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진부하지만, 어른이 된다는 것
빼박캔트 만 나이 서른을 앞두고, 칵테일 두잔 마신 뒤
해가 바뀐다고 띠로롱하고 떠오르지 않던 생각과 고민들이, 오랜만에 여러 사람을 만나고 지나버린 세월을 느끼면서 다시금 하나씩 튀어나오기 시작한다. 한동안 지나치게도 평면적이었던 세계도 오랜만에 입체성을 다시 띄기 시작하는 것 같다. 한 곳에 일년 구개월 박혀지냈더니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다 깨달은 것만 같았던 병장 사호봉 때 마냥, 솔직히 요즘 들어 사람과 관계라는 것이 너무도 쉽게 느껴졌다. 어떤 어른들은 어른인데 왜 저럴까 싶기도 했고, 다른 사람들이 뭔 생각으로 사는지도 이제는 대강 눈에 보이는 듯 했다.
아주 오만방자했지. 인간관계라는 것은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 내가 아무 것도 모르는 하룻강아지였다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주기 때문에 그리도 수치스럽고 또 그나마 재밌는 것 같다. 서른 너머의 세상에는 컨텐츠가 부족하다고 그렇게 꿍시렁대고 다녔는데, 천만 다행히도 아직 인생에 드라마는 넘쳐나고 그저 내 카메라가 빈 벽을 비추고 있었을 뿐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걸까? 새삼 잘 모르겠다. 제대로 살아간다는 건, 괜찮은 어른이 된다는 건 도대체 뭘까?
그것에 대해 나름 많은 고민을 했을텐데 기억이 퍼뜩퍼뜩 안나서, 어떤 것이 맞다고 생각해왔는지부터 찬찬히 돌아봐야 할 것 같다. (전혀 다른 얘기지만, 나이가 들수록 사고과정이 자동이 아니라 수동이 되어가는 것 같다. 얼마 전에 스키장 가서 보드타다가 눈바닥에 머리를 살짝 박았는데, 순간적으로 오늘이 무슨 요일이었는지 생각이 안나더라. 스키장으로 출발한 날이 졸업식인걸 떠올려서 겨우겨우 수학적으로 계산해냈다. 한 20분 누워있었더니 멀쩡해졌지만 지금 생각해도 참 섬뜩하다. 살면서 봐왔던 매일 똑같은 얘기만 하는 어른들도 사실 제대로 대화하려면 수동 모드를 켜야해서 그랬던 건 아닐까?)
물론 지금 와서 추억보정하는 것이니 실제와는 전혀 다를 수도 있다. 뭐 틀리더라도 그걸 잡아낼 사람이 이젠 없으니 상관없지 않을까.
아무튼, 중고등학생 때는 싸워서 이기는 사람이 멋지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힘대결하는 소년만화를 워낙 많이 보기도 했고, 기본적으로 그 시절에는 모든 것이 싸움이기도 했다. 나는 아직도 중학교 때 영어학원에서 옆자리 애 죽빵을 날리던 깡패같던 남자애를 기억한다. 코피를 흘리면서도 학원 선생한테 들킬까봐 몰래 코를 훔치던 옆자리 애도 기억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도 차마 누구에게 말하지 못하고 헤드폰을 쓴 채 리스닝에 집중한 척하던 비겁하고 나약한 내 모습도 또렷하게 기억한다.(옆자리 애는 모르는 애긴 했다. 그게 뭐 변변한 변명이 못되지만.) 나중에 그 깡패보이는 무려 천 오백원 주고 산 내 닭꼬치를 한 입만 달라 그러고 몽땅 다 뺏어먹었고, 그걸 보고 궁시렁댄 나는 바로 뒷골목으로 잡혀갔다. 가자마자 쳐맞을까봐 조마조마했지만, 깡패보이는 나한테 빽이 있느냐며 호구조사를 가볍게 진행한 뒤 그런건 모르겠다고 하자 그러면 눈을 깔라고 했다. 내 친구 중에 싸움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뭐 닭꼬치 새로 사주나 싶은 의문이 살짝 들었던 것 같지만 아무튼 그 펀치를 한 번 목격했던 나는 절대 맞고 싶진 않았고 아주 순순히 눈을 깔았다. 그랬더니 그 깡패보이는 궁시렁거리며 자리를 떠났고, 나는 죽빵맞지 않았음에 안도감을 느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굉장히 분했다.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분한 포인트가 좀 이상했다. 눈을 깔면서 서열이 낮아졌다거나 자존심을 구겼다는 점이 분하다기보다는, '너가 한 입만 먹는다고 했으면서 내 닭꼬치를 전부 다 먹은 건 약속을 어긴거고, 그거에 내가 기분나빠한다는 사실에 대해 너가 화를 내는 건 잘못된 것이다.' 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는 점이 분했다. 물론 쳐맞지 않았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다. 하여간 그 때부터 나는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일을 맞다고 얘기하지 못한다는 것에 크게 분노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닭꼬치보단 사람 때리는 거에 더 분노해야 되는 거 아닌가 싶긴 한데 뭐 어쩌겠냐..그 때 나는 그저 이기적인 꼬맹이였다.)
