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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N Nov 23. 2022

'나의 낡은 오렌지나무'보다 '오월'이 더 서럽다

플레이리스트 Feat. 랄라스윗, 몽니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나도 벌써 이렇게나? 싶을 만큼 나이를 먹었다. 아침에 세수하다 비친 내 얼굴을 보고 새삼 놀란다. '와...이제 진짜 좀 아저씨가 되어버렸구나?'

드러누워서 유튜브를 보고 밀린 설거지나 빨래를 하고 의미 없는 인스타 릴스나 내려보던 사이, 시간은 진짜로 한 치도 쉬지 않고 성실히도 나를 늙혔구나 싶다. 베란다에 둔 귤박스, 그 아래쪽에 위치한 짓눌린 귤들을 보는 심정이다. 그래도 어느정도는 냅둬도 되겠거니 했는데. 얼마나 됐다고..위에 귤을 막 몇층으로 쌓아둔것도 아니건만. 그나마 곰팡이까진 안슬었으니 다행일까?


공부하던 때엔 이 나이쯤 되면 되게 많은 선택을 하고 많은 성장이 있을 줄로만 알았는데. 대학 졸업-취직의 다음 단계에는 놀라우리만치 아무 것도 없었다. 심지어 돈조차 없다. 이 직업을 고른다고 선언했을 때에, 꽤 많은 사람들이 그 고생을 해서 그 돈 버는 직업하는 게 아깝지 않냐고 했던 때에, 그 때는 아주 속 편하게 '먹고 살 만큼만 벌면 돼요. 저는 하고 싶은 일 하고 사는 게 더 중요한데요?' 하며 맞받아쳤던 기억이 난다. 이제 와 되돌아 보니 그때 내가 막연히 가늠했던 '먹고 살만한 만큼'은 그냥 '웬만큼 하고 싶은 거는 다 하고 살만큼'이더라. '대단한 부자는 못되어도' 정도의 수식어랑 같은 의미였다. 막상 먹고 살 만큼만 쓸 수 있는 타이밍에 처해보니, 그 말.. 진짜로 생각보다 혹독한 말이었구나. 먹고 살 만큼만 벌면 아무것도 못한다. 맛있게 잘 먹을 수도 없고, 다른 사람과 마음 편하게 함께 먹을 수도 없다.


헛헛한 내 마음을 한번에 달래줄 순 있는건 연금복권 2등 당첨 정도겠지만, 아무래도 그럴리는 없으니 BGM이라도 틀고 자기연민에라도 깊게 빠져보고자 했다. 감정이라도 원없이 느끼는게 덜 손해일 것 같아서.

여러모로 '서른 즈음에'(김광석)가 정석이겠지만, 아쉽게도 서른에서 좀 더 먼 나이일 때 듣고 한번 감정이 팍 터져버려서 이제 약효가 없다. 머릿속에서 플레이리스트를 돌려본다. 취직한 이후 노래를 찾고 골라 모아 들을 기회가 별로 없다보니 공부하던 시절 듣던 십여 년 전 인디밴드 음악만 가득하다. (십여 년 전이라니...뭐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아저씨된 게 실감나네.)


'소년이 어른이 되어'(몽니)로 예열을 했다.

나의 오늘이 흘러가면 서글픈 추억들 중에 작은 조각이 되겠지
잡을 수 없는 시간들은 떨어지는 빗방울이 사라지듯 나를 스쳐가네

 이거지.

마침 소나기가 내리는 타이밍에 운전을 하고 있었어서 가사가 아주 공감각적으로 박혔다.

이어서 '일기'(몽니).

누군가 나를 위해 흘려줄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면
돌아갈 수 없는 그때의 아쉬움을 더는 후회하지 않도록
시간은 기다리지 않고 우리의 지금은 순간이야
돌아갈 수 없는 그때의 사람들을 더는 기억하지 않도록

 미묘하다. 돌아갈 수 없다는 게 와닿기는 한데, 뭔가 결단을 해야할 것 같은 느낌이라 지금보다는 한 다섯 곡 뒤에나 틀었어야 딱 맞았을 것 같아. 나는 좀 더 답없이 한탄하고 싶다고. 벌써 이만큼 늙어서 겨우 이거라니 하며 한숨쉬고 싶은데.

마침 그런 노래를 딱 알고 있다.

때는 바야흐로 무려 2008년 대학가요제....(2008도 충격적이고 대학가요제도 충격적이네)

아무 생각 없이 닌텐도DS로 젤다의 전설(몽환의 모래시계)이나 하고 있던 한 중학생은 우연히 TV에서 이 노래를 듣고 아주 깊은 감명을 받아, 훗날 대학 새내기가 되어서 밴드 동아리에 들어가서까지 이 곡을 들이밀게 되는데..

바로 '나의 낡은 오렌지나무'(랄라스윗) 되시겠다.

