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편리왕 Oct 23. 2022

실패한 관찰일기가 주는 우습지만 시린 마음

성적표의 김민영 (2022) directed by 이재은, 임지선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2010)'는 한 편의 시가 쓰이기까지 거치는 뼈아픈 관찰과 고투의 시간을 그린다. '성적표의 김민영'은 어떤 측면에선 '시'의 정반대 좌표평면에 위치한 영화처럼 보인다. '시' 속의 어느 할머니는 이토록 힘겹고 외로운 시작(詩作)을 하는데, '성적표의 김민영'에선 세 명의 고등학교 친구들이 삼행시 클럽을 운영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끝없는 관찰과 사유가 필요한 할머니의 시와 달리 이 학생들의 삼행시는 타이밍이 생명이다. 기습적으로 띄운 운에 답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시작(詩作)은 상당 부분 무의식, 또는 부주의의 영역이다. 깊은 관찰과 사유 없이도 청자의 반응을 끌어내는 이들의 삼행시는 평범한 10대 학생들의 교우 관계와도 닮았다. 우리 인생에는 특별한 기술 없이도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특권 같은 시기가 있다. '어차피 오늘도 보고 내일도 볼 것'이라는 안일함이 이 시기의 무수한 갈등들을 무마한다. 마치 큰 고민 없이 툭 튀어나온 삼행시로도 충분히 깔깔거릴 수 있듯 말이다. 따라서 삼행시 클럽의 해체는 곧 이 특권적 시기의 만료다. 이제 이 전직 삼행시 클럽 멤버들에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선 친구이길 유지하기 힘든 날들이 찾아온다.


 영화는 교복을 맞춰 입은 세 학생이 함께 사진을 찍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영화의 모든 시간을 지나고 이 장면을 돌아본다면 이 사진은 일종의 선포처럼 느껴진다. 더 이상 이 세 사람은 같은 옷도 입을 수 없고 같은 선상에 서 있지도 않으리라는 얼얼한 신호탄인 셈이다. 스무 살이 넘고 세 사람은 제각각 맞는 옷을 찾아 입는다. 테니스장에서 일하는 '정희(김주아 분)'는 테니스복을, 하버드 대학교에 진학한 '수산나(손다현 분)'는 하버드 후드티를 입는다. 고향을 떠나 대구대에 진학한 민영(윤아정 분)은 그의 동기들과 '청자켓 동호회'로 불리며 같은 드레스 코드를 공유한다. 언뜻 보면 이 옷들은 모두 유니폼처럼 보이지만 누구와도 결속력을 갖지 못한다. 10대 시절과 같은 합일을 이루고 싶었던 미숙한 20살들의 의복은 서로의 차이, 그리고 관찰의 필요를 더욱 부각할 뿐이다.


 외로운 나날을 보내던 정희는 서울에 있는 민영을 찾아간다. 고등학생 때와 같은 마음으로 한달음에 달려갔건만, 정희를 기다리고 있던 건 공교롭게도 스무 살의 첫 성적표를 받은 민영이었다. 민영의 학점 'C+'는 관찰의 실패에 따른 결과다. 그녀는 미생물 관찰도, 동기들 관찰도 실패했다. 관찰의 실패는 비단 민영의 성적표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영화는 컷 내적으론 인물들이 서로를 마주 보지 않고, 외적으론 장면과 장면이 서로 호응하지 않는다. 이런 형식적인 분절 탓에 관객은 쉬지 않고 스크린을 바라보면서도 영화를 관찰하기가 쉽지 않다. 영화는 서사에 있어서도 관객이 들어올 틈을 주지 않는다. 이를테면, 정희가 왜 대학에 가지 않았는지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관객은 영문도 모른 채 '대학에 가지 않은 정희'를 바라만 보는 관찰을 수행해야 한다. 또는 민영이 PC방에서 정희의 전화를 받지 않는 장면에도 특별한 설명이 붙지 않기 때문에 관객은 그저 그들의 어긋남을 있는 그대로 목격할 뿐이다. 이야기 속 인물들의 관찰 실패는 영화의 형식을 타고 관객에게 전달되고, 관객은 이 관찰의 실패를 각자 개인의 경험 속 관계의 실패까지 확장한다. 영화가 켜켜이 쌓아 올리는 무수한 실패들을 받아들일 때 감상에 성공하는 아이러니가 영화 전반을 추동한다.