그 때부터 논리적으로 말싸움하는 법을 열심히 익혔다. (주먹싸움으로 이기고 싶다는 생각은 아예 안했던 것 같다. 뭐 운동했어도 안될 거라는걸 알긴 했을텐데 그걸 떠나서 그냥 그런 애들이랑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 어릴때부터 책은 많이 읽었으니 논리 구조는 머릿속에 나름 잘 짜여져있었고, 그냥 말하기 겁날 때도 당당한 척 말해버리는 법이나 좀 더 전달력있게 얘기하는 법 정도를 고민하면서 말했던 것 같다. 그렇게 기른 말싸움 능력은 결과적으로 꽤나 유용했다. 고등학교 입시 전쟁 속에서 그나마 있던 일찐들도 좀 철이 들었는지 조용히 노는 분위기였고, 수학이나 뭐 다른 과목들이 나름 적성에 맞았던 나는 전교 몇등 몇등하면서 학생회도 하고 어찌저찌 발언권이 있는 위치에 서있게 되었다. 친구들이랑 성적 싸움한 건 그닥 즐거운 기억은 아니지만, 그래도 학교 선생님들과 싸우던 순간엔 스스로를 나름 멋있다고 착각했던 것 같다. 학생부장한테 학생은 공부로 말합니다 어쩌구 하면서 모의고사 성적 한 번 기깔나게 받아서 자습실 자율화를 협상해낸 일이나, 교과서를 빌릴 수 없던 애들한테 교과서를 빌려오라고 혼내면 안되는거 아니냐며 변호하던 일 등등... 그 때는 그게 정의롭다고 생각했고, 내가 생각하는 정의를 입에 물고 싸워낼 수 있는 사람이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사필귀정...보나마나 반드시 나에게도 언젠가 눈돌아가서 싸움 거는 학생이 있겠지. 그 때엔 겸허히 받아들이겠다.)
대학교 들어와서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사람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기나긴 입시 싸움을 끝내고 도착한 그 곳에서는 더 이상 사람들이 대놓고 싸우지 않았다. 웬만하면. 물론 크게 두어번 싸운 적은 있지만, 그건 누가 봐도 싸우지 않아서는 안될 일이었고(아닌가? 아님 말고.), 대부분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의 싸움이었다. 어떻게 분위기를 이끌어가고,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느껴지느냐가 중요했다. 대부분 뿔테안경 상고머리 투블럭이던 고등학교때랑 다르게, 대학교에서는 참 다양하게 매력적인 사람들이 많았다. 수학을 잘 하는 애, 말을 잘 하는 애, 노래를 잘 하는 애, 춤을 잘 추는 애, 교양이 많은 애, 잘 생긴 애, 리더십이 좋은 애, 옷을 잘 입는 애, 그냥 같이 있으면 재밌는 애 등등... 적어놓고 보니 고등학교 때도 다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아무튼 그때는 아예 다른 세상이라고 느꼈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사람에게 가까이 가고 싶었고, 그러려면 나 자신도 어느 정도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 때는 놀라우리만큼 전혀 몰랐다. 그 때가 그 사실을 몰라도 되는 거의 마지막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학교에 워낙 행사가 많기도 하고 학과 자체도 워낙 좁다보니 스스로 끼고 싶지 않아하거나 엔간히 이상한 사람인 게 아니라면 누구든 충분히 저절로 만나지는 순간이 있었으니까. 그 때는, 그저 좋아하는 마음 하나면 충분한 줄만 알고 상대방의 입장과 시선을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을 아예 몰랐던, 나같은 민폐덩어리들에게도 갱생의 여지를 줄 만큼의 자비는 있었다. 다들 자신의 찌질의 역사를 서너 개 쓰고, 그나마 좀 사람다워질 수 있었다.
