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인간시대

뉴스 앵커 한민용 인터뷰

사회부 기자이자 뉴스 앵커인 한민용의 믿음과 낭만에 관한 대화.

by 민용준

배부른 만삭의 뉴스 앵커로 자리를 지키며 가능한 변화의 첫 페이지를 열 수 있었던 건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서 한때는 잃었던 믿음도 되찾았다. 믿었던 길로 나아가 손을 내밀 수 있었기에 되찾은 낭만, 기자 한민용은 다시 믿는다.

YS_0320_F2.jpg

일단 임신 축하드립니다. 출산 준비를 위해 휴직 중이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합니다.

<뉴스룸> 마지막 방송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기분이 이상했어요. 13년간 쉴 새 없이 일해온 방송사에서 이탈한다니 조금 두려웠죠. 그런데 한편으로는 자유롭더라고요. 뉴스 앵커는 조심스러운 자리거든요. 하지만 이제 소소하게 머리를 기르거나 스타일을 바꿀 수도 있고, 한동안 만나기 힘들었던 친구와 약속도 잡고, 일하느라 바빠서 미뤄둔 일을 하나하나 즐겁게 해보고 있어요. 게다가 새 책도 나와서 관련 활동을 하다 보니 은근히 바빴어요.


지난 8월에 발간한 <매일 뉴스로 출근하는 여자>는 방송 기자와 뉴스 앵커라는 직업에 관한 에세이집이지만 개인적인 소회도 많이 담겨있더군요. 스스로 얼마나, 어디까지 드러내야 할지 고민이 많았을 거 같아요.

이 책을 쓴 건 제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용기와 위안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쓰다 보니 처음에는 쓸 생각이 없었던 사연까지 털어놓게 되더라고요. 사실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걸 그리 즐기진 않아요. 그래서 고민이었죠. 그런 부분을 덜어내면 다른 누가 썼다 해도 상관없을 책이 되겠더라고요. 그렇다면 제가 원하는 만큼 사람들에게 가 닿기 어려울 테니 용기를 내봤어요. 그러다 출판 직전에는 출판사에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말할까 고민할 정도였죠. 정말 친했던 친구에게만 털어놓았거나 가족에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도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지인이나 직장 동료에게는 책을 못 주겠더라고요.(웃음)


지난 8월 1일 <뉴스룸> 마지막 진행날 ‘배부른 앵커를 향해 보내주신 큰 응원과 격려도 감사합니다’라는 클로징 멘트를 남겼습니다. 책에서도 동료들에게 각별한 고마움을 표하기도 했는데 어쩌면 임신 후 뉴스를 진행하면서 함께한다는 사실을 더욱 실감하게 된 건 아닐까 궁금하더군요.

사실 늘 느끼는 부분이죠. 뉴스 화면에는 앵커만 나오지만 뉴스를 만들기 위해 많은 동료들이 고군분투하는 걸 잘 알고 그에 대한 고마움이 늘 있어요. 다만 새롭게 느낀 부분도 있어요. 임신한 뒤 건초염이 생겼는데 증상이 심했어요. 손을 쓰지 말라고 하는데 멘트도 계속 써야 되고, 앵커로서 그럴 수는 없잖아요. 게다가 원고를 넘길 때 엄지손가락을 써야 하는데 너무 아픈 거예요. 물병 뚜껑도 못 따겠더라고요. 그런데 현장 스태프가 살뜰하게 챙겨줬어요. 먼저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다가와 원고를 정리해 주고 그랬죠. 그리고 배부른 앵커는 처음이라 옷을 어떻게 입혀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나름대로 단정한 느낌을 주기 위해 모두가 함께 고민하고 노력해줬어요. 뉴스를 진행하는 입장에서 마냥 편하게 입을 수는 없으니까요. 첫 임신이라 모르는 게 너무 많은데 임신 경험이 있는 선배나 스태프분이 먼저 요령을 알려주시고, 정말 고마웠죠.