 그러나 영화는 분명하게 이 인물들에 대한 힌트도 제공한다. 민영은 자신의 '쓸모'에 대한 문제를 겪고 있다. 영화가 시작하면서 읊어주는 '김민영' 삼행시는 무척 직접적으로 이 부분을 짚어준다. 또한 민영이 PC방에서 하는 게임이 RPG 게임이라는 점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대부분의 게임이 적과 싸워 이기는 걸 목표로 삼지만, RPG 게임은 자기 자신으로 대표되는 캐릭터를 키워 효용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민영이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한 혼자만의 싸움에 빠져 있는 상태임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한편 정희의 문제는 존재감이다. "내가 투명 인간이야? 내가 투명해?"라는 대사는 단순히 민영을 향한 서운함의 표출만이 아니다. 이 말은 거시적으로 볼 때 정희를 둘러싸고도 정희를 모른 척하는 세상을 향해 '내가 정녕 여기 있다는 걸 모르냐?'는 고함과도 같다. 이렇게 어렵사리 속내를 터놓고도 정희는 '방문마다 통과하고 그럴까?'라는 엉뚱한 말을 덧붙여 상황을 맺는다. 속상하단 말을 하면 되레 민영이 더 속상할까 걱정하는 정희의 약한 마음의 발현 같아 우스우면서도 마음이 미어지는 부분이다.


 영화는 말미에 이르러 정희가 민영을 관찰한 결과를 두 가지 형식으로 보여준다. 하나는 직접 적은 성적표, 다른 하나는 공모전에 출품한 그림이다. 정희는 민영을 평가한 성적표를 영화 속 민영에게 전달한다. 반면 그녀의 그림은 민영이 아닌 영화 밖의 관객에게 제출된다. 성적표의 각 평가항목과 뒤따르는 설명은 민영이 생각할 몫이라면 관객의 몫은 영화의 엔딩에도 해당하는 그림을 읽는 것이다. 정희는 민영의 이름으로 '숲의 정령'이라는 제목의 약초 캐는 여인 그림을 출품한다. 본래 이 약초 캐는 여인 이미지는 정희가 갖고 있던 셀프 이미지였다. 그러나 카메라가 그림 속으로 들어가고 화면이 실제 숲으로 전활 될 때, 뒤를 돌아보는 여인의 얼굴은 정희가 아닌 민영이다. 따라서 이 그림 속 여인의 얼굴이 정희에서 민영으로 옮겨간 것은 정희가 민영을 관찰하며 비록 그녀를 이해할 순 없었지만, 그녀의 외로움에는 어느 정도 동감했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이 같은 외로움의 이해는 스크린을 넘어 객석까지 영화를 확장한다. 정희의 그림에 정희가 아닌 타인의 얼굴이 담겨 있다는 건 그 자리에 민영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 본인의 얼굴도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관객은 정희의 그림 속 민영의 얼굴을 보며 자신의 외로움도 이해받을 수 있으리라는 작은 위로를 얻는다. 또한 누군가의 방문에 민영이 고개를 돌아보는 장면은 이 영화를 민영의 관점에서 다시 보도록 만든다. 영화의 러닝 타임 동안 관객은 정희의 시점에서 정희가 민영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이 영화를 감상했다. 그러나 민영이 뒤를 돌아보는 장면을 기점으로 관객은 민영의 시점에서 정희가 민영을 찾아오는 이야기로 이 영화를 다시 감상하게 된다. 따라서 '성적표의 김민영'의 마지막 장면은 영화를 두 번 시작하는 탁월한 엔딩으로 손색없다.


 청소년과 청년을 다루는 많은 텍스트들은 흔히 성장일기를 표방한다. 반면 '성적표의 김민영'에서 성장을 찾기는 어렵다.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정희의 말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정희에게는 그 어떤 때도 찾아오지 않는다. 드라마틱한 관계의 회복이나 진전도 이뤄지지 않는다. 영화는 한발 물러난 채 인물들의 말과 행동, 그리고 보이지 않는 마음까지 그저 들여다보기만 하는 관찰일기가 되길 택한다. '성적표의 김민영'은 무엇 하나 알아내지 못하는 실패한 관찰일기이자 인간이 평생에 걸쳐 헤쳐나가야 할 외로움과 혼자됨의 프롤로그다. 비록 누군갈 관찰하는데 실패했대도 '알 수 없음'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누군가의 어떤 것은 영영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건 고독을 이겨내는데 몹시 필요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최악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