군대를 다녀와서는 조금 상황이 달라진 것 같다. 워낙 복학생 밈이 유행하던 시기였기도 했고, 정말로 추하고 위험한 사람들도 많았어서 그런가, 복학생들 스스로가 다들 전반적으로 사람에게 다가가기를 조심하는 분위기였다. (말이 다들이지 그냥 내 주변 사람들이 그랬다는 얘기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은 1/3 정도는 졸업해있고, 1/3 정도는 군대 가 있고, 나머지 1/3끼리는 좀 각자도생하는 분위기? 그래도 이제 미래를 생각해서 모여서 스터디도 하고 그랬다. 아무튼 사람이 저절로 끌어당겨지지 않았고, 누군가를 끌어들이기도 조심스러운 시기였다. 처음으로 약간 아저씨 취급을 받는 시기가 되다 보니, 사람들이 싫어하지는 않는 선배가 되는 것에 민감했고 나름 신경을 곤두세웠다. 일년 구개월 동안 스멀스멀 주입된 꼰대 마인드가 무심결에 입 밖으로 새어나와 냄새를 풍기지 않도록. 부르고 싶지 않았지만 예의상 물어본 자리에 눈치 없이 불려가지 않도록. 호의를 호감으로 오인하여 되돌릴 수 없는 조준사격을 하지 않도록. 그러한 다짐 속에 괜찮은 어른에 대한 한 가지 신조가 생겨나게 된다. 사회에서 말하는 괜찮은 사람이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그 생각을 마음 한 켠에 품고 어느새 지금까지 와버렸다. 너무 멀리 와버린 것 같다. 아주 틀린 아이디어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술자리에서 되도 않는 조언을 해대는 선배보다는 마음 속에 떠오른 요즘 젊은이들에 대한 걱정을 일체 표출하지 않는 선배가 그나마 나았고, 쉬는 날에 귀찮게 불러내는 동료보다는 사적으로 건드리지 않는 동료가 나았으며, 다른 사람의 민감한 개인사를 물어보는 어른보다 실없는 소리만 하며 자리를 지키는 어른이 반응이 좋았다. 그러나 그렇게 나는 어느새 누구에게도 먼저 손을 내밀지 않는 어른이 되어있었다. 보고 싶은 마음이 피어오르더라도 먼저 '잘 지내?'한 마디 보내지 않았고, 누군가 만나고 싶을 때에도 언제 보자는 말을 거의 먼저 꺼내지 않았다.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꼭 만나야만 소중해하는 마음이 유지되는 건 아니고 추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대신 그나마 누가 나를 부르면 웬만하면 나갔다. 이제 뭐 예의상 나를 부를 사람도 없을 뿐더러 나를 먼저 찾아준다는 사실이 고마워지기 시작했으니까. 그렇게만 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어느새 시간의 벽은 너무나 두터워졌고, 사실 한 발짝만 디디면 되는 거리도 점차 쉽사리 디디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요즘은 사람을 챙길 줄 아는 어른이 멋있다고 느껴진다. 만나고 싶은 사람에게 먼저 연락을 보내고, 오랜만에 사람들을 모으고, 여행을 갔다 와서 일일이 선물을 챙겨오고, 명절이나 기념일에 잊지 않고 안부 인사를 보내고, 다른 사람의 관심사를 기억하고, 새로운 사람에게 나서서 호의를 보이고, 혼자 어려워하는 사람을 캐치해서 도와주고 하는 그런 모습들이 존경스러워진다. 솔직히 어릴 때에는 그렇게 대단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던, 오히려 때때로 귀찮다고 여겨지기까지도 했던 어른들의 모습인데, 이제와 되돌아보니 거기에 쓰이는 정성과 마음의 크기가 조금은 느껴진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는걸까? 지금 만나는 멋져보이는 어른들의 그런 모습들은 생애 전체에 걸쳐 만들어진걸까? 아니면 의외로 노력하면 몇 년 안에도 바뀔 수 있는걸까? 지금껏 내가 추구했던 사려깊은 배려심이라는게 사실은 잘 포장된 무관심이었던 건 아닐까? 나는 다른 사람의 상황을 배려한다는 미명하에 다른 사람의 삶도, 그들과 닿고 싶다는 나 자신의 욕망도 외면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지금 느끼는 이런 깨달음은 얼마나 갈까? 하나의 구호로만 남고 실현되지 않으면 어떡하지. 새벽이 깊어가니 고민이 꼬리를 문다. 그래도 그나마 이러한 고민이 남아있을 때가 아슬아슬하게 퇴화는 면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라고 애써 스스로를 위로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