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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Oct 03. 2024

그대들, 어디서 치유될 것인가?

'리틀 포레스트'와 '퍼펙트 데이즈'가 전하는 자연의 노스탤지어에 관해.

어떻게 매일매일 이렇게 행복할 수 있는 걸까? 나만 심심한 거야? 나만 불행한 거야? 나만 평범한 거야? SNS를 가득 채운 타인의 삶은 매일 같이 흥미진진하다. 그런데 정말 다들 그렇게 행복한 걸까? 나만 그저 그런 삶을 살고 있는 걸까?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라는 유행어처럼 다들 삶에 치여서 일상을 돌보는 것도 버거울 줄 알았더니 나만 그랬던 걸까? 


지난 2022년 미국 아칸소대학교에서는 18세에서 30세 사이의 젊은 성인을 대상으로 SNS 사용과 우울증의 상호 작용을 연구한 논문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SNS를 많이 사용할수록 성격 유형에 관계없이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훨씬 높고, 신경증이 심한 사람이 하루에 300분 이상 SNS를 사용할 때 신경증이 낮은 사람보다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두 배나 높다고 한다. 현실이 우울할수록 가상의 행복을 전시하고 탐닉하다 끝내 더 깊은 우울에 빠져드는 것이다. 일종의 악순환이다. 


허상 같은 행복에 발목을 잡히듯 우울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각박한 도시에서 벗어나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도모해야 하는 걸까? 그것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도시에서 벗어났다 하여 자연이 늘 정답은 아닐 것이다. 그게 어디든 결국 자리하는 곳에서 최선을 다해 존재하기 위한 노력과 정성을 기울이는 수밖에 없다. 각박하고 바쁜 도시를 벗어난다 해도, 혹은 그 도시에서 매일을 각오한다 해도, 그 하루하루를 계절처럼 받아들이며 강물처럼 흐르듯 살아갈 수 있다면 될 일이다.

작은 숲으로 자라 끝내 뿌리내린 삶

“나 배고파서 내려왔어.” 혜원(김태리)은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왔다.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남자친구와 함께 임용고시를 준비했지만 남자친구만 붙고 자신은 떨어졌다. 고향을 벗어난 적이 없다는 친구 은숙(진기주)은 오랜만에 재회한 혜원에게 ‘배 아파서 잠수 타러’ 고향에 왔냐고 말한다. 하지만 혜원은 ‘배고파서’ 내려왔다고 말한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인스턴트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던 서울에서의 삶은 혜원의 허기를 채우기엔 부족했다. 그래서 고향에 내려와 자연에서 재배하고 자라난 식재료로 직접 만든 음식을 해 먹으며 허기를 채운다. 그리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님의 농사를 돕고 과수원을 운영하는 재하(류준열)와 은숙과 어울리며 마음의 허기도 다스린다. 그러다 문득 오래전 사라진 엄마(문소리)와 엄마가 해주었던 음식을 떠올리며 미움인지, 그리움인지 모를 감정을 느낀다.


일찍이 일본에서 영화화된 바 있는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둔 <리틀 포레스트>는 한국의 사계절과 그 풍경 속에서 자라는 것으로부터 회복하는 삶에 관한 영화로 거듭났다. 원작 만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요리는 실제로 작가가 직접 만들었던 경험을 바탕에 두고 있다고 하는데 <리틀 포레스트>에 등장하는 요리는 모두 주연을 맡은 김태리가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다만 원작 만화와 달리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는 육류가 들어가지 않은 채식 위주의 음식만 등장한다. 영화를 연출한 임순례 감독의 채식주의자 성향이 반영된 것이라고 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음식은 총 16가지로 눈 속에 파묻힌 겨울배추로 만든 배추 된장국과 밀가루 수제비, 취나물과 사과꽃 가니시를 얹은 파스타, 오코노미야키를 응용한 것으로 보이는 양배추 빈대떡 등 다양한 채식 메뉴들이 침샘을 자극한다. 자연에서 온 것으로 차린 한 상이 이처럼 무궁무진하게 식욕을 당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는 발견의 영화일 것이다.


무작정 떠난 엄마와 무작정 돌아온 혜원은 고모(전국향) 말처럼 빼다 박은 모녀다. 몸이 좋지 않았던 아빠의 요양을 위해 내려온 아빠의 고향에서 끝내 아빠 없이 엄마와 정착하게 된 혜원은 아빠의 고향에서 나고 자란 자연이 주는 것을 먹으며 자랐다. 결국 그렇게 끊임없이 허기를 채워주는 자연의 품 안에서 자라난 작은 숲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혜원이 도시에서 배가 고팠던 건 착각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허기는 자신이 머물러야 하는 터전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본능의 각성 아니었을까? 유년시절부터 남기거나 버릴 것 없이 허투루 주지 않는 자연의 비호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이가 결국 찾아가야 할 계절을 회복하고 순환하는 이치 속에서 살아간다. <리틀 포레스트>는 그렇게 일찍이 작은 숲처럼 자라난 이가 비로소 돌아와 다시 뿌리내리는 삶을 마주하는 낙낙함과 포만함의 영화다.

