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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te Fall May 16. 2021

절망적일 때는 핑계를 대도 괜찮다

-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로부터 -

 주지하다시피 트로이는 그리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였다. 로맨틱한 회전목마가 아닌 바로 그 비극적인 그리스로부터 온 목마 때문이었다. 전쟁에서 진 후, 아프로디테(로마어로는 베누스, 영어로는 비너스)의 아들 아이네아스는 제 2의 트로이인 로마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모험을 떠난다.     


  기나긴 뱃길 여정 끝에 아이네아스가 도착한 땅은 로마 인근 라티움. 그곳에서 아이네아스는 루툴리족의 왕 투르누스와 일대 격전을 벌인다. 이민자가 나타나 나라를 세우려 하니 토착민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 전투마다 아이네아스는 아프로디테의 아들인만큼 늘 그녀의 도움과 후원을 받아왔고 흰 팔의 소유자 헤라(로마어로 유노) 여신은 트로이를 죽도록 싫어했으므로 -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의 심판으로 인해 - 투르누스의 편이 되어 싸웠다.     


  투르누스가 아이네아스와의 싸움에서 위험에 처해지자, 헤라는 제우스(로마어로는 윱피테르)의 허락을 받고 그를 구해주기로 작정한다. 그녀는 공허한 안개로 아무 힘도 실체도 없는 아이네아스의 환영을 만들어 도망치도록 하고 이를 본 투르누스가 아이네아스를 추격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그렇게 투르누스는 위험한 전쟁터로부터 구해졌다. 이 장면을 읽어보자.     


  “나는 창피하게도 그들 모두를 수치스럽게 죽도록 내버려 두었나이다. 나에게는 벌써 그들의 뿔뿔이 흩어진 모습이 보이고 쓰러져 신음하는 소리가 들리나이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이까? 나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나이다. 바람들이여, 너희들이라도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이 투르누스가 진심으로 간청하노니, 너희들은 이 배를 암초나 바위 위로 몰거나 아니면 무자비한 유사 위에 데려가 어떤 루툴리족도 나의 치욕에 관한 어떤 소문도 나를 따라오지 못하게 해다오!” 이렇게 말하고 그는 마음이 때로는 이쪽으로 때로는 저쪽으로 흔들렸다. 이런 치욕에 절망한 나머지 칼 위에 쓰러져 무정한 칼날을 갈빗대 사이로 밀어 넣을까, 아니면 바다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구부러진 해안으로 헤엄쳐가서는 또다시 테우케르 백성들의 무구에 맞설까 하고 세 번이나 그는 각각의 방법을 시도해보았으나, 세 번이나 가장 위대한 유노가 말리며 측은지심에서 젊은이를 제지했다. 그는 바닷물을 가르며 유리한 조수와 물결을 타고 아버지 다우누스의 오래된 도시로 떠밀려갔다.     

  사실 투르누스는 아이네아스로부터 도망간 것이다. 그렇다고 전투 중에 왕이 두려워서 도망갔다고 말하면 모양새가 많이 빠지지 않겠는가. 작가는 도망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할 필요가 있었겠다. 간단하다. 신의 이름을 빌리면 된다. 투르누스를 구하기 위해 헤라가 속임수를 썼다고 하면 그는 도망간 게 아니라 신의 뜻에 따라 속은 것이 된다. 인간이 어찌 신의 뜻에 대적할 수 있겠는가. 그저 순응하며 살아갈 수 밖에.     


  살다보면 절망적일 때가 있다. 배짱이 두둑하고 용기가 넘치는 사람들은 자신 앞에 놓여진 산과 같은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두 눈을 부릅뜨고 직시하여 이겨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소심하고 무서움이 많은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당면한 문제로부터 도망칠 수도 있다. 이게 잘못되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도망가지 않으면 그들은 파괴될지도 모르니 시쳇말로 그릇이 적으면 적은대로 살아가는 것도 방법이다. 그릇의 크기를 키우는 것은 그 다음에 하면 된다.     


  핵심은 그렇다고 해서, 포기했다고 해서, 달아났다고 해서 자신 스스로 비겁한 사람으로 낙인 찍고 평생 아파하지 말라는 말이다. 사실은 절망적인 상황으로부터 도망친 게 아니라 전지전능한 신이나 혹은 그 무엇이 자신을 속여 강제로 다른 곳으로 데려간 것이다. 핑계를 남겨준 것이다. 마치 투르누스의 헤라처럼.


[그림출처: YES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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