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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리왕 Feb 03. 2023

우리의 알량함을 뒤로한 채 떳떳하며 고고하다.

유랑의 달 (2023) directed by 이상일


 영화는 그네를 탄 소녀의 뒷모습으로 시작한다. 쇠사슬로 된 그넷줄을 양손의 쥔 이미지는 마치 쇠창살 뒤에 갇힌 사람을 연상케 한다. 소녀의 그네는 상승을 반복하지만 고정된 카메라는 소녀와 그네가 화면으로부터 멀어지는 걸 용납하지 않는다. 영화는 이 소녀가 어딘가 갇혀있고 묶여있는 인물이라는 심상을 단번에 전달한다. 뒤이어 비가 쏟아지고, 우산을 들고 나타난 남자는 소녀에게 ‘우리 집, 갈래?’라고 묻는다. 소녀는 남자의 집으로 가 잠을 자고 밥을 먹는다. 남자와 소녀는 통성명하며 ‘후미(마츠자카 토리 분) 상(さん)’이 아닌 ‘후미’로, ‘사라사(히로세 스즈 분) 쨩(ちゃん)’이 아닌 ‘사라사’로 부르라고 말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둘 사이에 어른과 아이, 남자와 여자라는 구분을 삭제한 채 반짝이는 여름휴가를 보낸다. 딱 ‘후미’가 유괴 혐의로 체포되기 전까지의 이야기다.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된 ‘사라사’는 식당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한다. 이때 한쪽 테이블에 앉아 ‘후미’와 ‘사라사’ 사건의 보도자료 영상을 보며 소아성애자를 비난하는 학생들이 화면에 잡힌다. 이 학생들의 모습은 영화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감독이 관객에게 던지는 일종의 주의사항이다. 상당수의 관객은 이 학생들처럼 겉으로 드러난 소재와 사실관계에 매몰되어 원색적인 비난을 가하는 위치에 머무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개를 들어 눈앞에 있는 인간 ‘사라사’를 바라볼 때 우리는 더 깊은 드라마와 딜레마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따라서 퇴근한 ‘사라사’를 따라 그의 집으로 들어가는 순간이 영화가 진정 시작하는 지점이다. 앞서 식당에서 감독의 주의를 듣고도 객석을 떠나지 않은 관객이라면 우리는 외부로 드러나지 않는 인물의 깊은 부분까지 모두 읽어나가야 할 책임을 부여받는다.     


 이때부터 영화는 일종의 윤리 실험실로 변모한다. 감독은 ‘누가 가해자인가?’라는 논제를 중심으로 실험을 진행한다. ‘사라사’의 가족, 연인, 직장 동료 모두 ‘사라사’의 보호자를 자처하지만 실제로는 ‘사라사’에게 어떤 식으로든 해를 가하고 마는 인물들이다. 반대로 세상 모두가 가해자로 지목하는 ‘후미’만이 유일하게 ‘사라사’를 보호한다. 한편 모든 사람들은 '사라사'의 어린 시절을 알고 있으며 이를 근거로 '사라사'를 피해자로 여긴다. 하지만 '사라사'는 자신을 '후미'에게 무릎을 꿇고 빌어야 할 죄인이라고 표현한다. 본인 때문에 '후미'가 억울하게 범죄자로 낙인찍혀 삶을 잃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영화는 자명한 것처럼 보이는 사실들을 뒤집으며 영화를 더욱 입체적으로 만든다. 또한 인물과 관객이 이 허깨비 같은 '사라사' 유괴 사건에 집착하는 사이, '사라사'의 애인 '료(요코하마 류세이 분)'는 물리적·성적 폭력에 스토킹까지 감행하고, 직장동료의 어린 딸은 보호자로부터 버림받는다. 가상의 범죄와 대립하는 사이 여성과 아이는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러니는 보는 이에게 숙연함을 더한다.     


 『유랑의 달』은 이상일 감독의 전작 <분노>와 마찬가지로 폭력이라는 씨실에 사랑이라는 날실을 엮어 불가해한 드라마를 선보인다. 『분노』와 『유랑의 달』 모두 자극적인 소재에 박력 있는 연출로 관객의 감정을 격양케 하는 뜨거운 영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기저에는 서늘하게 계산된 구조가 영화를 안정적으로 떠받들고 있다. 『분노』의 경우 독립된 세 개의 이야기를 병렬하여 정서와 이야기를 탑처럼 쌓아 올리는 효과를 야기한다. 반면 『유랑의 달』은 하나의 이야기에 차이와 반복을 가하며 영화와 관객을 내밀한 곳으로 끌고 간다. 어린 ‘사라사’와 ‘후미’ 사이에 있었던 일은 어른이 된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보는 순간부터 리플레이된다. 폭력을 피해 갈 곳이 없는 ‘사라사’는 또다시 ‘후미’의 거처로 들어오는 반복이 일어난다. 그리고 아이였던 ‘사라사’에게 저녁으로 아이스크림을 주었던 장면은 어른이 된 ‘사라사’에게 아이스 카페라테를 주는 것으로 수정된다. 이처럼 둘 사이에 일어나는 여러 장면들의 변주는 아련한 정서를 전달하지만 한편으론 미스터리를 불러일으킨다. '사라사'는 어른이 되었는데, '후미'는 15년 전 모습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영화적 허용이라기엔 다소 의아한 이 부분은 영화의 말미에 이르면 단번에 해소된다. 이처럼 '유랑의 달'은 인물을 그리는 방식, 그리고 관객에게 다가가는 방식 모두 철저하다.


 『분노』에 이어 『유랑의 달』까지 보고 나면, 이상일 감독은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데 거리낌이 없다는 확신이 든다. 감독은 답이 없는 질문으로 우리를 생각하도록 만든다. 관객은 이 소재를, 이 인물을, 이 이야기를 인정할 수 있는가 골똘히 고민하며 러닝타임을 따라간다. 그러나 결말에 이르면 이 모든 고민이 그저 알량할 따름이다. 관객은 본인의 위치가 영화 속 어디쯤에 해당하는가를 진정으로 고민해야 한다. 모두가 각자 객석에 갑론을박을 펼치지만 누구도 '후미'와 '사라사'라는 중심에는 가닿지 못한다. 두 사람을 둘러싸고도 진실을 보지 못하는 무수한 조연들과 같은 위치를 공유할 뿐이다. 그리고 '후미'와 '사라사'는 이 영화 안팎의 소행성들을 뒤로한 채 독자적인 궤도를 따라 흐르며 영화 밖으로 퇴장한다. 서로의 결핍이 곧 결합인 이 관계는 되려 떳떳하며 고고하기까지 하다. 앞으로 어떤 질문으로 우리를 곤란하게 밀어붙일까, 이상일 감독의 다음이 기대되는 바이다.


아트나이너 17기 강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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