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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Jun 17. 2023

그림일기

서로에게 친절해지는 시간

'진정한 개인주의자' ISTP 남자와 타인에게 관심이 많은 '이상주의적 선도자'인 ENFJ여자가 만나 결혼을 했다. 남자는 집안에서 기계를 분해하거나 고치는 걸 좋아했고 여자는 여행을 가거나 친구들, 가족들과 어울리길 즐겼다. 주말에 집을 나서는 여자도 집을 지키는 남자도 서로에게 고마워하며 개인 시간을 즐겼다. 남자는 자동차, 매듭 묶기, 납땜, 프로그래밍 등 다양한 채널 유투버 구독자였고 여자는 책을 읽고 편지를 쓰는 등 끄적이는 시간을 좋아했다. 여자는 가끔 매듭 묶는 걸 자세히 설명하려는 남자의 이야기를, 남자는 베주호프 후작이 감자를 먹는 부분에 대한 여자의 생각을 '언제 끝나지'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웃으며 들어주었다. 물론 여자는 "공부 못하는 아이들 때문에 힘들어 죽겠어." 하고 한숨을 쉬면 '그랬구나' 한 마디면 될 것을 "공부를 못하니까 학원에 오지. 아이들한테 어쩌고저쩌고 해 봐......"라고 하며 공감의 대화 대신 원론적이고 도덕적인 문제 해결 방식의 대화를 시도하는 남자에게 화가 나서 토라지기도 했다. 그러나 매사 느긋한 남자는 걱정하여 미리 대비하는 여자에게 안정감을 주었고 남자는 주도적이진 않았지만 여자가 계획하여 시킨 일을 불평 없이 잘 이행했다.  


남자는 2022년 12월, 직장을 그만두었다. 중식과 석식, 하루 두 번의 식사를 제공하던 회사였다. 아침을 거르는 남자 덕에 결혼 후에도 여자는 자신이 먹고 싶은 것만 간단히 차려먹어도 되었다. 여자는 일하러 가기 전, 혼자 카페나 도서관에 가는 걸 좋아했는데 남자를 두고 나서기가 쉽지 않았다. 남자는 모든 집안일에 능숙했지만 요리에는 소질도 흥미도 없었다. 식탐도 배고픔도 잘 몰랐다. 분명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거나 과자, 초코파이 같은 것을 먹고 점심을 먹었다고 할 남자였다. 매일 한 끼 함께 먹을 음식을 차리는 것이 뭐 그리 대수일까. 남들도 다 하는 일. 여자는 그렇게 쉽게 생각했다. 오전에 둘이서 밥 먹으며 영화도 보고 처음엔 신혼이 돌아온 듯 소꿉놀이 하는 기분도 들었다. 그러나 점차 여자는 오늘은 또 뭘 먹지란 물음에 '아무거나'란 대답이 돌아오는 걸 들으며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음식은 '아무거나'가 아닐까란 생각을 했다.


그래도 여자는 남자가 집에서 쉬자 설거지, 빨래, 집청소, 등등 여러 자질구래한 집안일에서 벗어날 수 있어 좋았다. 아이 학교 데려다 주기, 일이 끝난 여자를 태우러 오기 등도 즐겁고 보람되게 여겼다. 집에 돈만 있으면 남자가 집에서 저렇게 살림을 해줘도 참 좋으련만, 하는 생각이 한 번씩 들었다. 그러나 모아둔 돈은커녕 갚을 빚밖에 없는 살림살이였다. 걱정 없고 느긋한 남자가 밤늦게까지 불을 밝히고 유튜브를 보고 있으면 여자는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냐?'라고 속시원히 물어보고 싶어졌다. 그러나 다감한 이상주의자 여자에게 고작 6개월 만에 남편에게 잔소리를 한다는 건 잔소리를 하지 않는 것보다 힘든 일이었다. 여자는 자신의 마음이 겉은 평온하지만 불만 세게 당기면 북적북적 끓어오를 수 있는 뚝배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늘, 올리브, 토마토를 올린 포카치아를 누구나 좋아할 음식이라고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된다. '한 지붕 아래 치킨집만 세 곳', 한국의 국민음식이라 할 수 있는 치킨을 입에도 대지 않는 여자는 더더욱 그러해야 했다. 남자는 나주곰탕과 수육을 좋아했고 여자는 물에 빠지 고기와 삶은 고기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다. 여자는 바게트와 깜파뉴를 주식처럼 만들어 먹는 밀가루 마니아지만 남자는 크림과 잼이 들어가지 않은 빵은 잘 먹지 않았다. 남자는 캐러멜 마키아토를 여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남자는 김치찌개를 여자는 시래기 된장국을, 남자는 크림 스파게티를 여자는 알리오올리오를, 남자는 소고기베이스의 국물을 여자는 해물 베이스의 국물을 선호했다. 여자는 싫어하는 음식은 아예 손도 대지 않는 스타일이었고 남자는 싫어하는 건 없다면서 떡볶이의 라면 사리만 쏙쏙 건져먹었고 빈접시엔  여자가 사랑하는 올리브가 가득 남기곤 했다.


