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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te Fall Mar 20. 2022

제 4권. 맹약의 위반 & 아가멤논의 열병

- 호메로스(Homeros)의 『일리아스(ILIAS)』 -

  한편 올륌포스 신들은 제우스 곁에 모여 앉아 트로이아 전쟁의 앞날에 관해 회의를 열고 있다. 회의에 필요한 것이 차 접대. 청춘의 여신 헤베는 커피 대신 신주(넥타르, nectar)를 따라주는 웨이트리스 역할을 한다. 원래 헤베는 제우스와 헤라의 딸이다. 알바를 쓰지 않는 대신 딸로 하여금 차 담당을 하게 하는 검소한 가족의 모습이다. 이처럼 인간과 같은 신의 모습은 일리아스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신이 늘 전지전능하고 완벽한 존재는 아니다. 신도 실수를 하고 부부싸움을 하고 토라지기도 한다. 그래서 일리아스의 신들은 인간적으로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겠다.     


  이제 제우스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한 채 헬레네를 전남편 메넬라오스에게 돌려주고 전쟁을 끝내자고 제안한다. 올륌포스 최고의 신의 의견에 누가 감히 반기를 들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당연히 있다. 종전을 반대하는 입장을 가진 명백한 신은 황금 사과를 빼앗긴 헤라와 아테네이다. 여신들의 마음에 생채기가 났으니 그들에게 트로이아는 눈엣가시다. 아테네는 제우스의 의견이 못마땅해도 입 꾹 다물고 있어야 한다. 아버지한테 개기다가는 어떻게 될지 모를 테니. 헤라가 나선다. 부부싸움의 시작이다.     


가장 두려운 크로노스의 아들이여!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나는 프리아모스와 그의 자식들에게 재앙이 되게 하려고 지친 말들을
몰고 다니며 애써 백성들을 모았거늘 어찌하여 그대는 나의 노력과
노고의 땀이 허사가 되게 하려는 거예요? 마음대로 하세요.
그러나 우리들 다른 신들은 아무도 그대에게 찬성하지 않을 거예요.     


생떼다. 왜 트로이아를 파괴하려는지 헤라는 이유를 대지 않는다. 헤라도 알고 있다. 황금사과를 못 받아 질투 나서 죽겠다고 하면 명분이 너무 약하다는 것을. 그래서 무조건 싫다고 한다. 무조건 싫다고 무조건 미워 죽겠다고 아내가 말하면 남편이 무어라 할 수 있겠는가. 비논리적인 요구에 맞서는 방법은 얼렁뚱땅 그에 상응한 비논리적인 보답을 확보해 두는 것이다. 너가 그렇게 하면 나도 나중에 그렇게 한다고. 제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대가 사랑하는 인간들이 살고 있는 도시를
언젠가 내가 파괴하기를 열망할 때는 그대는
내 노여움을 막지 말고 내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시오.
내가 지금 마음이 내키지 않는데도 자진하여 그대에게
양보했듯이 말이오.     


  헤라가 뭐라 하겠는가. 니 마음대로 하세요. 참으로 흔한 부부싸움 모습 같아 재미있다. 아내와의 말싸움에 진 제우스는 아테네에게 명령을 내린다. 트로이아인들로 하여금 먼저 맹약을 어기고 승리를 기뻐하고 있는 아카이오이족을 기습 공격하도록 하라고. 아테네는 트로이아인들의 무리 속으로 들어간다. 프리아모스의 신하인 안테노르의 아들 라오도코스의 모습으로 변신하고 신과 같은 판다로스를 꾀어 메넬라오스에게 화살을 날리도록 부추긴다. 판다로스의 화살은 메넬라오스에게 날아가지만 아테네가 막아준다. 그 모습이 너무 나른하다.     


마치 어머니가 단잠이 든 아이에게서 파리를 쫒아버리듯
아테네가 그대의 몸에서 화살을 살짝 빗나가게 했도다.     


  이를 안 아가멤논은 분노한다. 맹약을 어긴 트로이아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아가멤논 입장에서 보면 트로이아의 약속 위반이 외려 이득이 될 수 있다. 전쟁은 10년째에 접어들고 있는 데, 뭐 제대로 얻은 것도 없고 아킬레우스는 삐쳐서 싸움터에 나오지도 않으니 분위기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헤라와 아테네라는 여신들의 계략은 사실 인간 아가멤논의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음모를 생각하고 이를 신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즉 자신의 군사 중에 가장 활을 잘 쏘는 자를 선발해 트로이아 진영에 잠입시킨 후, 메넬라오스가 죽지 않을 정도로 상처를 내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신화적인 이야기의 흥미가 조금 퇴색되는 느낌도 있다. 아, 아니다. 이 모든 것들은 다 신들의 뜻이다. 한낱 인간인 내가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아가멤논은 열병을 시작한다. 열병은 군대를 정렬하고 현재 상태를 점검하고 사기를 북돋는 행위를 말한다. 그는 이도메네우스, 두 명의 아이아스, 네스토르, 오뒷세우스 등이 이끄는 연합군에게 다가가 격려했고 그들은 다시 싸움터로 달려갔다. 그러나 싸움터로 나가는 다나오스 백성들은 벙어리처럼 조용했다. 그도 그럴 것이 병사들은 지휘관들이 두려워 그저 묵묵히 따라가던 것이다. 트로이아인들은 더했다. 그들은 좌충우돌했다. 그들에 대한 묘사가 짠하다.     


