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도 스터디 내일도 스터디(내일 일단 끝난다. 잠깐만 쉬고 다시 준비할 수 있기를 기도해야겠지만)인지라 올해는 크리스마스에 아무런 계획도 두지 않았다. 듣는 사람들에게는 의외일 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혼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것이 올해가 처음이다. 작년 크리스마스에는 후배의 크리스마스 기타 콘서트를 덕질하러 갔었고(올해에도 깜짝 기타연주 영상을 받았다. 감동이야.) 그 작년에는 (지금이랑은 다른 시국이어서..) 교토 시내에서 케이크를 사서 먹었다. 그 전에는 군인이었으니 '크리스마스 두 번을 군바리로 보내다니' 하며 생활관에서 한탄하거나 휴가 나가서 술을 진탕먹거나 했을 것이고, 그 전에야 뭐 부모님과 성탄예배를 가거나 친구랑 술마시거나 엄마아빠랑 맛있는거 먹거나 했겠지.
원래는 집앞 가까운 교회에 놀러가서 성탄예배나 구경하려는 계획이 있었으나, 알람을 취소해놓은 탓에 11시 50분에 일어나게 되어 자연스럽게 무산되었다. 이에 따라 대안으로서 오늘 새로 개봉하는 영화인 <와일드 라이프>를 예매했으나, 이불 속에서 인간이 가장 쉽게 일으킬 수 있는 기적인 밍기적대기를 계속하다보니 시간이 애매해져서 예매를 취소하였고, 그래도 아무것도 안하긴 뭐해서 다른 영화를 찾다가 조금 뒷 시간의 <파비안느에 대한 진실>을 예매했다가, 같은 알고리즘에 의해 또 취소하고 또 <나이브스 아웃>을 예매했다가 취소하고 하다보니 3시가 넘었더라.
이대로 있다간 그대로 하루가 끝나겠다 싶어 밖에 나갔다. GS25에서 컵우유케이크(2500원. 맛있더라.)와 화끈라면(카카오 콜라보. 어묵이 라이언얼굴이라 죄책감을 일으킨다.)을 사먹으며 크리스마스 먹거리는 때웠고, 그냥 머리나 자르고 목욕이나 하자 싶어서 사우나로 향했다. 가는 길에 보이는 아무 미용실이나 들러서 자르려고 했는데, 쉬는 날이라 싼 집은 다 닫고 커트에 3만원 하는 좀 있어보이는 집들만 열었더라. 아쉬운대로 그냥 사우나에 갔다가 첨부사진의 팻말을 봤다. 오케이 컷트 만원. 빠르게 결심하고 이발소로 들어갔다. 이발소 내부에는 롯데에서 나온 오래되어 보이는 카세트테이프가 있었고 (롯데가 전자제품도 만들었었나?), 조관우의 겨울 이야기, 포지션의 I Love You, 투투의 일과 이분의 일, 터보의 검은 고양이 네로 같은 노래들이 흘러나왔다. 15~20년 정도 과거로 돌아간 느낌을 잠시 받고 있다 보니 머리를 자를 차례가 돌아왔다.
어떻게 자를거냐는 물음에, 투블럭이라고 하기는 좀 그래서 '앞머리는 눈썹 정도로 잘라주시고...양 옆에는 밀어주세요.'라 했더니 '...기계로요?'라는 물음이 되돌아왔다. 그렇다고 했더니 '미장원에서 오셨구만...'하시며 가위를 드셨다. (미장원?) 보통 자르기 전에 머리에 물을 뿌리던데 여기는 왜인지 페브리즈(Man)을 뿌리셨다.(진짜 페브리즈인지 통만 그건지는 모르겠으나) 그리고 가위질을 몇번 하시고 잘린 머리를 입김으로 털어내시는 작업을 반복하셨다. 원래 미용실에서도 입김으로 털어냈었나 생각하던 중, 아저씨가 나이를 물으셨다.
스물 여섯이라 답하니, '한창 놀 나이네요'하시며, 이발소가 미장원에 비해 우수한 점을 이야기하시기 시작하셨다. 미장원은 기계로 대충 밀어버리기 때문에 이렇게 섬세한 머리가 나올 수가 없으며, 사람의 인상을 보고 가장 적절한 헤어스타일을 이렇게 딱 가위로 머리카락 하나 하나 신경쓰며 잘라내는 일을 할 수 없다고 하셨다. 저는 어떤 스타일이 어울릴까요 물으니 아직 젊어서 피부가 반들반들하기 때문에 지금은 미장원에서 아무렇게나 잘라준 머리도 그나마 어울리는 거라고 하셨다. 젊은게 부럽다는 이야기도 하셨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남자 머리는 이발소에서 해야 잘 나오게 된다는 당부도 잊지 않으셨다. 피부에 맞는 머리 스타일이 있다나.
