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에서 식전에 늘 하는 버릇이 생겼다. 식사 전에 숙소 주변 아침산책이다. 오늘도 산책을 하려고 나오니 온 세상이 은빛세상으로 바뀌었다. 히말은 산스크리트어로 눈(雪)이란 뜻인데 지금까지 제대로 눈 내리는 모습을 보질 못했다. 트레킹 후반에 히말라야의 축복이 있어 원 없이 눈을 만지며 눈길을 걸을 수 있었다. 눈은 온 세상을 은백색으로 바꿀 만큼 많이 내렸고 계속 내리고 있었다. 분위가 너무 좋아 강 건너 마을인 포르체 마을을 다녀오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카메라만 들고 나섰다. 두르코시 강이 가까워 물소리가 크게 들린다. 롯지가 있어 여름철 휴양하기 좋은 장소로 지금은 찾는 손님이 없어 한적하기만 한 마을이다. 철제 다리를 건너니 포르체로 가는 길에는 눈이 너무 많이 내려 길이 많이 미끄럽다. 조심스레 오르는데 포르체에서 살고 계시는 50대쯤 되어 보이는 남자 현지인이 우산을 들고 내려오다 눈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는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눈을 툭툭 털면서 일어나신 그분과 '나마스테'로 인사를 나누고 그분이 내려오면서 만들어 놓은 발자국을 따라 포르체 마을로 올랐다.
마을 어귀는 어김없이 불탑 타르쵸가 자리리 하고 있고 오색 초르텐이 쳐져 있다. 그 위로 눈이 소담스럽게 쌓여 있다. 꽤 큰 마을인데 인적이 뜸한 걸 보면 눈이 내려 특별히 할 일이 없는 듯하다. 눈이 내리고 있어 더욱 고즈넉한 포르체 마을의 돌담길을 따라 옛 시골 고향길을 걷듯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참 아담한 마을이다. 눈이 내리니 인적조차 없다. 히말라야 산속 마을의 풍경이 포근하다. 두르코시강의 다리를 건너 롯지로 돌아올 때까지 눈이 펑펑 내린다.
롯지로 돌아와 포르체를 다녀왔다고 하니 포터가 놀라는 눈치다. 그래서 한국에서 겨울에는 적설기 산행 때 눈이 허벅지까지 차올라도 러셀을 하면서 산행을 한다고 했더니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여기서 '예스'는 좌우로 머리를 흔들고 '노'는 아래 위로로 고개를 끄덕이는 게 우리와 반대로 의사표현 방식이다. 눈이 많이 내려서 오늘 트레킹을 할지 말지를 걱정하는 트레커들이다.
이 정도의 눈은 국내에서도 경험하였고 럿셀을 하면서 산행을 한 적이 있어 그리 걱정을 하지 않고 눈을 즐겨 보려고 포터들에게 계획대로 하산을 한다고 했다. 아침식사를 하고 배낭을 챙겨 매고 습설이라 배낭 위로 우의를 입고 출발했다. 그런데 같이 로지에 머물고 있는 유럽인들은 하늘을 쳐다보면서 갈지 말지를 여전히 고민하고 있다.
러셀은 내가 할 테니 따라오라고 하고 스페츠와 아이젠을 착용하고 앞서 걸었다. 포터들은 아이젠과 스페츠 같은 건 없고 눈이 내리면 쉬는 게 그들의 상식이다. 그래서 눈이 내리면 러셀을 할 수 있는 장비가 없는 포터들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오늘 쿰부 히말라야에서 맞이한 눈이 오히려 축복 같이 느껴졌다. 포터가 내가 입은 우의가 이상한지 양팔을 펴보라고 하며 사진을 찍어 준다. 우의가 박쥐 날개 같은 모습이다.
마치 박쥐의 날개 같은 팔의 모양이 이상해 보이는지 킥킥거리며 웃는다. 장갑은 젖지 않게 빨래하려고 준비한 고무장갑을 꼈더니 방수가 되어 좋았다. 이런 폭설 속에도 야크는 눈 속에 먹이를 구하려고 눈 속에 산을 누비고 있는 게 히말라야에 살아가기 적합한 동물이다. 다음 롯지가 있는 마을인 몽까지는 하산길임에도 오르막이 이어진다. 시간이 지나면서 눈이 점점 잦아들고 하늘이 맑아 온다.
쿰부 히말라야 지역은 눈의 나라 "설국"이다. 뒤를 돌아보면 이등분한 듯 위쪽은 구름 아래는 산으로 양분되어 보인다. 몽 마을은 고개 위의 롯지로 입구에 쵸르덴과 오색 타르쵸가 걸려 있고 눈이 그쳐 가니 눈을 치워 길을 내고 있다. 우리는 휴식을 위해 포터가 이끄는 데로 작은 가게에 들어갔다. 마침 솥뚜껑에 감자를 갈아서 부침개를 부치고 있다. 눈이 내리고 감자 부침개가 있고 이럴 때 딱 생각나는 게 이곳의 막걸리 창이다. 창을 주문하니 따뜻하게 데워서 컵에 따러 준다. 이곳은 술을 마시면 마신만큼 채워주는 게 이곳의 주법이다. 마시지 않으려면 잔을 비우고 뒤집어 놓아야 한다. 술은 역시 마시고나 알딸딸 하니 기분이 좋다.
