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의 땅 나헤라

나는 누군가?

by 산달림


스페인의 한낮은 햇살이 강하다. 더워지기 전에 순례길을 많이 걸어두는 게 편하게 걷는 방법이다. 새벽잠을 줄이고 서둘러 출발을 해야 하는데 새마을 정신의 피가 흐르는 한국인이 단연 선두다. 곤함 점을 자는 순례자가 깨지 않게 조용히 침대에 내려와 배낭을 안고 1층 주방에서 배낭을 꾸려 순례길에 나섰다. 밤새 켜 둔 골목길 가로등 불빛이 잘 가라고 전송해 준다.


DSC_9283.JPG
DSC_9284.JPG
로그로뇨의 불켜진 새벽 순례길의 꼰차


더 먼저 나온 경찰청 부부와 두 여인이 걷고 있다. 로그로뇨는 꽤 큰 도시라 도시를 벗어나는데 조금 시간이 걸린다. 까미노 이정표를 찾아가면서 걷는데 앞서 가는 순례자들이 있어 그들만 따라가면서 로그로뇨를 벗어났다.

어젯밤 공립 알베르게 주방은 완전 코리아 물결로 정말 점령하다시피 했다. 송파에서 오신 나이 지긋한 어머님들 4분은 미역국을 끓여 드시고 삼겹살에 등심, 그리고 된장국도 등장하는 날이었다. 저녁식사 후 성균관에 계신 분과 한국 젊은이들이 모여 오랜만에 와인과 맥주를 마시면 순례길에 생긴 긴 이야기를 좀 늦게 까지 나누었더니 몸이 찌뿌둥하다. 만남은 좋은데 후유증이 있는 날이다.


로그로뇨 시내를 벗어나기 전 간편한 짐을 매고 걷는 남녀 순례자 상


여명이 지나고 주변이 밝아 올 때쯤 그랑지 저수지와 공원을 지나는데 이곳이 로그로뇨의 시립공원이다. 저수지 주변은 이곳도 한국과 다름없이 강태공들은 저수지에서 밤낚시를 하였는지 이른 새벽시간에도 꾼들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순례길을 걷다 보면 홀로 걷는 분도 있지만 같이 걷는 분들도 많은데 그 조합이 재미있다. 부부팀이 제일 많고 다음이 친구팀 그리고 모자, 모녀의 조합은 흔한데 부자, 부녀팀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그중 오늘은 형제팀을 만났다. 한창 일한 나이에 한 달이란 긴 시간을 형제가 함께 순례길을 걷기가 쉽지 않은데 같이 걷는 분이 있다. 형제는 용감하다. 티격태격하며 걷는 형제 모습에 우애가 부럽다.


DSC_9297.JPG
DSC_9295.JPG
형제는 용감했다. 형제 순레자 (좌) 고속도로 주변에 설치한 스페인 주류회사 광고물인 황소


지금껏 맑은 날씨라 걷기에 불편이 없었는데 오늘은 가랑비가 내려 우의를 입고 걷는데 조금은 거추장스럽다. 비가 내리니 마땅히 쉴 자리도 없어 그냥 자꾸만 걷게 되니 어깨가 점점 무거워 온다. 도중에 한 번도 쉬지 않고 점심때가 되어 쉴 곳이 없어 어느 집 처마 아래에서 로그로뇨에서 준비해 온 식은 밥으로 점심식사를 하는데 조금은 처량하게 느껴지는 건 내리는 비 탓인가? 그래도 먹어야 걷기에 도시락을 비우고 다시 걷는다.


DSC_9299.JPG
DSC_9302.JPG
한댓잠을 자고 순례길을 준비하는 순례자(조) 탠트가 든 배낭을 매고 걷는 순례자(우)


순례 일주일 되는 날인데 걷는 게 좀체 익숙해지지 않는다. 길을 걷다 보면 가끔 탠트를 지고 야영을 하면서 순례길을 걷는 순례자도 볼 수 있다. 그들은 배낭의 무게가 일반 순례자에 비해 두배는 되는 것 같다. 나름 순례길에 나서는 순례자는 다양하다. 그중 가장 빨리 순례를 끝내는 팀은 단연 자전거로 순례길을 달리는 순례자들이다. 브라질에서 온 순례자들은 자전거를 타고 빠르게 지나간다.


다행히 오후에는 비가 개여 우의를 벗고 걸으니 한결 홀가분하다. 밀밭과 포도밭이 많은 순례길이고 곳곳에 와인 양조장을 자주 만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여긴 와인의 땅이다. 스페인에 와인이 싸고 맛도 좋은 곳인 줄은 그간 알지 못했다. 포도밭의 포도나무는 줄기를 싹둑 잘라져 있다. 포도는 햇순에서 열리니 바짝 자른 것 같다.

DSC_9301.JPG
DSC_9305.JPG
와인의 땅 나헤라 가는 길에 자주 만나는 포도밭(좌) 중세 순례자 모습(우)


순례길을 걷은 이유는 무엇일까. 순례길을 걷는 이유는 각기 다양하겠지만 지금까지의 나의 모습을 반추해 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힘들게 한 달 넘게 걷다 보면 보다 객관적으로 나를 다시 바라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그간 앞만 보고 달려온 지금까지 생활은 무엇을 위해 달려왔으며 계속 그리 살아야 할까?


"나는 누군가?"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가? 누구의 남편이며, 누구의 아빠이고, 누구의 친구이고 누구의 아들이고 어느 선생님의 제자였고 어느 직장의 팀장이었던 나는 누구인가?

오늘도 나를 찾는 순례길이자만 생각만 많고 정리되지 않아 머리만 더 복잡하다. 아직 걸을 시간이 많으니 더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순례길 주변에 포도밭이 연속으로 지나간다.


DSC_9312.JPG
DSC_9313.JPG
순례길 지도 (좌)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온 할아버지 순례자(우)


나헤라는 인구 7천 명이 사는 마을로 나 헤리야 강과 팥죽 색갈이 나는 사암이 마을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데 순례길에서 조금 떨어진 시립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아직 입실 시간이 되지 않아 기다려야 한다. 90개 침상의 대형 알베르게이기에 느긋이 기다렸다가 침대를 배정받고 주방이 있는 알베르게라 식료품점을 찾으러 가는데 주변에는 없다.


DSC_9317.JPG
DSC_9319.JPG
나헤라 시립 알베르게 내부 90석의 침대


아무래도 강을 건너야 할 것 같은데 일행은 피곤하다고 강을 거슬러 올라 알베르게로 돌아가고 혼자 식품점을 찾아 걷는데 까르프 종이봉지를 들고 오는 순례자를 만나 위치를 물어 보고 찾아갔다.


조금 큰 마을엔 까르프 매장이 있어 장보기 좋은 장소다. 오늘은 오랜만에 닭볶음탕을 준비했다. 닭을 물에 깨끗이 씻어 물은 좀 넉넉히 붓고 푹 삶아 그걸 고추장에 한번 더 익히면서 볶으니 훌륭한 닭볶음탕이 되었다. 물론 감자도 몇 개 넣었다. 쌀밥과 닭볶음탕 그리고 와인이 있으니 진수성찬이 따로 없다. 나름 최고의 진수성찬이다.

멀리까지 잘 걸으려면 영양보충도 해가면서 몸을 돌보아야 아프지 않고 잘 걷는다.



잠든 영혼을 기억하세요.

인생이 어떻게 지나가고

죽음이 어떻게 저리도 조용히 다가오는지

깨어난 의식으로 바라보면서


- 알베르게 글 -


중세 순례자들의 그림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