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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N Jan 01. 2021

28.

2021년으로는 글을 못쓰겠어서 28살로 때운다.

이제 28살이다.
할 말이 마땅치 않았던 2021이라는 숫자와 다르게,
28이라는 숫자는 참 할 말이 많은 수다.
나이의 의미는 각자가 붙이기 나름. 이런 저런 단서들을 나열해둘테니 각자의 취향에 맞게 올해를 해석해보자.

1) 2+8=10
기계적으로 학습된 4×7=28을 제외하고, 가장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생각. 이거보다 다른 아이디어가 먼저 떠올랐다면 아마 십중팔구 수학하는 사람이다. 10은 일반적으로 완전함을 상징하므로, 무언가가 완성되어가는 느낌이 든다. 비슷한 원리의 19살(1+9=10)이 홀수+홀수의 형태여서 불완전한 것들을 모아 하나의 완성품을 만들어가는 느낌이라면, 28은 짝수+짝수이기에 조금 더 안정된 결합의 느낌을 준다.

2) 1+2+3+4+5+6+7=28
고2 수열의 합 단원을 배웠다면 이런 것도 떠올릴 법 하다. ∑ 처음 나오는 거기. 연속된 자연수가 계속 더해져 가는 모습이 무언가 쌓여가는 인생의 모양을 나타내는 것 같다. 7은 전통적으로 행운을 상징하므로, 올해에 드디어 완벽한 행운이 내 삶에 더해지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3) 8C2=28
고1 경우의 수 단원을 배웠다면 이런 것도 떠올릴 법하다. 8개 중에서 2개를 고르는 경우의 수. 동, 서, 남, 북, 북동, 북서, 남동, 남서의 팔방의 길 중에서, 그래도 이제는 하나만 고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두 개 정도는 선택할 수 있는 스탯이 생겼다. 두 개 정도는 골라야만 하는 시대 상황일지도 모르고.

4) 완전수 28
딱 요즘같은 시험 끝난 시기에, <박사가 사랑한 수식> 같은 수학 영화를 분명히 누군가는 틀고 있을 것이고, 그로 인해 누군가는 최근에 28이 완전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완전수(perfect number)란 6과 같이 자기 자신을 제외한 약수의 합(1+2+3)이 자기 자신과 같아지는 수를 의미한다. 수학에서 감히 perfect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만큼 특별한 숫자라고 이해하자. 이것이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28은 역사적으로 완전한 수로 자주 활용되어 왔다. 가장 중요한 불교 경전 중 하나인 <묘법연화경(법화경)>은 총 28개의 품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천지인의 원리를 담고 있다는 훈민정음 역시 처음에는 스물 여덟 자로 맹가노니. 미래를 예측할 때 활용되던 동양의 별자리 체계(이십팔수) 역시 28개의 별자리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이 경우는 4(청룡,주작,백호,현무) × 7(월,화,수,목,금,토,일)=28이긴 하다.) 아무튼 삶에서 무언가가 완성되는 나이라고 생각하면 좋다.

5) 28=1²+1²+1²+5²=1²+3²+3²+3²=2²+2²+2²+4²
어...28은 네 개의 제곱수의 합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세 가지인 가장 작은 자연수다. 갑자기 짜증이 솟고 스크롤을 넘기고 싶겠지만 참아달라. 개인적으로는 1729(라마누잔의 수)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보니 이런 식의 정의에 솔직히 더 눈길이 간다. 제곱수의 합이니 하는 머리 아픈 부분은 건너 뛰고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많다는 점에 주목하자.
사실 24~26쯤, 그러니까 얼추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그래도 나이에 대한 글이 공감을 얻기 쉬웠다. 물론 지금 학교에 와서 내가 보지 못했던 다양한 방식의 삶이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었지만, 독자가 대학교를 진학했다는 가정하에서 이 즈음까지는 얼추 삶의 모양새가 비슷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까지 공부하고, 대학교 와서 술 먹고, 삶의 방향성, 연애, 가치관 기타 등등을 고민하고..뭐 그런 것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글을 쓰기가 어렵다. 28 정도 되니, 각자의 삶은 더이상 나이로 규정되지 않는다. 같은 나이여도 이제는 점점 공유하는 경험이 달라지고, 살아가는 세계도, 마주하는 가치관도 달라진다. 서로가 스스로의 이야기를 가감없이 털어놓기도 어려워진다. 인생 경험이 많이 쌓여갈수록, 사람은 그 빅데이터를 굳이 철회하고 타인의 세계에 녹아들기를 어려워하게 되는 것 같다. 28은 더이상 하나의 공식으로 규정되지 않으며, 각자의 궤적에 따라 다르게 적히는 나이다. 1이 더해져 있는가, 같은 수가 세번 더해지는가, 네 홀수의 합인가 등의 아주 지엽적인 공통점 속에서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을 뿐이다.

6) 이십 팔
아 다 모르겠고 그냥 나이먹는 게 짜증난다 싶으면 그냥 이걸로 가자. 욕 한번 박고 힘차게 새해를 맞이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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