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
2021년 윤여정 배우가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으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슴이 웅장해지는 경험을 선사했던 영화 미나리를 이제서야 보았다. 코로나 이후 웬만한 영화는 넷플릭스 안방극장에서 보고 있는데, 최근에 업로드가 되었는지 추천 목록에 뜨기 시작했다. 마침 각막염으로 안약과 인공눈물을 잔뜩 처방받아 온 참이라 영화나 한편 보며 휴식을 취해 보기로 했다.
영화는 1980년대 미국으로 이민 온 젊은 부부 조셉과 모니카, 그리고 그들의 어린 자녀인 앤과 데이빗이 아칸소 주에서 농장을 개척하며 겪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캘리포니아에서 병아리 감별사로 일하던 조셉과 모니카는 아이들을 데리고 아칸소 주로 이사를 한다. 아메리칸 드림에 도전하기 위해 조셉은 은행 대출을 받아, 땅 주인이 자살하는 바람에 아무도 사려하지 않는, 50 에이커의 농지를 구매한 것이다.
캘리포니아에는 한인뿐 아니라 아시아계 이민자들도 많지만 아칸소는 외지인이 별로 드나들지 않는 작은 주이다. 이민자는커녕 유색인종 자체가 드물다. 빌 클린턴이 아칸소 주지사를 거쳐 미국 대통령이 되지 않았더라면, 한국에서 아칸소 주의 존재를 아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조셉의 가족이 터를 잡은 곳은 아칸소 안에서도 아주 외딴 마을. 병원까지는 차를 타고 한 시간이나 가야 하는 데다가 이웃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도 별로 없다. 더구나 네 식구가 생활해야 할 집은 토네이도가 오면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릴 트레일러 하우스다.
조셉은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강하다. 자신을 믿고 미국으로 건너온 아내와 자식들에게 뭔가 이루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뼈가 부서지도록 일을 한다. 조셉은 무엇이든 남에게 의지하기보다는 혼자 힘으로 해결하고자 한다. 독립적인 성격 때문이기도 하고, 경제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마도 이민을 오기까지 또는 이민자로서 정착 초기에 배신과 사기를 당한 경험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병아리 감별사로 일하고 있는 부화장에서도, 모니카에게 친구를 만들어 주러 나간 교회에서도 조셉은 관계 맺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조셉의 땅은 비옥하긴 하지만 농업용수조차 확보되지 않은 상태다. 돈을 내면 수맥을 찾아 주겠다는 사람을 물리치고 조셉은 자신의 직관에 따라 땅을 파서 물을 찾는 데 성공한다. 크게 자신감을 얻은 조셉은 과감하게 농기계를 구매한다. 그러나 아무리 농기계가 있다 한들 그 넓은 땅을 혼자 일구는 것은 무리. 다행히 농기계를 배달하러 온 이웃의 폴이 일손을 거들겠다고 나선다. 초라한 옷차림과 형편없는 위생 상태, 일요일이면 교회에 가는 대신 십자가를 매고 고행을 하며, 귀신을 쫓는다고 엑소시즘을 행하는 폴이 조셉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대안이 없었던 조셉은 폴의 도움을 받아 밭을 갈고 모종을 심고 농장을 일궈 나간다.
조셉이 농장 일에 매진하는 동안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모니카는 열악한 생활환경 때문에 불만이 많다. 집의 일차적인 기능은 비바람을 막아주는 것일진대, 트레일러 하우스는 그 기본적인 역할조차 하지 못한다. 아직 어린 앤과 데이빗은 주변에 친구를 맺을 또래도 없고, 롤 모델이 되어줄 어른도 없다. 농장에서 수확이 나올 때까지는 모니카가 병아리 감별사로 일을 해야 하는데, 집을 비운 동안 도와줄 베이비시터를 구할 수도 없다. 이렇게 고립된 삶을 견디기 힘든 모니카는 남편의 꿈을 응원하기보다 도시로 나가고 싶어한다.
