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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Sep 16. 2023

야단법석의 자리를 만들어 주어 고마워

  

은성아, 여전히 덥고 눈이 부셔도 하늘을 자꾸 보게 되는 날들이야. 평소에 일부러 하늘을 계속 보고 있지는 않잖아. 하늘과 구름, 나무와 바람, 바다와 햇살을 오래 들여다보려면 여유가 필요해. 그런 시간을 애써 만드는 것이 여행이겠지. 그래서 너를 만나고 온 날은 근교여행을 다녀온 느낌이 든다. 부산에는 낮은 산들이 사방에 있어 지평선을 볼 수 없는데 양산으로 가는 약 20km의 강변도로는 지평선을 달리는 기분이 드는 길이야. 쭉 뻗은 도로의 정면만을 보고 달리면 오른쪽 높은 건물이나 왼편의 강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때가 가끔 있어. 솜뭉치 같은 커다랗고 하얀 뭉게구름이 땅까지 낮게 내려와 있는 그런 날 말이야. 먼 산의 무지개를 쫓아갔다 되돌아오니 늙어있었다는 이야기의 소년처럼 구름을 향해 끝없이 달려가는 기분이 들었어.      


 벌써 20년 전이지만 기억나니? 20대 때 일본어 회화 동호회에 함께 나간 적 있잖아. 늘 우리끼리만 어울려 다녔기에 낯선 사람들 속에서 서로가 어떤 모습인지 잘 몰랐었어. 다를 수 있다는 생각도 못했던 것 같아. 평소 너는 대화의 소재가 끊이지 않는 수다스러운 사람이었잖아. 그런데 낯선 사람들과 있으니 첫무대에 올라온 배우가 대사를 잊어 난감해하는 것 같았어. 말도 거의 하지 않고 불편하게 앉아 있던 모습이 잊히지 않았어. '은성이는 이런 모임을 좋아하지 않나보다.' 고 나도 깨닫고 너도 깨닫는 일이었을까?' 그랬던 네가 사람들을 모집하여 글쓰기 모임을 모임을 만들었나디 얼마나 놀라웠는지 몰라.     


 "꿈은 성취해야 하는 업적이 아니라 삶의 태도 같아. 좋아하는 아이들, 사람들 모아 함께 글을 쓰며 늙어가고 싶어. 그게 내 꿈이야."

2023년 봄 황량한 황산 공원을 걸으며 네가 말했었어. 그리고 몇 달 후 너는 행동으로 보여주었지. 누군가에게는 사소한 일이 어떤 사람에겐 큰 결심이 필요할 때가 있잖아. 나는 26년지기 친구의 변화가 작은 것이 아님을 알아차렸지.

 "좋아하는 일에 한 번도 최선을 다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인생에서 한 번은 최선을 다했다고 말해보고 싶은 소망이 있어."

네 앞에서 이 말을 듣는데 어디선가 팝콘 하나가 토도독 터지는 것 같더라. 후라이팬에 팝콘 구워본 적 있어? 가만히 바닥에서 숨죽이며 열을 받고 있던 단단한 알맹이들이 어느 순간이 되면 하나씩 툭툭 터져. 그러면 앞다투어 팡팡팡 쉴 새 없이 터져서 후라이팬을 가득 채우는거야. 뚜껑을 닫지 않은 후라이팬 속 팝콘처럼 너는 단숨에 커져 사방으로 날아오를 것 같더라. 꿈과 직업이 하나가 된다는 건 정말 멋진 일, 용기가 필요한 일이야. 틱낫한은 '폭탄이 떨어질 때 그와 동시에 길이 열린다.'고 했던가. 너는 두려움을 안고 새롭게 불어온 바람을 타기 시작한 것 같아.     