그간 고소를 염려하여 술은 자제하였는데 이제 몽까지 내려왔으니 한잔 마셔도 될 고도이고 체력 상태도 좋다. 역시 알코올기가 온몸으로 퍼지니 기분이 좋다. 포터들도 덩달아 창을 두 잔씩 마셨다. 작은 부엌에는 장작으로 불을 지피고 있고 감자 부침개로 주인집 꼬마 딸도 부침개로 식사를 한다. 아궁이 위에는 가지 말린 것 같은 게 있다. 검게 걸려 있는 게 뭐냐고 물으니 야크 고기로 연기로 훈제하여 필요할 때 물에 불려서 사용한단다. 이게 산골의 부족한 그들의 단백질 공급원이다.
창도 한잔 했겠다. 눈도 그쳤겠다. 트레킹도 끝으로 가는 시점에 계획한 대로 트레킹도 잘했겠다. 절로 기분이 좋아 흥얼거리며 산을 내려오는데 포터들이 네팔 민요 "레썸 삐리리"를 부른다. 이 노래는 사랑의 감정을 사냥에 비유한 노랫말인데 내가 진정 쏘고 싶은 것은 사슴이 아니라 사랑하는 님의 마음이란 그런 뜻을 담고 있다. 역시 술이 있으니 마음도 여유로워지고 절로 노래도 흥얼거린다.
네팔 민요 레썸 삐리리
https://www.youtube.com/watch?v=Y3q-HBQnyNk
고산에서의 술은 조금만 오르막만 올라도 숨이 많이 가쁘다. 고산에서의 술은 그래서 절제가 필요하다. 남체로 가는 길은 캉주마를 거쳐서 가는 길이 가장 빠르지만 우리는 쿰중을 통해 남체로 가겠다고 하니 포터들이 왜 그리 돌아서 가는냐고 반대를 한다. 캉주마 가는 길은 가본 곳이고 우리는 가보지 않는 길을 가고자 한다고 하니 자기들끼리 한동안 이야기하더니 젊은 포터는 캉주마로 바로 하산을 하고 선임 포터가 함께 하며 규중으로 함께 가겠다고 한다.
규중은 남체만큼은 크지 않지만 상당히 큰 마을로 남체로 온 트레커들이 고산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남체 만 둘러보고 내려가는 나이 지긋한 트레커들이 반드시 찾는 곳이기도 하다. 내리던 눈이 안개비로 바뀌어 내리는데 안개가 짙어 시야가 멀지 않은 게 아쉬움이다. 그간 내린 눈만 보았지 눈을 맞아 보진 못했는데 처음으로 실컷 눈을 맞으면서 눈 속을 걸어 남체로 내려서는데 남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에서 사진을 찍어 보면 마치 로마 원형경기장을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하였다.
12시가 넘어 남체에 도착하니 눈은 그쳤지만 여전히 흐린 날씨다. 늘 설산 히말라야를 꿈꾸면 남체란 지명은 익히 들었지만 직접 와보니 에베레스트의 산악 전진 기지임이 틀림이 없다. 체력이 되는 트레커는 EBC, 칼라파타르, 교쿄리를 다녀 오지만 그렇지 않은 트레커들은 남체까지만 올라 주변만 둘러보고 내려간다.
남체! 이곳은 에베레스트를 꿈꾸는 산악인의 전진기지 이자 마음의 고향이다. 4월 2일 올라오면서 들리고 11일 만에 다시 찾은 남체는 눈이 내리고 날씨가 흐리며 11일 전의 따뜻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어디를 가나 한낮에는 난로는 꺼져있고 거리는 내린 눈이 녹아 질퍽하고 바람마저 불어 을씨년스럽다. 롯지 식당에서 유료 wi-Fi가 되니 오랜만에 가족과 지인 그리고 Sns로 소식을 전하며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서울과 시차가 3시간 반이다. 저녁에는 남체 거리를 둘러보았는데 트레커를 위한 장비점, 등산의류, 잡화, 야크털로 짠 방한용품 등이 많이 전시되어 있고 짝퉁인 중국산 유명 메이커도 많이 눈이 띄였는데 짝퉁인 탓에 가격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싸고 가격 대비 싼 가격이다.
산악인 마음의 고향인 남체를 내일 떠난다고 하니 언제 다시 올까 하는 기약이 없어 남체가 더욱 아쉽다. 그래서 남체 구석구석을 둘러보다가 오늘 남체에 도착한 한국인도 만났다. 그분들은 내일 하루 쉬고 Ebc로 간다고 하였다. 산을 오르는 사람과 내려가는 사람들. 내려가는 이는 아쉬움을 오르는 이는 기대감으로 오르지만 오르는 이는 고생의 문이 활짝 열렸다는 말이 더 맞는 말이 아닐까?
고산의 로지 생활은 즐거움 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기다림과 추위, 그리고 입에 맞지 않는 거친 식사와 고소증이 찾아온다. 이를 잘 이겨내야 5,000m급 고산을 오를 수 있으니 그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기에 더 높이 오르는 게 더욱 간절한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