처음이 있다는 건 두 번째, 세 번째로 이어질 가능성이 열렸다는 의미이기도 하죠. 그런 의미에서 나름의 책임감을 느낀 바는 없었을까 궁금합니다.

처음 임신 소식을 접했을 때 그려본 그림이 있어요. 배부른 여자 앵커가 뉴스의 문을 여는 모습을 시청자에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여성으로서 메인 앵커가 된 건 제가 처음이 아니지만 임신해서 배부른 앵커로서는 처음이었죠. 그게 이상하지 않고,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한번 틀을 깨면 그다음은 더 쉬운 법이니까요.

주말 <뉴스룸>을 여성 앵커 단독으로 처음 진행한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습니다. 분명 좋은 기회였지만 잘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도 상당했을 거 같아요.

당시에는 흔한 일이 아니었잖아요. 저희 회사에서도 처음이었고요. 그렇다고 제가 특별히 여자들을 대표하는 입장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다만 문을 닫고 나오는 입장이 될 수는 없었죠. 한번 잘해보라고 여자 앵커 혼자 세워줬더니 하는 게 영 별로라는 평가를 받아서는 안 됐어요. 그렇게 실패하면 저 혼자만의 실패라고 여길 수 없으니까요. 적어도 후발 주자가 될 수 있는 다른 여자 앵커들의 기회를 박탈한 사례가 되면 안 될 일이었죠. 다행히 저 이후로도 주말 <뉴스룸>은 계속 여자 앵커 단독 체제를 유지하고 있어요. 언젠가 바뀔 수도 있겠지만 최초라는 것보다 마지막이 아니었다는 게 자랑스러워요.


뉴스 앵커라는 자리는 애초에 생각해본 적도 없었던 거 같더군요.

전혀요. 스스로 취재형 기자라고 생각했고 선배들도 다 그렇게 여겼죠. 전 직장인 MBN 동료들도 제가 앵커를 할만한 자원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을 거예요. 심지어 5년 차에 JTBC로 옮기기 전까진 메인 뉴스 스튜디오에도 가본 적 없었어요. 방송형 기자라고 평가받지 못한 거죠. 저도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고요. 그러니 참 신기한 일이죠. 무슨 일인가 싶기도 하고. 과거에 제가 상상했던 미래에 지금의 저는 없어요. 남들 앞에 나서는 것도, 사진 찍히는 것조차도 싫어할 정도로 내성적인 편이었기에 부모님도 신기하게 생각하죠. ‘네가 카메라 앞에서 뉴스를 진행한다니.’(웃음)

YS_0496_F2.jpg

고등학생 진학을 앞둔 상황에서 어머니께서 중국 유학을 권했다고 하더군요.

사실 그때가 중국 유학 붐이 일었던 시절이었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에도 사교육을 받지 않고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건 어렵다고 여기는 시기라 부모님께서 차라리 중국으로 보내는 게 나을 거 같다고 판단하신 거예요. 한국보다 중국 학비가 더 쌌거든요. 그리고 중국어를 잘하면 먹고살기 유리할 거라 여겼고요. 실제로 중국 유학을 가는 학생이 정말 많은 시절이었어요.


어린 나이에 낯선 이국에서 혼자 살아야 한다는 게 두렵진 않았나요?
해외에 대한 환상이 있었나 봐요. 그전까지 비행기 한 번 못 타봤고 제가 살던 수유리 빨래골도 서울 외곽에 있었거든요. 좀 더 넓은 세상을 동경한 거 같아요. 어린 나이에 유학이라는 단어가 멋지다고 느끼기도 했고, 정말 뭘 모르고 갔죠.(웃음) 지금처럼 그렇게 고생할 걸 다 아는 입장이었다면 절대 안 갔을 거예요. 철없는 어린 마음에 외국에 나가 혼자서 산다는 게 마냥 좋아 보인 거죠.


