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헤라 알베르게에서 아침 5시 30분에 출발하여 서둘러 나오니 하늘이 잔뜩 흐려 비가 몇 방울씩 떨어지니 다들 출발을 망설인다. 어차피 가야 할길 그냥 단순하게 생각하고 출발했다. 세상사를 너무 득실을 따지고 저울질하면 머리만 아프다.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하는 것은 어느 선택을 하더라고 큰 차이가 없을 때 고민을 하게 된다. 만일 2:8이나 3:7만 되어도 고민 없이 바로 선택과 결정을 하게 된다. 중요한 건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그 결과만 받이 들이면 된다. 고민하는 이유는 선택을 하고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는 데 있다.
밀밭길을 걷는 아름다운 순례길
알베르게 앞의 강물 소리가 정적을 깨고 요란하게 흘러간다. 이곳만 해도 꽤 큰 마을이라 마을을 벗어나기 전 까지는 카미노 길을 놓치지 않으려면 꼼꼼하게 길안내 표지를 찾아야 한다. 잠시 길을 놓치는 사이 경찰청 팀들이 앞서가고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함께 길 위에 섰다. 통상 하루 걷는 거리가 비슷하여 자주 만나고 헤어지는 것의 반복이다. 흐린 날씨로 가늘게 뿌리는 비가 내리다 멈췄다를 반복해서 자주 우의를 입었다 벗었다 해야 했다. 이 지방에서 내리는 비는 많은 비가 아니라 가늘게 내리는 비라 그냥 맞고도 걸을 만해 우의를 입지 않고 걷기도 했다.
오늘 걷는 길은 양옆으로 끝 간 데 없는 밀밭 길을 걷는 길로 마을도 그리 많이 만나지 않고 걷는 길이다. 리하오(Rioja) 지방에서 가장 매력적인 코스로 꼽히는데 아스팔트 길이 없고 산티아고 길에서 신화적인 장소 중의 하나인 산토도밍고 성당을 지나게 된다.
오르편의 맨 왼쪽에 걷는 분은 시칠리아 섬에서 순례자 할아버지(좌) 지평선 밀밭길을 걷는 순례길(우)
푸른 녹색 초원으로 이어지는 밀밭길을 걷고 또 걷는다. 체력이 부치는 순례자는 아침에 택시로 짐을 보내고 빈 몸으로 물통만 하나 들고 바삐 걷는 이도 있다. 그래도 순례자라면 자기의 짐은 본인이 매고 걸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실은 순례길에서 가장 힘든 게 배낭을 메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게 나의 업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 고통을 느끼며 걷는 길이 좀 더 순례길이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오늘은 길에서 이탈리야에서 온 할아버지와 함께 걸었다. 스페인과 지리적으로 멀지 않아 이탈리안 순례자도 많은 편이다. 그분은 이탈리야의 아름다운 시칠리아섬을 걸어 보라고 추천해 주셨다. 다리가 좀 불편하신 조금 절뚝거리는 하지만 꾸준히 잘 걸으신다.
산토도밍고 공립 알베르게 앞에서 문이 열리길 기다리는 순례자 배낭과 순례자
21km를 걸어 산타 도밍고에 도착하니 먼저 온 순례자는 공립 알베르게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오늘은 길이 좋아 그리 지치지 않아 산토도밍고 성당을 둘러보고 7km 떨어진 다음 마을인 그라뇽까지 걷기로 했다.
산토도밍고는 수탉과 암탉의 이야기로 유명한 곳인데 한 여인의 질투로 순례길에 나선 젊은이가 누명을 쓰고 교수형에 처해졌는데 그들 가족은 순례길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하느님은 신심 깊은 이들 부모에게 기적을 베푸는데, 아들이 교수대에 매달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수도원장의 집으로 달려가 막 저녁식사로 접시에 있는 닭을 먹으려고 하고 있을 때 "우리 아들이 살아 있다."라고 하자 수도원장이 "만약 당신의 아들이 살아 있다면 이 접시의 닭 두 마리도 살아 있겠구려." 하며 구운 닭을 포크로 찍으려는 순간 닭 두 마리가 날개를 퍼득이며 접시에서 뛰어나와 요란히 울었단다. 그 후 청년은 고향으로 돌아가 하느님을 섬기며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다.
산토도밍고 성당은 닭과 인연이 깊은 성당이다. 해마다 암탉 2마리를 바꾸는 의식이 수백년 이어 오고 있다.
성당과 붙은 박물관은 역시 닭으로 된 이야기의 그림과 조형물이 많았다. 점심은 다리를 지나기 전 작은 개울가 의자에서 먹었다. 주변에 축사가 있는지 향기롭지 못한 냄새가 풍겨 서둘러 먹고 길을 나섰다. 30km 거리는 조금 무리가 오는지 후반은 피로가 몰려온다.
그라뇽은 작은 마을로 이곳 알베르게는 San Juan 성당이 바로 옆에 있는 옛 사제관이다. 처음엔 알베르게 표시만 찾다가 온 동네를 다 둘러보아도 알베르게가 없어 길거리 Bar에 있는 현지인에게 물어서 겨우 찾았다. 입구 표시를 찾지 못해 한참 헤매기도 한 곳이다. 돌로 된 비좁은 계단을 따라 3층까지 올라가면 3층에 방과 주방이 있고 그 안에 벽난로가 있는 식당이 있고 계단을 통해 잠을 잘 수 있는 침실이 있다. 그곳의 매트리스를 깔고 자는 곳이다. 알베르게와 다른 성당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도 의미 있는 시간이다.
그라뇽의 성당 숙소의 한글 알림글(좌) 거실의 벽 난로(우)
공동으로 준비하는 저녁식사가 있고 저녁 7시에는 순례자 모두가 참가하는 성당의 기도회가 있다. 그곳에는 한글로 된 일정표가 있어 쉽게 알 수 있다. 이곳은 새요는 찍어 주지 않고 직접 그림을 그려 주었다. 굳이 새요를 받으려면 성당 앞에 있는 Bar에 가면 새요를 받을 수 있다.
도네이션으로 운영되는 숙소로 저녁식사도 모두 함께 준비하고같이 먹는다
우리가 갔을 때는 벌써 주방에 딸린 침실은 만원이라 2층에 있는 방에 매트리스를 깔고 잠자리를 준비하였고 다. 같이 성당의 저녁 미사에 참가하여 순례길을 떠나는 순례자들에게는 신부님의 특별한 축복이 있었다. 그리고 모든 순례자가 함께 모여 저녁식사를 하였다. 기부제로 운영되고 있는 알베르게로 스텝은 모두 자원봉사자가 일하고 있다. 특별한 체험이 없고 순례자로는 좋은 경험이었다.
방명록에는 빼곡히 글들이 써져 있는데 하나같이 이곳을 만난 축복이었다고 한다. 번잡한 알베르게 보다 조용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좋았고 순례길의 의미와 잘 어울린다는 글이다. 순례길에서 느낀 소감이 솔직 담백하게 쓴 글이라 공감이 되는 글이다. 집 떠나니 집이 그립고 부모님의 품이 포근했다는 딸들의 글이 많다. 순례길은 어른스럽게 만드는 묘한 마력이 있다. 순례길을 걸으면서 특별한 체험을 하고 싶다면 이곳에서 하룻밤을 자고 가도 좋은 성당 내의 숙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