"어, 오랜만에 빵 만드나 보네."

"응~~ 마늘이랑 올리브 가득 올려서 포카치아 만들려고. 오빠 조심해서 잘 다녀와."

그렇다. 오늘은 남자가 6개월 만에 바깥세상으로 나가는 날이다. 안타깝게 재취업은 아니지만 한 달 동안 오전 8시 10분 오후 5시 30분에 집에 돌아오는 자격증 준비에 돌입했다. 여자는 새벽에 일어나 미지근한 물에 이스트를 풀었다. 반죽기에 평소 쓰는 통밀 대신 희디흰 밀가루를 넣고 소금을 조금 넉넉히 넣었다. 반죽이 하나로 뭉치자 올리브유 두 큰 스푼을 넣어주었다. 반죽기가 반죽 치대는 소리를 음악 삼아 들으며 책상에 앉아 책을 읽었다. 1차 반죽이 끝나는 소리가 들리자 반죽을 꺼냈다. 부풀어 오른 반죽은 반죽기 통에서 빠져나오며 살짝 가라앉았다. 살살 굴린 반죽을 올리브유 바른 둥근 통에 옮겨 담은 후 뚜껑을 닫았다. 깐 마늘과 통조림 올리브를 꺼내와 얇게 썰어두었다. 냉장고 속의 물러가는 토마토가 거슬려 두 개 꺼내 씻은 후 과육이 최대한 으깨지지 않는 한도에서 최대한 얇게 썰었다. 다시 책을 펼쳤고 시간은 7시 30분까지 내리막길 내려가듯 신나게 달렸다.


남자를 보내고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기 전에 마지막으로 반죽을 올리브유 바른 팬에 옮겨 담았다. 숨을 한껏 참고 있는 반죽을 살살 눌러 숨통을 조금 트여주고 작은 기포들은 다 꺼지지 않게 어르었다. 아이를 차에 태워 학교에 데려다주고 오니 마지막 발효시간을 잘 보낸 빵반죽이 잘 부풀어 있다. 슬라임 놀이하듯 반죽을 손으로 당겨 펴고 손가락으로 콕콕 구멍을 뚫었다. 양손이 올리브기름으로 번들거렸다. 마늘과 올리브, 토마토를 잘 섞이게 가득 올렸다. 180도에서 20분 굽기 버튼을 눌렀다. 양팔을 어깨 위로 올려 쫘악 펴서 기지개를 하자 성취감이 밀려왔다. 빵이 굽힐 동안 간단히 설거지를 마치고 새로 산 원두 봉지를 뜯었다. 다크로스팅한 커피 향이 코로 훅 들어왔다. 아이가 갑자기 달려와 안길 때처럼 느닷없이 반가운 그 향에 입꼬리가 올라간다. 원두 갈리는 소리를 들으며 오브 안을 기웃거렸다. 생각만큼 윗면이 노릇노릇하지 않다. 마지막에 올리브유를 한 번 발라줄 걸 아는 아쉬움이 남지만 그래도 오늘 빵은 성공이다. '띵' 하는 알림음이 끝나기 무섭게 성질 급한 여자는 팬이 식기도 전에 빵을 꺼내 도마에 얹었다. 아마 여자가 다 먹게 될 테지만 남자의 몫을 덜어 뚜껑을 닫아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빨강머리 앤이 그려진 접시에 포카치아 조각을 언덕처럼 쌓고 커다란 유리컵에 얼음을 3분의 2 가량 채웠다. 갓 뽑아낸 진한 커피가 순식간에 물을 까맣게 물들였다.


여자는 그림책의 한 장면을 찾으려 책장을 한 장씩 넘겼다. "네 작은 손안에 가없이 큰 것을 쥘 수 있고, 한 시간이 영원과도 같음을 안다면, 한 줌의 모래 안에서 세상을 보고 한송이 야생화에서 천국을 보게 될 것이다." 블레이크의 시가 실려있다는 장면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림도 글도 새롭고 새롭다. 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는 빵 접시와 송골송골 물방울 맺힌 커피잔, 웅장하고 밝은 쇼팽의 그랜드 폴로네이즈. 좋아하는 것들을 마음껏 누리는 혼자만의 시간. 이것은 자신에게 친절해지는 시간이자 한 지붕 아래 다르고 다른 남녀가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한 필수 아이템이었다. 이 순간을 서툴지만 그림에 담아보고 싶다고 여자는 마늘, 올리브, 토마토가 한 곳에 모여있는 포카치아 한 조각을 입안 가득 넣으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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