일찍이 그만한 호기심이 있었으니 가능한 일이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이렇게 내성적인 성격에 기자 생활을 할 수 있는 것도 호기심 덕분일 거예요. 말하지 않으려는 상대를 계속 찾아가 물어보고, 부탁하고, 취재할 때는 종종 누군가를 괴롭힐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제 성격을 아는 이들은 네가 그걸 어떻게 하냐고 묻는데 그 모든 걸 이겨내는 궁금증이 있으니 가능한 거죠.


기자나 앵커로 일하면서 스스로 달라진 면은 없을까요?

있는 거 같아요. 처음에는 카메라를 보는 게 어색하고 낯설어서 힘들었거든요. 그런데 능숙한 선배들은 카메라가 주는 긴장감을 즐기는 거 같더라고요. 저는 그게 어려웠거든요. 그래서 이 상황을 즐겁게 받아들이자고 마음먹고 변화한 부분도 있는 거 같아요. 제 자신을 대중 앞에 드러낸다는 것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고요. 기자들은 보통 기사로 말한다고 하잖아요. SNS로 사생활 같은 걸 드러내지 않는 게 미덕이라고 여기는 분들도 있고, 저도 그렇게 생각했던 편이에요. 그런데 앵커가 된 이후로 한 선배가 저에게 이제 사람들이 좀 알아보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아니라고 했더니 몇 달 뒤에 또 같은 질문을 주셨어요. 그래서 역시 아니라고 했더니 대뜸 “그럼 너한테 문제 있는 거 아니야?”라고 하시더라고요. 대중에게 그만한 존재감이 없는 앵커라면 좋은 앵커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때는 그런가 싶었는데 점점 그 말을 곱씹게 되더라고요. 사람들이 특정 앵커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를 신뢰한다면 그가 진행하는 뉴스에 대한 믿음도 커지겠죠. 그렇게 생각해 보니까 제가 믿을만한 사람이라는 걸 드러내는 일도 필요하다는 걸 알았어요.


최연소 메인 앵커, 최초 평일 여성 메인 앵커 등 ‘최초’나 ‘최연소’ 같은 수식어가 대단하지만 생각지 못한 자리에 앉게 된 입장에서는 시행착오를 감내하는 노력이 상당했을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그 정도로 못하는 줄도 몰랐어요. 그 정도로 보는 눈도, 듣는 귀도 없었던 거죠. 기자 출신이니까 아나운서만큼 자연스러울 수는 없는 게 당연하다고도 생각했고요. 하지만 시청자분들이 보기에 이상하다면 시정해야 할 일이죠. 그래서 빨리 보완하고자 정말 많이 노력했어요.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다른 앵커분들의 멘트를 외국어 공부하듯이 따라 했죠. 그러니까 조금 알겠더라고요. 저마다 어디서 호흡을 끊는지, 어미 처리는 어떻게 하는지 파악하면서 제 스타일을 만들어갔어요. 정말 열심히 했어요. 그래서 저에게는 재능의 유무보단 시작했다는 사실 자체가 더 중요하게 다가오는 거 같아요.


“무슨 일 하세요?”라는 질문에 대한 정답은 ‘뉴스 앵커’나 ‘기자’가 아니라 ‘사람을 설득하는 일’이라고 책에 기술돼 있습니다. 뉴스 앵커나 기자가 아니라도 사람을 설득하는 일을 꾸준히 하고 싶다는 말처럼 읽히더군요.

요즘은 시대가 정말 빠르게 변하잖아요. 최근 장강명 작가님이 쓴 <먼저 온 미래>를 재미있게 읽었어요. 알파고와의 대국 이후로 바둑계가 그렇게 변할 줄 아무도 몰랐듯이 언론이나 미디어 업계도 유튜브와 OTT의 영향력이 이렇게 커질 거라 쉽게 예상할 수 없었죠. 이렇듯 시대가 빠르게 바뀌는 상황에서 기자나 앵커처럼 명사형으로 정의한 직업과 다른 답변이 필요하다고 느낀 거죠. 실제로 기자나 앵커라고 자기 직업을 소개하는 사람들도 자기 직업에 대해 생각하는 바는 각기 다를 수 있잖아요. 그래서 제가 찾은 건, 사람을 설득하는 일이라는 동사형으로 직업을 표현하는 것이었죠. 그리고 언젠가 은퇴할 날이 오거나 이 일을 그만둬야 한다면 그 이후에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몰라도 결국 사람을 설득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요. 다만 그때에는 그런 일을 하는 직업을 어떤 명사로 부를지 모르겠어요.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하니까요.


