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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N Nov 08. 2019

프로듀스 48, 또 다시 반증된 선발과 재배치의 신화

갈등론적 시각에서 바라본 평가만능론의 허위성, 후원적 이동과 지위경쟁이론

슈퍼스타K로 시작되었던, 정말 길고도 길었던 오디션 프로그램의 수명이 이제서야 끝을 향해가는 것 같다. <퀸덤>(Mnet)이나 <사인히어>(Signhere, MBN)와 같은 변조된 방식의 서바이벌은 그나마 나름의 정체성을 획득했으나, <쇼미더머니 8>(Mnet)의 경우 몇몇의 신선한 인물들을 제외하고는 시청자의 반응을 크게 끌어내지 못했으며, 최종 우승자를 이긴 사람이 본선도 가보지 못한채 떨어지는 기괴한 주먹구구식 경연 진행방식 역시 많은 비판을 받았다. <프로듀스 101 시즌4>(Mnet)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단순히 프로그램의 짜임새 수준이 아닌, 프로그램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도덕률의 측면에서 지켜져야 하는 것들이 진작에 무너져있었음이 폭로되었기 때문이다. 해당 프로그램뿐 아니라 이전 시즌인 <프로듀스 48>(Mnet) 역시 선발인원이 조작되었음이 확정되었으며, <아이돌학교>(Mnet)를 비롯한 이전의 수많은 프로그램 역시 이러한 의혹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나 역시도 작년에는 열렬한 <프로듀스 48>의 시청자였다. 당시에(도) 중등교사 임용시험을 준비하던 나의 시선에서, 몇 안되는 자리를 붙잡으려 매주 비정상적으로 많은 요구를 이루어내려 노력하고, 그 경연 속에서 함께 살아남은 동료들과 함께 환호하고, 떨어진 친구들을 울며 위로하면서 점차 서로 공감대를 형성해가는 그들의 모습이 나와 조금은 겹쳐보였다.

마침 그 당시에(도) 사회적으로는 수많은 기업들의 채용비리와 입시비리들이 밝혀지던 시기였기에, 내심 내가 응원하는 그 아이돌만큼은 인기투표라는 그 잔인하고도 날것 그대로인 경쟁 속에서 당당하게 살아남아서, 하고 싶은 음악적 역량들을 뽐내고 살기를 바랐다. 그리고 열심히 살아가는 그런 모습을 나 스스로도 닮아가기를, 그렇게 나 역시 이 공정한 시험 속에서 살아남기를 꿈꾸었다.


교육학 분야 중 하나인 교육사회학에서는 이런 것을 다룬다.


기능론적 사회학자인 뒤르켐은, 이 사회가 하나의 생물학적 유기체이며, 시험은 개인의 적성과 능력을 판별함으로써, 각종 사회적 위치에 그에 맞는 적절한 사람을 선발하여 재배치하는 기능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능이론의 기초 주장은, 수많은 갈등론적 사회학자들의 반박의 대상이 되었다. 시험의 선발과 재배치 신화는 허구이며, 시험은 지배집단의 권력을 정당화하여 다시금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재생산하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갈등론적 사회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첫째, 사회의 계층이동은 경쟁적 이동의 탈을 쓰고 있으나 사실상 후원적 이동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공정한 경쟁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으나, 이는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며, 실제 경쟁에 사용되는 컨텐츠는 상위계층의 입맛(아비투스)에 맞게 조정되어 그들에게 유리하게 설계되어 있다. 즉, 개인의 성취를 결정짓는 것은 개인의 역량이 아닌 사회경제적 배경이다.

둘째, 이중노동시장 이론이다.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선택할 수 있는 듯 보이는 노동시장은 사실은 안정적이고 임금이 높으며 승진사다리가 보장되어 있는 1차 시장과 불안정하고 임금이 낮으며 승진 기회가 부족2차 시장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이 두 시장 사이가 사실상 거의 단절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각 시장에 속한 사람들이 자녀를 기르게 되었을 때에도, 각 자녀들이 받는 교육은 특정 시장에 적합한 방식으로 제한되어 시장의 분절이 유지된다.)


기능론과 갈등론 중 어느 입장을 완벽히 맹신할 수는 없겠으나, 주변의 삶과 연이은 뉴스를 살펴보면 이러한 갈등론적 측면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후원적 이동의 생태는 이미 우리의 삶 속에서 충분히 체험되고 있으며, 나아질 기미는 커녕 심화되고 있다. 어쩌면 이러한 현실로부터의 도피욕구가 그 길었던 오디션 프로그램의 흥행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노래를 좋아하는 평범한 시골아이가, 수리노동자가 그 실력 하나로 방송에 멋지게 등장하여 공정하게 성공하는 모습, 이러한 언더독의 반란을 마주할 때, 우리는 희열을 느꼈으니까. 그러나 이번 사태로 인해, 공식적으로 ‘공정한 경쟁’에 따른 선발과 재배치의 신화는, 우리의 체험 속에서 부정되는 것을 넘어서서, 그 피난처인 정신적 대리만족감의 영역에서도 다시금 부정되었다. 방송과 세상의 판도를 바꾸는 것은 노력이나 재능이나 열정이 아닌, 기획사의 자본이나 성접대 따위에 지나지 않았으며(후원적 이동), 참가자와 그 팬들의 열망은 보기 좋게 포장되어 내정자의 장신구로써만 이용되었다(이중노동시장).


그리고 이는 자명하게 고작 한명의 PD에 의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전의 수많은 프로그램의 전수조사는 물론, 배후의 관계자들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통해, 진상을 밝혀내고 재발을 방지해야 하겠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포맷 자체의 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허울 좋은 얘기지만 예술에는 우열이 없다. 콜린스의 지위경쟁이론에 따르면, 학생들이 자신의 역량 상의 필요 이상으로 과잉학력을 취득하고자 하는 것은, 이미 학력 자체가 지위를 획득하기 위한 수단(필요조건)으로 전락해버렸기 때문이다. 오디션 프로그램 역시 마찬가지다. 그토록 오디션에 참가하고자 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는, 오디션을 통해 역량의 발전이나 새로운 경험을 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저 프로그램 우승자라는 닉네임과 프로그램 출연 자체를 통한 인지도를 획득하기 위해서다. 말하자면 인지도경쟁이론이다. 우리는 수많은 경쟁자들의 역량을 부등호로 나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사실은 알고 있으며, 개인 취향에 따라 나열된 대소관계와 실제 방송에서의 성취가 정비례하지는 않는다는 것도 안다. 오디션 프로그램은 수많은 잠재력을 지닌 참가자들이 설 자리를 준다는 점에서는 유의미하지만, 사실상 그들의 무대를 애매한 잣대를 통해 가지치기하는 일은 제비뽑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퀸덤>(Mnet)에서 보여진 대안적 가능성은 ‘연대와 안정’이다. 표면상 서바이벌 시스템으로 탈락 제도는 있었으나 실제 탈락자는 없었고, 출연자들은 다른 참가자를 이기고자 기를 쓴다기보다는, 자신들의 다양한 무대를 보여주는 데에 집중했고 타 참가자의 무대를 존중하며 배우고자 했다. 그로 인해 기존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무대를 많이 꾸려나갈 수 있었고 방송사와 출연자 모두가 상생할 수 있었다. 서서히 프로그램 속에서 경쟁의 바람을 지워나가고 참가자의 잠재성을 발현할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물론 이는 쉽지 않은 일일 것이고 결국엔 이상적인 몽상에 그칠 것임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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