 

 그렇게 네가 초대한 글쓰기 모임의 멤버가 되어 첫 만남도 가지고 합평도 했지. 객관적인 독자의 입장에서 읽는 나의 글은 어떻게 다가올까. 당근과 채찍 둘 다 기대가 되었어. 낭독할 때부터 격앙되기 시작하더라. 멤버들의 생각을 차분히 듣고 있었지만 얼굴이 어찌나 달아오르던지. 손등으로 얼굴을 만져보곤 했어. 오랜만에 들어보는 쓴소리 덕분일수도 있었겠지만 꿈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면 저절로 솟아나는 아드레날린 탓이었겠지. 순간 스무 살로 돌아간 것 같았어. 그 때는 청년들의 치기어린 난도질에 불과했을 합평이었지만 세상의 운명이라도 결정하는 듯 심각했었어. 안 좋은 평을 들으면 겉으론 온화한 척 웃으면서도 '다음번엔 내가 제대로 보여주지'하고 칼을 갈던 시절에 대한 기억들이 한꺼번에 훅 올라왔어.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그 꿈은 왜 소실점 끝의 구름처럼 아득해지고 말았을까? 젊은이에게 시간은 무한한 것이고 글쓰기도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을거라 믿었어. 그 나이의 꿈은 직업이고 생계의 동의어였다고 하기에는 그게 뻔한 변명이고 삶에도 통조림처럼 유통기한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 


 은성아 나는 요즘 글쓰기 방향을 잃은 것 같았어. 글쓰기의 시작은 읽은 책을 잘 정리해두고 싶은 마음이었어. 그러다 좀 더 읽는 이를 생각하며 재미있게 쓰고 싶어졌지. 그리고 벽에 부딪혔어. 내가 재밌는 사람이 아니잖아. 이 때 너와 다시 여러 책들을 탐독했어. 그 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란 책을 읽는 1여년 간의 시간들은 좀 특별했어. 겪은 일이 아니라도 내 감정이나 사유를 솔직히 쓴다면 쓰는 이도 읽는 이도 재밌을 수 있겠구나. 내 생활, 내 감정 등을 내 식으로 기록해보자 마음먹으니 다시 글쓰기가 편해졌어. 돌아보면 그때가 내 글쓰기 첫 점핑의 순간이었어. 그러나 얼마안가 이대로 괜찮을까, 이 글이 누군가에게도 읽힐 의미가 있을까 싶은 고민이 또 생기더라. 새로운 벽. 그래도 쓰는 일은 보람 있더라. 적금통장에 적립금 쌓여가는 기분 같았어.


"글은 잘 썼지만 나에겐 재미가 없어요. 개인적인 이 글을 왜 읽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합평 때 이 말을 듣는데 찌찌직 벽에 실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면 과장일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내가 너무 잘 알아서 얼굴이 달아올랐을지도 몰라. 그리고 네게 어딘 글방의 이야기를 담은 책 <활활발발>받아 집으로 돌아왔어. 새벽까지 책을 읽었어. '공부를 해야해, 경험만으로 쓰는 데는 한계가 있어.' 하는 소리가 처음 듣듯 들리더라.      

네게 입력된 도덕과 윤리를 의심하고 때로 가차 없이 탕탕탕 박살내지 않는 한 너는 너를 이해할 수 없을 거야. 인류에 대한 정치한 탐구가 없는 한 글은 반복일 뿐이야. 이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일이 반복적인 글을 읽는 거지.-어딘 <활활발발>


쿵쿵. 한쪽 벽이 또 와르르 무너졌어. 마음이 활활발발해지며 프라이팬이 점점 달아올랐어. 내 발바닥도 뜨거워졌어. 점핑의 순간이 다가오리란 예감에 밤을 설쳤다.       

 부처님이 설법을 할 때였대. 법당은 좁고 사람은 몰려오니 야외에 법단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네. 그런데 마당에서 설법을 하니 법단 위에서보다 자유롭게 법을 묻고 답할 수 있었대. 혼자서 글을 쓰는 것도 즐겁지만 여럿이서 모여 글에 대해 실컷 떠들 수 있어 기뻐. 같은 프라이팬에 있으면 불의 위치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나도 동시다발적으로 팝콘이 터지더라. 내가 뜨거워지면 옆사람도 함께 뜨거워지기 마련인가봐. 아, 하고픈 말은 많지만 종이가 부족하네. 못 다한 말을 이번 주 만나서 나누자. 


2023년 9월 11일 

너무 뜨거워졌나 싶은 승희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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