그렇다면 무엇을 설득하고 싶은 걸까요?

‘살만한 세상’이라는 말을 좋아하고, 이 말에 동의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가 되길 바라죠. 그래서 합리적으로 설득해보고 싶어요. ‘한민용의 오픈마이크’라는 코너를 진행할 때에도 막연하게 약자를 도와야 한다는 식의 구호를 외치고 싶진 않았어요. 적어도 우리가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 사회가 결식아동들에게 밥을 먹일 수 있는 수준은 충분히 되지 않았는가, 이렇게 구체적으로 설득해보고 싶었죠. 이런 설득에 동의하는 분들이 늘어나면 확실히 살만한 세상이 되는 거니까요.

YS_0687_F2.jpg

<뉴스룸> 주말 앵커 시절 직접 진행하는 코너 ‘한민용의 오픈마이크’로 주목받았습니다. 직접 취재를 하는 앵커 코너는 희귀하니까요. 아무래도 본인의 의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죠.
앵커가 직접 진행하는 코너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어요. 단순히 뉴스를 전하는 역할을 넘어 시청자분들에게 인식을 심어줄 캐릭터로 구축하겠다는 내부 야심이 있었던 거죠. 이를테면 앵커의 한 마디 같은 식으로 화두를 던지는 코너를 만들고자 했던 거예요. 일종의 신문 사설 같은 거죠. 그런데 저처럼 어린 앵커가 그런 말을 하는 입장이 되면 어색할 거 같아서 제가 하고 싶은 걸 해보겠다고 제안했어요. 한 번도 뉴스 주인공으로 여기지 않던 이들에게 직접 마이크를 건네고 싶었죠. 내부에서는 시청자들이 좋아할 방향은 아닌 거 같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제 의지가 강하니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어요. 그래서 열심히 했죠.


앵커 이전에 취재 현장을 좋아하는 기자였기에 가능했던 일 같기도 합니다.

취재를 좋아해요. 앵커로서 현장 취재까지 하는 건 굉장히 힘들었지만 현장에서만 들리는 이야기가 있고 두 눈으로 봐야 느껴지는 게 있거든요. 직접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고요. 게다가 사회부 기자로서 취재했던 문제들을 단순히 알리는 것을 넘어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다고 설득하는 데 집중해보고 싶었어요. 나름 앵커 코너라 제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는 권한도 강했기 때문에 자주 보도했지만 좀처럼 바뀌지 않는 문제를 제대로 건드려보자고 욕심을 내고 공을 들였어요. 사실 처음 기자가 됐을 때에는 펜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지만 기자 생활을 하면서 그 믿음이 많이 사라졌거든요. 그런데 오픈마이크를 통해 실제로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변화가 가능하다는 걸 느끼면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도 나름대로 회복한 거 같아요.


사회부 기자라면 취재차 찾아가 만나야 하는 사람도 많고,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감당해야 할 텐데 때때로 관계에서 동떨어져 혼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까요?

저는 에너지 레벨이 낮은 편이예요. 쏟아부을 수 있는 에너지의 총량이 되게 적거든요. 인간관계가 넓지도 않고, 관계를 넓히길 즐기는 성향도 아니고요. 그래서 혼자 있는 시간을 잘 보내는 게 늘 중요했어요. 주말이나 휴일에는 어지간하면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편이죠. 혼자 여행 가는 것도, 영화 보는 것도 좋아해요. 결혼하기 전에는 대체로 그랬죠. 그래서 혼자 있을 때 늘 바빠요.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공연도 보고, 일기도 쓰고, 정말 다양한 일을 하면서 혼자 있는 시간을 가장 잘 보내는 거 같아요.


