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정신을 생각하다
지난달 중순까지 종합편성 채널에서 방영된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관련 예능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질 정도로 강한 팬덤(fandom)을 형성해 시청자 눈길을 끌고 있다. 해당 드라마가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를 분석하던 가운데 ‘직업정신은 무엇인가’라는 화두가 불현듯 머릿속에 떠올랐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2년에 걸쳐 두 시즌 분량으로 제작된 드라마다. 기존 의학 드라마와 마찬가지로 의사들의 희로애락을 그리는 점에서 유사하다. 다만 등장인물들이 권력이나 부를 두고 다투는 대신, 그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여러 감정들과 개인사에 이야기의 초점이 맞춰짐으로써 차별화했다.
이 같은 특징을 갖춘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눈에 띄는 점 가운데 하나는 의사인 등장인물들의 따뜻한 마음씨다. 이들은 사람의 건강을 증진시키는 전문직으로서 보유하고 있는 지식과 의술을 사람들에게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적용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 뿐 아니라 환자를 이해하고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진정성 있게 소통하려 노력한다. 그런 태도는 따뜻하고 성의 있는 말투와 함께 신중하지만 정성스러운 몸짓으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매 회 끝날 때마다 마음 한켠이 따뜻해지고, 뒷 이야기가 기다려지는 드라마다. 다만 ‘착한 의사’들이 한 병원에 수두룩한 비현실적 설정을 도입한 건 현실의 시청자들을 희망 고문하고 냉소를 유발한다. 실제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연출한 신원호 감독도 이달 초 서면으로 실시한 언론 인터뷰를 통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착했으면 좋겠다는 ‘판타지’를 드라마에 녹였다고 밝혔다.
신원호 감독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저 좋은 사람들 사이에 끼고 싶다는 생각이 들도록 이야기를 만들려고 한다. 그걸 판타지라고 불러도 좋다”며 “보다 자극적이고 보다 쇼킹하고 보다 어마어마한 이야기들의 틈바구니 속에 이런 착한 판타지 하나쯤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다”라고 설명했다.
이익준 교수님, 송화쌤 ‘환상 속의 그대일 뿐’
드라마 속 의사들이 비현실적인 인물이라는 점은 현실의 동네 의원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최근 팔에 난 두드러기를 진료받기 위해 방문했던 병원에서 만난 의사는 내뱉는 문장마다 끝에 ‘쯧’을 붙였다. 말투는 심드렁했다. 진료실을 드나드는 동안 인사 한번 받은 적 없었을 뿐 아니라 시선을 팔 아니면 모니터만 두고 있었다.
그는 “이거는 병이 아니고 쯧, 모공각화증이라고 하는데 쯧, 보통 여자들이 미용으로 여름마다 약 발라서 없애는 거고 쯧, 완전히 치료 안되고 계속 약 발라야 돼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의 의료 행위가 환자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나무라는 것은 감정을 앞세운 처사에 불과하다. 그들은 의학을 배우고 임상 현장에 나설 때까지 환자와 진심을 갖고 소통하거나 친절하게 대하라고 배우지 않기 때문이다. 국내 보건의료기본법, 대한의사협회 의사윤리강령, 제네바 선언 등에서도 그런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해당 법령이나 강령 등에 따르면 보건의료인에게는 의료 행위에 대한 전문성, 공정성, 객관성, 신뢰성 등이 강조된다. 해당 내용을 아무리 뜯어봐도 의사들이 환자들에게 친절해야 할 의무의 근거는 없다.
이밖에 의사의 의료행위에서 느낄 수 있는 친절함이나 공감능력에 대한 환자의 느낌이 주관적인 점도 해당 의사를 ‘따뜻한 의료인’으로 구분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소다. 의료행위는 현행법에서 보건의료서비스로 표현된다. 하지만 해당 개념에 담긴 단어 서비스(service)는 영단어 의미 그대로 제공하는(serving) 행위에 국한되는 모양새다.
불편한 그 병원 의사, 나만 그런 거 아니었네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대한 시청자 반응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오늘날 정답 아닌 모범답안으로서 의사의 캐릭터는 존재한다. 이는 달리 볼 때 병원들이 환자들로부터 차등적인 평가를 받는 추세가 활발히 나타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병원이 제공하는 의료서비스에 대한 환자들의 심리적 만족도는 해당 병원의 경쟁력이나 생존 여부에 직결되는 요인으로 부각되고 있다.