그러나 트로이아인들은 마치 어느 부잣집 안마당에서
흰 젖을 짜주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새끼 양들의 울음소리를
듣고는 끊임없이 매매 울어대는 수많은 암양 떼와도 같았다.
꼭 그처럼 트로이아인들의 넓은 진중 도처에 소음이 일었다.
그들은 여러 곳에서 불려온 자들인지라 모두 언어와 음성이
같지 않고 여러 가지 말이 뒤섞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아레스가 격려했고 저들은 빛나는 눈의 아테네와
공포와 패주와 끝없이 미쳐 날뛰는 에리스가 격려했다.     


  은근슬쩍 밀어 넣은 것처럼 보여지지만, 전쟁의 신 아레스가 트로이아 편을 드는 모습이 보인다. 아프로디테가 그의 정인이기 때문일까. 그러나 아레스의 누이인 불화의 여신 에리스는 그리스 편이다. 황금사과를 던져놓고 불화를 조장하더니 그리스 편에 붙은 것이다. 이처럼 신들은 나름 두 나라 중 한 나라를 지원한다. 4권에서는 아폴론이 자신이 쌓은 성 위에 걸터앉아 트로이아인들을 응원하는 모습도 나온다. 라오메돈 왕을 위해 성을 쌓아주었으나 보수를 받지 못했음에도 아폴론은 자신이 쌓은 성에 애착이 컸던 것일까. 함께 성을 쌓았던 포세이돈이 트로이아에 적대적이었던 반면에 그는 트로이아편이었던 것이다.     


이 때 아폴론이 페르가모스에서
내려다보고 있다가 화가 나서 트로이아인들에게 소리쳤다.
“일어서라 말을 길들이는 트로이아인들이여! 싸움에서
아르고스인들에게 물러서지 마라. 그들의 살갗은 돌이나 무쇠로
되어 있어, 얻어맞아도 살을 베는 청동이 도로 퉁겨져 나온다더냐!
더군다나 머릿결 고운 테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는 싸우지도 않고
함선들 사이에서 마음 아프게 하는 분노를 되새기고 있지 않은가!“     


  전투는 서로 대등했다. 어느 편도 못 싸웠다고 할 수 없을 만큼 치열했다. 그리고 수많은 트로이아인들과 아카이오이족이 얼굴을 먼지 속에 처박고 전사했다. 영어 표현 중에 ‘죽다’ 라는 의미로 ‘bite the dust’가 있다. 먼지를 입에 물면 그렇게 죽는다는 뜻이다. 캔사스(Kansas)의 ‘Dust in the wind’라는 팝송이나 김광석의 ‘먼지가 되어’라는 노랫말은 차라리 애절하다. 먼지는 미세하든 아니하든 가까이 하면 좋을 일 별로 없는 것이다.     


  잔인하지만 먼지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을 더 소개하고자 한다. 지금은 <신세계> 같은 느와르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씬이 당시에는 글로 생생하게 묘사되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다. 오늘날 폭력영화 시나리오 작가들은 자신의 원고에 이런 죽음의 장면에 대한 표현을 어떻게 쓸까. 궁금증이 인다. 호메로스는 있는 그대로 썼다. 비범한 상상력과 함께.     


창을 이마로 밀어 넣자, 청동 창끝이 뼛속을
뚫고 들어갔다. 그리하여 어둠이 그의 두 눈을 덮자
그는 격렬한 전투에서 탑처럼 쓰러졌다.     


그가 먼저 앞으로 나오는 순간 아이아스가 그의 오른쪽 가슴 위
젖꼭지 옆을 맞혔다. 그래서 청동 창이 그의 어깨를 뚫고 나가자
큰 늪의 질척한 땅에서 자란 미끈한 포플러나무처럼
그는 땅 위 먼지 속에 쓰러졌다.     


오뒷세우스가 전우 때문에 화가 나 창으로 그의 관자놀이를
맞히자 청동 창끝이 그의 다른 관자놀이를 뚫고 나왔다.
그리하여 어둠이 그의 두 눈을 덮으니, 그는 쿵 하고 쓰러졌고
그의 위에서는 무구들이 요란하게 울렸다.     


무자비한 돌이 두 힘줄과 뼈를 박살내자
디오레스는 먼지 속에 뒤로 나자빠졌고 숨을 거두며
사랑하는 전우들을 향해 두 손을 내밀었다.
그래서 그를 맞힌 페이로오스가 그에게 달려들어
창으로 그의 배꼽 옆을 찌르자 창자가 모두
땅 위로 쏟아졌고, 어둠이 그의 두 눈을 덮었다.     


토아스가 창으로 그의 젖꼭지 위 가슴을 치자
청동이 허파에 꽂혔다. 그러자 토아스가 바싹 다가가
그의 가슴에서 강한 창을 뽑은 뒤 날카로운 칼을 빼어
배 한가운데를 내리쳐 그의 목숨을 빼앗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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