유튜브나 SNS 같은 뉴미디어가 방송사 기반의 레거시 미디어를 위협하는 시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방송사에 소속된 언론인으로서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시나요?

레거시 미디어의 한계에 대한 논의는 정말 오래됐죠. 그런데 유튜브에도 문제가 있잖아요. 유튜브 알고리즘이 내가 보고 싶은 것만 추려서 보여주고,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만드는 확증 편향을 유도하는 성향이 강하다는 건 일찍이 제기된 문제이니까요. 필터 버블에 갇히는 거죠. 하지만 많은 분들이 유튜브로 뉴스를 접하는 시대이니 레거시 미디어 종사자들의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집중해야 할 거 같아요. 특히 이번 12·3 비상계엄은 레거시 미디어가 여전히 필요한 이유를 알려준 사건이기도 하고요. 그날 밤에는 아무리 유명한 정치 유튜버도 지금 당장 대한민국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기 어렵고,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종합적으로 판단하기 힘들었을 거예요. 레거시 미디어는 가능한 일이었죠. 다양한 현장에 기자들을 파견하고 중계차로 연결해 모든 현장을 보여주고 취재를 통해 상황의 배후 사실을 밝혀내는 역할을 빠르게 도모할 수 있는 건 레거시 미디어라서 가능한 일이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런 일을 잘 해내는 게 레거시 미디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어요. 방송 뉴스가 유튜브보다 지루하거나 따분하다고 평하는 분들이 많아도 팩트를 민감하게 다루고, 균형 잡힌 시각으로 품위 있게 전달하는 방식은 끝내 중시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것이 레거시 미디어의 분명한 존재 이유인 거죠.


실제로 계엄사태 이후 <뉴스룸>을 비롯한 뉴스 시청률이 많이 올라갔다고 하더군요. 일어나선 안 될 일이 일어난 건 유감이지만 사회적 혼란이 가중될 때 뉴스의 경쟁력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일어나선 안 될 일이 일어났지만 나라에 큰일이 벌어졌을 때 사람들이 아무 채널이나 선택해서 소식을 접하는 건 아닐 거예요. 그러니까 그날 모든 방송사의 뉴스 시청률이 오른 건 아니라는 말이죠. 결국 우리가 우리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면 뉴스가 필요한 순간에 자신들이 신뢰하는 언론사를 찾아온다는 사실을 확인한 거 같아요. 그래도 우리 방송사가, 우리 뉴스가 신뢰받고 있다는 점을 확인한 것 같아서 <뉴스룸>의 구성원 한 사람으로서 뿌듯했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되찾았으니, 만약 그런 믿음을 가진 후배를 만난다면 해주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낭만을 믿으며 사는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그 낭만을 실현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거든요. 저보다 오랫동안 일해온 훌륭한 선배들을 봐도 그렇고, 제가 지나온 길을 되돌아봤을 때도 그런 거 같고요. 결국 낭만을 잃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조금이나마 실현할 가능성을 가진 것이니까, 그걸 절대 잃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네요.


사회부 기자나 뉴스 앵커로서 수많은 인사와 인터뷰를 진행해왔는데 혹시 시공간을 초월해 누구와도 만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면 혹시 만나고 싶은 이가 있을까요?
제가 모르는 어린 시절의 어머니를 만나보고 싶어요. 저희 어머니는 열심히 살아오신 분인데 원래 어린 시절에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상 어려웠다고 해요. 그래서 한평생 일해온 어머니가 어린 소녀였던 시절에 무슨 꿈을 꾸고 살았을까, 뭘 바랐을까, 그런 게 궁금하더라고요. 그래서 한 번 만나보고 싶고, 좋은 말도 해주고 싶어요.


(한화 펨테크연구소에서 발행하는 'Between' 매거진에 쓴 원고를 재편집한 글입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배우 한예리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