오직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코모레비

어슴푸레 날이 밝아오는 이른 아침, 창밖으로 빗자루질을 하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깬 히라야마(야쿠쇼 코지)는 지체 없이 몸을 일으켜 바닥에 놓인 이부자리를 정리한다. 이윽고 양치를 하고 가볍게 수염을 정리하고 세수를 마친 그는 분무기로 화초에 물을 준 뒤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선다. 문 앞 선반에 가지런히 정리된 필름 카메라와 지갑과 열쇠와 동전을 챙겨 문을 열고 나와 밝아오는 하늘을 올려보며 미소를 짓더니 집 앞 자판기에서 캔 커피를 뽑아 들고 차에 오른다. 그리고 운전을 하며 들을 카세트테이프를 고른 후 시동을 걸고 음악을 들으며 일터로 나아간다. 서서히 어둠이 걷히는 세상 위를 음악과 함께 내달리며 본격적인 하루를 시작한다. 그가 당도한 곳은 어느 공중화장실 부근, 그는 도쿄 시부야 지역의 공중화장실을 청소하고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


독일의 거장 감독 빔 벤더스가 일본 도쿄를 배경으로 연출한 <퍼펙트 데이즈>의 히라야마가 청소하는 도쿄의 공공화장실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2020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해외 방문객에게 도쿄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안겨주겠다는 취지에서 일본의 내로라하는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이 대거 참여한 ‘도쿄 토일렛(The Tokyo Toilet) 프로젝트’를 통해 새롭게 재단장한 공공화장실인 것. 하지만 2020년에 열리지 못한 올림픽은 2021년 무관중 개최가 확정됐다. 프로젝트의 취지가 무색해진 가운데 이를 알리고자 빔 벤더스에게 이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단편 연작 연출을 의뢰하지만 도쿄의 공공화장실을 둘러본 그의 생각은 달랐다. 그에게 도쿄의 새로운 공공화장실은 가슴이 아플 정도로 아름다웠기에 단순한 소개나 설명을 넘어 의미와 목적을 가진 이야기의 거점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공공화장실을 청소하는 남자에 관한 영화 <퍼펙트 데이즈>가 시작된 것이다.


히라야마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자전거를 타고 동네 목욕탕에 가서 개운하게 목욕을 하고 인근의 단골 가게에서 하이볼 한 잔을 곁들여 요기를 한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이불을 펴고 누워 바닥의 스탠드를 켜고 책을 읽다가 잠이 오면 책을 놓고 불을 끄고 잔다. 이렇듯 매일매일 반복적인 일상을 물 흐르듯 이어가는 히라야마의 삶이 늘 동일한 것만은 아니다. 예기치 못한 불청객이 끼어들며 일상의 평온을 흔들기도 하고, 예상할 수 없는 과거의 심연이 불쑥 머리를 들고 평정을 흩트려 놓기도 한다.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을 것 같은 매일매일의 평온과 평정이란 당연하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안간힘을 써서 유지해야 하는 외줄 위의 균형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히라야마는 누구보다도 우연의 신비를 믿는 사람이다. 그는 매일 틈틈이 ‘코모레비(木漏れ日)’를 즐긴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라는 의미를 가진 코모레비는 언제나 늘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결코 같은 코모레비는 없다. 히라야마는 늘 그 순간을 올려다보며 미소 짓는다. 언제나 같은 순간이란 없다. 늘 거기 있는 나무도 언제나 늘 같은 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다. ‘다음은 다음, 지금은 지금’이라는 대사처럼.

리틀 포레스트
퍼펙트 데이즈

자연과 숲이란 치유의 고향

사실 도시에서 자란 이들에게 자연이란 생경한 이치일 것이다. 빌딩숲과 진짜숲은 완전히 다른 세계다. 태생적으로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에게 그것은 아주 잠깐의 볼거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초에 거기서 태어나지 않았던 이들도 그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안다. 신비롭고 영험하다고 느끼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태초에 우리 모두의 태어남도 그러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 고유한 신비이자 영험이었다. 하나 같이 자연에서 온 존재다. 그리고 언젠가 그리로 돌아갈 것이다. 결국 삶이 죽음으로 회귀한다는 건 우리의 삶도 끝내 자연으로 돌아갈 운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숲을 그리는 나무의 마음처럼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삶이란 태생적으로 뿌리내린 회귀의 본능 아니었을까? 결국 자연과 숲은 늘 치유의 고향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 혹은 삶의 끝에 다다르는 순간에도.


(한국수목장문화진흥재단에서 발행하는 소식지 '기억과 숲' 가을호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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