사실 어린 나이엔 너무 가사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 때까지 들어왔던 세상의 모든 노래들은 뭐 사랑한다거나, 헤어졌으면 돌아와달라거나, 가끔 사랑 노래가 아니라도 질풍같은 용기를 달라거나 밝은 내일 위한거라거나 했는데, 이 노래는 그렇지가 않다.

어둠 속에 숨죽이던 내가 마주한
난 너무 변해 타인과 같아 이런 낯설음
차가운 시선 끝에 내몰려 무너진
난 낡아빠져 빛나지 않아
소리 죽이며 허리 굽히며 숨 쉬는 내게도
한땐 전부라 믿어왔던 수많은 것들
지나쳐 버리기엔 무시 해버리기엔 소중한
빛바랜 시간 빛바랜 기억 빛바랜 꿈들
나와 같은 나 가슴 부풀던 늘 그려왔던 익숙한 모습에
날 보고 있어 이 만큼 자라서 결국 이거였냐고
나는 아직 더 자라지 못한 어린
세상을 모르는 작은 아일
잊어버리고 그렇게 돌아서고만 걸까
잊혀가는 내 가슴속 기억의 나
지금은 먼지와 같겠지만
묻어두기엔 지워버리기엔
그냥 이대로 모르는 채로 사라졌으면 잊혀 졌으면
돌아가기엔 늦은 것 같아 너무 멀리 왔잖아
나는 아직 더 자라지 못한 어린
세상을 모르는 작은 아일
잊어버리고 그렇게 돌아서고만 걸까
잊혀가는 내 가슴속 기억의 나
지금은 먼지와 같겠지만
묻어두기엔 지워버리기엔
잔인한 너는 멀어져가겠지
이렇게 불쑥 날 아프게 하고
희미한 흩어진 난 널 그리워할까
널 다시 살려내 추억을 해도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되면 난
그땐 난 그땐 난 어떻게 할까

걱정만 하다 끝난다. 해답도 없고 희망도 없다.

과거의 내가 바라던 모습과 완전히 멀어져 타인과 같은 나. 이만큼 자라서 결국 이거였어? 하며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는 것만 같은 과거의 내 모습. 지금 내 시점에 듣기에 이거보다 더 적확하고 가슴에 사무칠 가사는 없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마음의 술렁임이 없었다. 너무 많이 들어서 그런가? 내 마음 속 삼각형도 이제 이 정도는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만큼 꼭짓점이 갈려 없어졌나 생각하던 와중, 다음 곡이 자동으로 재생된다.


'오월'(랄라스윗).


오월 너는 너무나 눈부셔 나는 쳐다볼 수가 없구나
엄마 날 품에 안고 기뻐 눈물짓던 아주 먼 찬란했던 봄이여
세찬 울음 모두의 축복 속에서 크게 울려 퍼지고
아주 많은 기대들 모여 날 반짝이게 했지
수많은 오월 지나고 초록은 점점 녹이 슬어도
따스했던 봄날의 환영을 기억해 나는 오월의 아이
오월 창공은 너무 높아서 나의 손엔 닿지가 않구나
우리 작은 아가는 커서 무엇이 될까 행복한 봄의 아버지였어
하나둘씩 지워져가는 도화지 위의 화려한 그림들
두 손 사이로 새어나가는 빛나는 모래알들
수많은 오월 지나고 초록은 점점 녹이 슬어도
따스했던 봄날의 환영을 기억해 나는 오월의 아이
검은 구름들 몰려와 거친 비가 내려 질퍽대는 땅 위에서 비척거렸지
난 조금은 더러워졌지만
수많은 오월 지나고 푸르지 않은 봄 마주쳐도
아주 오래전 그 날 눈부시게 빛나던
나는 축복의, 나는 오월의 아이

갑자기 세상이 서럽고 이상하게 마음이 북받쳐올랐다. 왜지? 나는 오월 생도 아니고 팔월 생인데. 그동안 이 노래도 아주 많이 들었었지만, 나는 들을 때마다 굉장히 희망적이고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곡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토록 서럽다니?

아직도 서러운 지점을 정확히 짚기가 어렵지만, 아마

아주 먼 찬란했던 봄, 아주 많은 기대들, 따스했던 봄날의 환영 같은 가사들에서 울컥했던 것 같다.


불행을 상기시키는 것보다 희망을 재현하는 것이 오히려 회한의 감정에 더 큰 파문을 던지는 돌일 수 있겠구나 싶다. 지금 느끼는 아픔을 다시 꼬집는 것보다도,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따뜻했던 날들을 마주하는게 훨씬 더 쓰라린 일이구나.


랄라스윗의 가사 철학을 카피하여, 이후에 희망적인 결말을 따로 적지 않고 글을 마치고자 한다. 실제로 답이 없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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