡초가 바람결을 따라 흔들렸다. 켜켜이 쌓인 동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다렸다는 듯이 오감이 깨어났다. 발끝에 치이는 작은 돌멩이와 뒤통수를 쫓아오는 곤충, 햇볕이 비추는 능선이 그제야 느껴졌다. B에게 물었다.
“어떤 것 같아? 유럽을 자주 다닌 여행자의 소감은?”
“여긴 제주 영실코스랑 비슷해. 높이도 크게 차이나지 않고 초원의 색감이나 황량하면서도 따듯한 분위기도 닮았어. 글쎄, 트레킹 코스가 발달한 유럽과 비교한다면 특별한 곳은 아니야. 하지만 이곳 자체의 매력은 충분히 느끼고 있어.”
“맞아. 영실과 비슷하네. 그런데 영실은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곳이잖아. 우리가 그곳에 다녀와서 감동이 덜한 것뿐이야. 어쩌면 네가 유럽의 유명한 트레킹 명소를 많이 가봐서 눈높이가 높은 걸 거야. 우리보다 서양 여행자들이 이곳에 더 깊게 빠져있는 모습을 봤잖아.”
날씨가 맑아지자 걸음을 늦추거나 가만히 서서 순간을 즐기는 여행자들이 보였다. 늦게 출발한 우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전진했다.
첫 번째 지점인 베이커 폭포에 도착했다. 영국인 탐험가 사무엘 베이커(Samuel Baker)의 이름을 딴 베이커 폭포는 높이 20m로 웅장한 편은 아니었지만 폭이 넓어서 인증 사진의 배경으로 딱 좋았다. 그리고 폭포 주변에 우거진 숲은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R이 대왕 고사리를 가리키며 놀라워했다.
컨디션이 좋아졌다. 이른 아침의 당혹스러운 일은 잊고 기분 좋은 땀이 긴장을 풀었다. 걸음도 가벼웠다. 개울가를 건너 숲길을 지나 새롭게 나타난 야트막한 언덕을 반겼다. 마침내 호튼 평원 트레킹의 하이라이트인 세상의 끝에 도착했다. 세상의 끝(World`s end)이라고 적힌 커다란 바위가 보였다. 사람들은 정신 없이 이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다. 세상의 끝은 무엇일까. 호튼 평원에서 세상의 끝은 절벽이다. 무려 870m 높이의 깎아 지른 절벽이다. 저 위에서 아래를 본다면 끝이 보이기나 할까. 내게 세상의 끝이란 발끝, 몸에서 가장 먼 곳일 때가 있었다. 하지만 몸을 잊고 주변을 살피면 세상의 중심에 있음을 알게 된다. 여행은 필연적으로 고독하고, 그 순간에 발견하는 자아를 쫓아 오래 혼자 여행했다. 하지만 때로 존재는 관계로 설명된다는 걸 함께 여행하며 배운다. 발끝에 머물던 시선이 고개를 들자 파란 하늘과 지평선을 이루는 넓은 평원과 숲이 보였다. 나는 지금, 호튼 평원 속에서, 대지를 바라보며, 수많은 여행자와 함께, 존재하고 있다. 이 평범한 인식은 너무나 명징해서 삶의 진리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깨달음의 순간은 있지만 깨달은 사람은 없다는 말처럼 이 순간을 이곳 밖으로 데려갈 수는 없다.
쿵 소리와 함께 한 뚱뚱한 남자가 사라졌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남자는 세상의 끝을 보고 싶었을까. 덤불에 걸려 허둥대고 있었다. 덤불이 아니더라도 사고를 막기 위해 설치한 철조망에 걸렸을 것이다.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올라온 그는 실수였다며 오늘 자신이 가장 운 좋은 남자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가슴을 쓸어내린 사람들은 남자의 넉살이 민망할 정도로 그 말에 동의했다.
남자의 목숨을 살린 운 덕분인지 마침 세상의 끝에서 맑아진 하늘은 다시 먹구름에 밀려나기 시작했다. 마지막 지점으로 출발했다. 금세 도착한 ‘작은 세상의 끝’은 270m의 절벽, 잠시 들렀다가 걸음을 재촉했다. 빗방울이 굵어지고 있었다. 어느새 안개가 몰려와 시야를 좁혔다. 방문자 센터로 돌아왔을 때는 거센 비가 내렸다. 뚝뚝을 향해 뛰었다.
뚝뚝이 꼼짝하지 않았다. 초크 레버를 당기고 기다렸다. 그래도 뚝뚝은 잠에서 깨지 않고 빗속에 우두커니 멈춰있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날씨는 점점 더 안 좋아질 것 같았다. 뚝뚝이 잘 움직이도록 경사진 곳에서 B와 R이 힘껏 밀었다. 이제 무조건 궁극의 기술, 밀면서 시동 걸기에 성공해야 했다. 기어를 중립에 두고 뚝뚝이 움직이면서 탄력을 받는 순간 기어를 1단으로 바꾸면서 엑셀을 당겼다. 두세 번 실패했지만 마침내 시동이 걸렸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해냈다. 우리는 머리카락과 턱끝에서 빗물을 뚝뚝 흘리면서 좋아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중에 다시 시동이 꺼졌다.
이번에는 R과 B를 태운 채로 나 혼자 뚝뚝을 힘껏 밀면서 달렸다. 뚝뚝의 가속이 끝나기 전에 얼른 운전석으로 달려들었다. 제대로 앉을 새도 없이 기어와 엑셀을 조작했다. 부르릉, 시동이 걸렸다. 시트콤처럼 웃기고 슬프고 감동적인 이 순간은 영상으로 남아있다. 다시 볼 때마다 웃기고 반드시 슬펐다.
“와, 이걸 이렇게 해내네. 이번에는 진짜 위험했다. 어쨌거나 더 이상은 안 되겠어. 배터리를 교체하자. 다른 일정은 미루더라도 시내에 가자마자 정비소부터 찾아가자. 수리 비용은 보험으로 처리하면 돼. 렌트 업체 사장한테 연락해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