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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님 Oct 04. 2022

이런 이유로 글을 써도 되냐고요?

좀 허접하다고 생각되는 글이라도 계속 쓰는 이유

나이 들수록 입은 다물고 지갑은 열라고 한다. 나이 든 사람의 입에서는 지혜의 말씀이 강처럼 흘러야 할 텐데 왜 입을 닫으라는 걸까? 하고 싶은 말은 자꾸 떠오르는데, 입을 다물라니 이 답답함은 어찌하면 좋을까? 그럴 땐 조용히 앉아 글을 써 볼 것을 권한다.  



상대가 내 말을 듣기 싫어한다면 우선 내 말에 아무 영양가가 없기 때문일 수 있다. 내 딴에는 인생의 지혜라고 생각하지만, 상대가 듣기에는 흘러간 과거의 일일 뿐 더 이상 아무 쓸모가 없는 이야기일 수 있다. 나름 성공담이랍시고 얘기하지만, 상대 입장에서는 전혀 흉내도 낼 수 없는 그런 이야기일 수 있다. 예를 들어, 9수 끝에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검찰총장을 거쳐 대통령이 되신 분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당장 생계가 걱정인 젊은이에게 그분의 "끈기와 집념"을 배우라고 해 봐야 사법고시는 이미 폐지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 오래다. 더구나 평범한 집안의 젊은이들은 나날이 굽어가는 부모님의 어깨를 보며 하루라도 빨리 취업하고자 노오오오오력을 하고 있다. 9수 끝에 사시 합격이란 감동적인 인간 승리의 스토리라기보다는 팔자 좋은 어느 도련님 얘기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야기를 정 하고 싶다면, 조용히 앉아서 글로 적어보는 게 좋다. 그게 몇 명이 되었든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누군가가 그 글을 발견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읽어 줄 테니까 말이다.


다음으로 상대가  말을 듣기 싫어하는 이유는  말이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을 유발하기 때문일  있다. 내가 얼마나 아픈지, 힘든지, 괴로운지 얘기하고 싶은 마음은 나에게도 불쑥 찾아온다. 하지만, 이런 욕구를 발산할 때는 분별력이 필요하다. 사람 봐가며 적당한 타이밍에 얘기를 해야지, 아무한테나 아무 때나 그런 얘기를 하면 정말 곤란하다. 이웃에 사는 할머니  (죄송합니다) 나를 엘리베이터에서  번쯤 봤을 뿐인데, 다짜고짜 어디가 어떻게 얼마나 아픈지 털어놓기 시작하셨다. 이후로도 마주칠 때마다 아프다는 말씀을 하시니 이만저만 난처한  아니다. 안타깝게도 나의 어머니 역시 노년에 이르러서는 모든 대화가 ---신세한탄으로 흘러가는 분이었다.  마음에 여유가 있을 때는 맞장구를 치며 위로를 해드릴  있지만,  자신에게 힘든 일이 있을 때는 듣고 있기가 정말 어렵다. 이런 신세한탄과 하소연도 가급적이면 말로 하는 대신 글로 적어보자. 글을 쓰다 보면 어느새 자기객관화가 되면서 나의 고통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있게 된다. 다른 사람의 위로가 따로 필요 없어지기도 한다.

 

상대에게 흥미를 끌고 도움이 될 만한 좋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더라도, 상대방에게 들어줄 귀가 없을 수 있다. 급하게 외출 준비 중일 때, 회의 중일 때, 수업 중일 때, 운전 중일 때, 식사 중일 때, 설거지 중일 때 아무리 좋은 얘기라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시다시피 현대인의 삶은 정말 여유가 없다. 꼭 뭘 하는 중이 아니더라도 이미 누군가에게 귀를 기울일 에너지가 남지 않은 상태인 경우도 많다. 그런 사람에게 내 말을 안 들어준다고 서운해하는 대신 글을 써 보면 어떨까. 그 사람이 시간 날 때, 덜 피곤할 때 (그게 언제일지 모르지만) 읽어볼 수 있게 말이다.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를 보면 죽음을 앞둔 여자 주인공 데이지가 자신의 일기를 딸에게 읽게 한다. 딸은 어머니의 일기를 읽으면서 벤자민 버튼의 기묘한 삶에 대해, 그리고 벤자민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 깨닫게 되는데, 나는 원작에는 없었던 이 설정이 영화에는 있어서 참 좋았다. 자녀에게 들려주고 싶은 중요한 이야기가 있는데, 자녀는 아직 들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언젠가 읽을 수 있도록 글을 써보자. 나의 죽음을 앞두고 혹은 내가 죽은 뒤에, 나를 그리워하는 자식에게 꺼내서 펼쳐볼 이야기가 생긴다.




직업상 나는 적지 않은 글쓰기를 해 왔다. 그 글들은 모두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해야하는 말들이었다. 누가 읽을 글인지 정해진 상태에서, 그 사람들이 필요로 하거나 듣고 싶은 말을 그 사람들이 듣고 싶은 방식으로 쓰는 글. 말하자면 출제자의 의도에 맞춰 정답을 작성하는 그런 글쓰기였다.


연구년이라는 여유가 생기자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쓰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누가 읽든 말든 일단 막 써 나가기 시작했다. 차마 양질의 글이라고 말하지는 못 하겠다. 어떤 글은 너무 길고 지루하다. 어떤 글은 혼자 궁상을 떠는 것 같고, 어떤 글은 혼자 도취된 것 같고, 어떤 글은 혼자 잘난 척하는 것 같다. 영양가도 별로 없고, 재미도 없는, 누군가를 붙잡고 말로 하자면 썩 반가워하지 않을 그런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글쓰기가 나름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내 글의 가장 중요한 독자는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쓴 글을 반복해서 읽는 것이 재미있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어떤 사람과 서로 맞장구치며 대화하는 기분도 들고, 자기객관화를 통해서 나의 오류들이 바로잡히기도 한다. 만약 내 글쓰기에 발전이 없이 이 수준에 계속 머문다 해도 글쓰기를 시작한 것은 여전히 잘한 일이다.


지하수를 펌프로 처음 퍼올리면 한동안 흙탕물이 나온다. 인내심을 가지고 조금 더 퍼올리면 이내 깨끗한 물이 나온다. 나는 나의 글쓰기도 그런 과정을 거치는 중이라고 믿고 싶다. 사실상 처음으로 하고 싶은 말을 써보는 것이니 한동안은 너저분한 글들이 나오는 게 당연하다. 지저분한 물을 다 흘려보내고 나면 이내 맑은 물이 나오는 것처럼 나도 곧 읽을 만한 글을 써내리라 믿어본다. 앞으로도 계속 흙탕물만 나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일단 접어두기로 한다.


언제나 감탄을 자아내는 멋진 글을 쓰는 작가님들도 한때는 이런 생각으로 초보적인 글을 썼는지, 그랬다면 흙탕물이 끝나고 마침내 맑은 샘물 같은 글을 쏟아내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 궁금해진다.



이미지 출처: https://unsplash.com/@thoughtcata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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