의학계에서도 환자의 심리적 만족도를 해당 병원의 의료 질을 평가하는 기준에 도입하는 추세가 이미 만연하다. 식음료 프랜차이즈 본부가 가맹점의 서비스 질을 관리하기 위해 품질 개선(QI) 체계를 도입하듯, 병원의 매출을 늘리기 위한 업계 내 노력이 활발히 이뤄지는 상황이다.
예를 들어 병원 경영 컨설팅 서비스를 제공하는 솔루션 업체들은 품질관리(QI) 체계를 통해 고객인 병원에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자체 평가 시스템을 통해 의료서비스 질을 스스로 개선하려는 병원도 존재한다.
강혜영 연세대 약대 교수는 지난 2002년 국내 의학전문매체에 투고한 칼럼을 통해 “오늘날 교육 및 생활수준이 향상된 국민들은 과거 지적·사회경제적 수준이 평균적으로 환자보다 높아 절대적 권위를 갖췄던 의사들을 더 이상 절대 우위의 사회 계층으로 보지 않는다”라고 분석했다.
강혜영 교수는 “또 환자들이 인터넷 등을 통해 의료 정보를 쉽게 접하고 있어, 그간 공급자가 전적으로 의료정보를 점유하던, 소위 정보의 비대칭 현상이 무너지고 환자들이 의료공급자를 비교·선택하는 양상을 보인다”며 “의료기관은 이에 따라 경쟁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방편으로 의료서비스의 질적 개선을 당면 과제로 삼는다”라고 설명했다.
직업정신, 이젠 생존의 관건
모범답안으로서 의사에겐 여러 특징 가운데 근본적인 요소인 ‘직업정신’이 엿보인다. 직업정신을 영어로는 프로페셔널 스피릿(professional spirit)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때 쓰인 단어 프로페셔널은 전문가로서 의미가 강하지만, 어떤 일이든 다른 직종과는 구분되는 전문성으로 효율과 매출을 모두 높일 수 있는 점에서 포괄적 개념인 ‘직업’의 정의와 일맥상통한다.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 임원 출신인 로버트 어니스트 도허티(Robert E. Doherty) 카네디멜론대학 전 총장은 전문가(profession)의 구성 요소로 고등교육(higher learning), 실무능력(art), 직업철학(professional spirit), 직업정신(professional spirit) 등 네 가지를 꼽았다.
이 가운데 직업정신은 직업인의 존재 이유와 지향점, 희망사항(hope) 등으로 구성된 직업철학에서 빚어지는 것으로 봤다. 직업정신을 갖춘 종사자들이 건설적인(constructive) 서비스를 지향하고, 이에 따라 대중으로부터 더 많이 존경받을 것이라는 게 도허티의 지론이다. 도허티가 직업정신을 직업인의 구성요소로 분류한 것은 한편, 직업인이 사회로부터 존경받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도허티는 또 시대의 요구사항에 따라 직업정신을 지속 쇄신해야 할 것으로 여겼다. 의사의 경우 갈수록 다변화하는 환자 요구사항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뜻이다. 도허티의 이 같은 주장들을 종합하면, 직업인은 변화하는 시대 요구사항에 맞춰 존경받을 만한 인물로 거듭나기 위해 새로운 역량을 끊임없이 보유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새로운 역량은 직종에 대한 전문성뿐 아니라 존경받는데 필요한 모든 자질을 아우른다.
도허티는 지난 1924년 미국 간호저널(The American Journal of Nursing)에 투고한 칼럼 ‘직업정신(professional spirit)’에서 “고등교육(의 내용)과 이에 수반한 실무능력(art)이 반드시 발전돼가는 과정을 겪듯, 직업철학(professional philosophy)과 이에 따르는 직업정신도 우리 삶의 불가피한 변화에 대응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사실 직업정신의 개념을 의사를 포함한 의료인들 뿐 아니라, 나를 비롯한 모든 경제인구에 강조하고 싶다. 직업정신은 해당 직업인이 재능을 줄곧 펼쳐나가고 일터를 지킬 수 있는 역량과 다름 아니다. 환자 눈은 한 번도 바라보지 않은 채 말 끝마다 혀끝을 차는 의사나, 방문객을 돈벌이 대상으로만 여겨 기계적인 말투와 제스처로 응대하는 요식업계 종사자들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최소한 먹고살기 위해 일하거나, 더 나아가 부와 명예를 위해 경제활동을 벌이는 모든 직업인들이 직업정신을 갖추기 위해 고민하고 행동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