조금의 여유도 없이 간신히 버티며 살아가는 이 가족에게서는 웃음소리 한번 들리지 않는다. 부부 간의 대화도 거의 없고, 앤과 데이빗이 즐겁게 노는 장면도 볼 수 없다. 이 집의 분위기를 묘사하는 단어들을 나열해 보자면, 긴장, 불안, 위태로움 등이 될 것이다. 특히나 둘째인 데이빗은 선천적으로 심장에 구멍이 있어 언제나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조셉의 광활한 농장에서조차도 마음껏 뛰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데이빗 뛰지 마"가 이 집에서 가장 자주 들려오는 말이다. 이렇게 긴장만이 감도는 네 식구에게 숨 쉴 틈을 가져다준 것은 서울에서 날아온 모니카의 어머니(윤여정)이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어디든 가고 무엇이든 하는 K-어머니답게 할머니는 장시간의 비행에도 불구하고 지친 기색 하나 없이 환한 얼굴로 등장한다. 칙칙하기만 한 트레일러 하우스에 물방울 무늬가 선명한 진주빛 블라우스를 입고, 빨간 립스틱을 바른 할머니의 대비가 인상적이다. 거대한 이민가방 속에는 고춧가루, 멸치 같은 식재료는 물론, 녹용까지 넣었다는 한약재와 모니카를 위한 비상금 봉투도 들어있다. 어쩌면 평생을 모아 온 전재산일지도 모를 두툼한 봉투를 딸을 위해 선뜻 내놓는 할머니는 바퀴 달린 집도 재미있고 좋다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낯설어하는 손주들에게도 먼저 다가가 이쁘다, 괜찮다 다정한 말을 건네고, 막말과 쌍욕이 난무하는 고스톱을 가르치고, 집 근처 개울가에 미나리 씨앗을 뿌리며 집안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할머니가 가져온 이상한 맛의 한약을 매일 마셔야 하는 데이빗은 어느날 약을 몰래 버리고 그릇에 자기 오줌을 담아 할머니에게 음료수인 척 내밀어 마시게 만든다. 화가 난 조셉은 데이빗에게 무릎 꿇고 앉아 팔을 들게 하는 한국식 훈육을 한다. 그것도 모자라 회초리를 가져오라며 호통을 치는데, 데이빗이 넘어지는 바람에 회초리가 부러지고 만다. 조셉은 나가서 회초리를 새로 구해 오라고 하는데, 이 과정에서 할머니는 시종일관 데이빗 편을 든다. "아이니까 그렇지." "오줌 좀 먹는다고 뭐 대수냐. 난 재밌고 좋았다." 새 회초리를 구하러 나갔던 데이빗이 한참 만에 강아지풀을 하나 꺾어서 나타나자, 할머니는 박장대소를 하며 "아이고 똑똑한 놈! 네가 이겼다!!!"는 말로 상황을 종결시켜 버린다. 이때부터 데이빗은 너른 할머니의 품을 느끼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싶다.
영화는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전형적인 구성을 갖고 있지 않다. 초반부터 주인공 가족이 이런저런 위기를 너무 많이 겪다 보니, 정작 가장 큰 위기에 해당하는 사건이 터졌을 때도 그냥 수많은 위기 중에 하나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이민자의 삶이 (그리고 우리 모두의 삶이) 그렇게 끝없는 위기의 연속인지도 모르겠다. 또 음악이나 편집이 무미건조한 편이라 이야기의 흐름을 드라마틱하게 안내해 주는 측면은 좀 부족하다. 그래서 영화를 본 것보다는 책을 읽은 느낌이 강하게 든다.
스토리에도 군데군데 의구심이 남는 부분들이 있는데, 이는 의도한 것인지 저예산 영화의 한계인지 잘 모르겠다. 예를 들어, 캘리포니아에 살던 주인공 가족이 갑자기 아칸소로 이사를 하게 된 배경이 무엇인지, 아이들은 낮시간에 학교를 아예 가지 않는 것인지, 농작물들을 보관하고 납품하기 위한 냉장 창고와 트럭은 확보해 둔 것인지, 화재로 잃은 것은 이미 수확한 일부 농작물인지 아니면 밭 전체인지… 기사에 따르면 예산 부족으로 시나리오에 적힌 결말 부분을 아예 촬영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시나리오에는 있었지만 촬영하지 못한 다른 부분도 있지 않을까 싶다.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윤여정 배우는 왜 여우주연상이 아닌 여우조연상을 받았을까 무척 궁금했다. 포스터나 웹페이지들을 보아도 모두 윤여정 배우가 조연으로 표기되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조셉과 모니카 부부가 너무나 경직된 캐릭터이다 보니 주인공이라기보다는 배경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이 이민자의 삶을 잘 보여주기는 하는데, 관객들이 감정 이입하기는 좀 어렵지 않을까 싶다. 조셉이 농장을 혼자 일구며 경험하는 불안감과 성취감, 고뇌와 기쁨, 배신감과 좌절 등도 과묵한 가장답게 별로 표현하지 않기 때문에 공감 능력이 아주 뛰어난 관객이 아니라면 그 개척의 과정에 동참하는 기분을 느끼기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할머니 캐릭터는 다르다. 기뻐하고, 두려워하고, 절망하는 온전히 살아있는 캐릭터이다. 꼬마 데이빗도 할머니를 만나기 전에는 마음의 문을 꼭 닫고 있는 아이였지만, 할머니를 만나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아이다움을 회복하고 조금씩 성장해 가기 시작한다. 이 영화를 이민자 가정이 미국에 정착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라고 본다면 주인공은 조셉과 모니카가 맞다. 하지만 이 영화가 할머니와 데이빗의 우정과 성장에 대한 영화라면 주연은 윤여정 배우와 앨런 킴 배우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영화를 본 다른 분들의 생각은 어떤지 무척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