사람이 작은 것 하나하나에서 위로를 받는 건 위험한 상황이라는 증거라는 말도 있긴 하지만, 이발소에서 나눈 대화는 이상하게 약간 위안이 되었다. 그 과거로 돌아간 분위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한창 놀 나이. 어떤 사람들이 보기에 지금의 나이가 놀고 있어도 자연스러운 시기일 수 있구나 하는 점이 내심 내겐 새로웠다. 당장 다음 주 1차 합격발표이다보니, 올해냐 내년이냐 하는 문제가 내겐 꽤나 위급하게 다가오는데, 인생을 길게 본다면(물론 꽤 오래 생존할 수 있다는 가정하에) 플러스마이너스 1년 정도는 대외적으로 그렇게 대수로운 일은 아닐 수도 있겠구나 싶은 안도감이 약간 들었다.
만원을 드리고 나오는 길에 거울 옆을 쳐다보니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이발사 자격증이 걸려 있었다. 아마 오랜 시간 동안 그 자리에서 매일 쉬지 않고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을 뽐내며(결국 마지막까지도 그 미장원이라는게 내가 생각하는 미용실과 같은 공간인지는 물어보지 못했지만) 가위질과 면도를 계속 해오셨을 것이다. 사우나에서 뉴스를 보니 필리버스터에 대한 기사가 나오고 있었다. (정치 이야기를 할 마음은 없으니 선거법에 대한 얘기는 꺼내지 않겠으나) 오늘 아침에 보았던 신문기사가 떠올랐다. 필리버스터로 인해 속기사와 수화통역사 분들 역시 강행군을 뛰고 계신다는 기사. 문득, 내가 생각하는 '직업'의 범주가 굉장히 작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엊그제 연극을 올린 친구가 오늘 출근하는 걸 카톡에서 보기도 했고(목련 아래의 디오니소스....기회되고 할인도 되면 보러 가겠습니다) 편의점에서 일하는 알바생이나 사우나 가는 길에 있는 수많은 음식점 속 종업원 분들을 보면서, 역시 크리스마스도 바쁜 사람은 바쁘구나 했지만, 깊이 파헤쳐보면 생각보다 너무 간단한 도식이었다.
일하는 사람: 서비스직, 공연자, 종교인, 뭐 그 외에 바쁜 사람 노는 사람: 나머지
이 정도 아니었을까 싶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수많은 삶의 궤적이 있으며, 아주 다양한 삶의 장면이 존재한다.
나는 대충 머리로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발화하며 살아왔지만, 막상 제대로 그걸 이해하고 있지는 못하지 않았나 싶다.
굉장히 드넓은 직업 세계의 바다 앞에서, 다른 방향은 쳐다본 적도 없이 하나의 우물만 파면서 살아오고 있다. 물론 지금도 그 우물이 맘에 들기 때문에 가능한 한 파던 걸 계속 파내려갈 생각이다. 그러나 교사는 '소개하는 사람'이기에, 계속 이 상태여서는 안 될 것 같다. 조금 더 다양한 삶의 장면을 포착하고 전달할 수 있는 편이 더 좋다. 다양한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욕망은 지금까지 나와는 거의 무관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스스로 느끼기에 나 자신은 삶의 필요조건이 그다지 크지 않은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축적된 경험에 따르면, 이정도로 추산된다.
먹을만한 식사(매우면 더 좋음), 냉난방과 온수가 나오며 수압이 너무 약하지 않은 집, 폰과 32인치 TV와 게임기와 PC와 아이패드, 필수 가전제품, 침대와 이불과 전기장판.
그러나 앞으로 살면서는 점점 많은 것을 느껴보는 방향을 향해볼까 한다. 나는 단조로움 속에서 안식을 느끼는 타입이긴 하지만, 또 사실은 아주 새로운 상황을 만나면 아주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유럽도 가보고, 새로운 취미도 가져보고(사실 기존의 취미도 새로울 지경이다. 기타나 사진기나 만화나 믹싱이나 뭐 제대로 잡은지 오래되어서), 연애도 해보고, 막 살아도 보고 하면서 성장해야지. 아직 뭘 해보지 않았기에 계획도 전형적인 느낌이 없지 않아 있지만, 아무튼 새로운 방향을 추구하는 것을 추구해보는 것을 새해의 목표로 삼자.
군대가기 전에는 원래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군대다 시험이다 하면서 잠시 놓았던 거 같기도 하고 뭐 그렇다.
이제 게임할 거라서 글을 끊을건데, 별로 멋진 맺음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냥 뭐 메리 크리스마스..
(원래 처음에는 자른 머리 사진도 올릴까 했었는데, 막상 자르고보니 뭔가 자르기 전에 예상했던 이질적인 느낌이 딱히 없어서 올리지 않는다. 이발소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기에, 막연히 가지고 있던 어떤 환상이 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