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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마 May 08. 2019

유실장, 그래도 쟤네는 4년제 나온 애들이야

아빠의 이력서

유실장, 그래도 쟤네는 4년제 나온 애들이야. 웬만하면 그냥 들어줘


개발팀 실장으로 있는 아빠가 디자인팀과 부딪힐 때마다 사장님이 아빠에게 하는 말. 아직 실무 경험이 부족한 사원이 어설픈 제안을 해도 아빠는 학력으로 몰아붙일 땐 주눅이 들어 더 이상 대꾸를 못한다고 했다.




정년퇴직을 앞둔 아빠는 요즘 회사 생활이 힘들다고 했다. 옆 부서가 정리해고 되고 회사 분위기가 싱숭생숭한 탓에 아빠 역시 불안감을 안고 회사를 다니고 있다. 그래서일까, 제 발로 걸어 나가 주기를 바라는 듯 사장의 도발적인 무시가 잦아졌다. 그런 날이면 아빤 꼭 소주 한잔을 하고 나서도 밤잠을 뒤척였다.


그런 얘기 들을 때마다 진짜 가슴이 미어지고 성질이 나는데.. 또 너네 생각하면 참아야지 참아야지 한다.


이러던 중 아빠가 얼마 전 S대학에 뜬 경비원 모집 공고에 지원서를 내보고 싶다고 했다. 지금보다 월급은 적지만 지금 같은 스트레스는 없을 것 같다며 조심스럽게 가족들에게 운을 뗐다. 가족 눈치를 보는 듯한 아빠가 안쓰러워 일부러 더 아무렇지 않은 듯 가볍게 대답해드렸다. "응, 아빠. 지원해보자. 안되면 말고, 되면 그때 다시 생각해보지 뭐"


그렇게 며칠 동안 퇴근 후 혼자 방에서 끙끙 고민하며 아빠는 자기소개서를 작성했다. 첨삭을 해주겠다며 받아 든 아빠의 글

본인은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가정 형편상 일찍 사회생활을 하였고,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이었기에 (중략) 그럼에도 열심히 노력하여 A사 재직 시절,  개근 및 우수사원으로 선정돼 일본 연수과정을 다녀와 이 업계에서는 나름 인정받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중략)
IMF 때는 실직하여 직업 전환을 해보려고 각종 자격증을 취득하였으나 학력 문제로 인해 다시 이 업계로 돌아와 더욱 일에 매진하였습니다.


일본 연수 과정

당신이 자부하는 자랑이자 일하면서 얻었던 가장 큰 업적. 1989년은 대한민국 국민이 자유로이 외국으로 나갈 수 있게 된 첫해다. 고로 1990년대 초에 이런 업적을 지녔다는 것은 인정할만한 자랑거리다. 그럼에도 아빠는 그 회사에 오래 다니지 못했다. 그 이후엔 초졸밖에 되지 않는 아빠의 학벌이 늘 걸림돌이 됐기 때문이다.


못배운 한이 크다며 소주 한잔 기울이던 모습, 자격증에 열을 올리던 모습, 검정고시 준비를 위해 해가 뜨기 전 나갔던 아빠의 뒷모습. 그때는 어려서 그 의미를 몰랐다. 길지 않은 짧은 글임에도 잊고 있던 어린 시절 내 기억 속 젊은 아빠의 모습들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졌다.




아빠가 유난히 '학력' 얘기에 작아질 때면 애잔한 마음이 든다. 아빠에게 학벌은 지금 내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짐작해볼 수 있었다. 가방 끈이 짧다고 지혜가 부족한 것은 아니다. 아빠는 나에게 믿고 따를 수 있는 좋은 아버지이자 배울 게 많은 어른이다. 그런 아빠가 이제는 사회에서 밀려 움츠러들 때면 충분히 잘해왔노라고 박수를 쳐드리고 싶다.


결코 그대의 노력이 가볍지 않았음을, 이뤄놓으신 성과 덕에 딸은 편하게 공부해 당신의 평생의 한인  ‘4년제 대학’까지 당당히 마칠 수 있었음을. 아빠의 학력 콤플렉스는 유난히 힘들었던 가정 형편 속에서도 자식에 대한 교육열을 사그라들지 못하게 하신 것 같다.


오늘은 어버이날이다. 까칠한 딸이지만 오늘 만큼이라도 꼭 사랑 고백을 해드려야지.

감사합니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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