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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wole Apr 08. 2021

감정 쓰레기 배출의 날

‘감정 쓰레기 배출 안내’. 시린 손을 비비며 재촉하던 걸음을 멈추게 하는 문구가 있었다. 추위도 잊은 채, 잠시 멈춰 서서 전봇대에 붙은 종이를 바라보았다. ‘배출요령 : 감정쓰레기를 짧게 절단하여 배출, 물기수분을 최대한 제거한 후 배출’.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자세히 보니 감정 쓰레기가 아니라 김장 쓰레기였다. 11월 김장철을 맞아 지자체에서 붙인 안내문이었다. 김장철에는 김장 쓰레기를 버리는 특수한 처리 방법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김장 쓰레기와 감정 쓰레기. 오독은 잠시나마 내 안의 오물을 비워낼 곳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나를 설레게 했다.    


우리는 매주 정해진 요일마다 쓰레기를 내다 버린다. 비워내지 않는다면 쓰레기는 계속해서 쌓일 것이다. 먹고, 자고, 입는 일에는 항상 쓰레기가 따른다. 주마다 쓰레기 배출의 날이 없다면, 머지않아 집에는 발 디딜 틈 없이 쓰레기가 가득 찰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감정 쓰레기는 어떨까. 감정 쓰레기 역시 음식물 쓰레기, 재활용 쓰레기처럼 하루하루 지날수록 내 안에 쌓일 것이 분명한 쓰레기이다.    


지자체에서 지정해주는 배출 요일은 없지만, 누구나 자신의 감정 쓰레기를 쏟아낼 공간이 필요하다. 내 안에 쌓아두면 쓰레기는 썩어 고약한 냄새를 풍길 것이다. 썩은 상처를 안고 있는 것이 힘들어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쓰레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내다 버린다. 다음 주에 새롭게 쌓일 직장 스트레스, 육아 스트레스, 학업 스트레스를 위한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그래서 감정 쓰레기는 엄마에게, 애인에게, 친구에게, 심지어는 모르는 사람에게까지 버려진다.     


감정 쓰레기가 향하는 곳에는 공통점이 있다. 나보다 약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딸의 말이라면 그저 들어주고 싶은 엄마에게, 나를 아끼기에 약자인 애인에게, 고객이기에 나에게 함부로 할 수 없는 직원에게. 편하다는 이유, 만만하다는 이유로 그들은 또 다른 쓰레기통이 된다. 그러나 사람에게 버려지는 쓰레기는 소각되지도, 재활용되지도 못한다. 그저 나에게서 그에게로 쓰레기통이 바뀔 뿐이다. 가까운 이에게 버려진 감정 쓰레기는 쌓여, 관계를 망치기도 한다. 먼 사람에게 버린 쓰레기는 쌓이고 쌓여 감정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몰기까지 했다.  

  

김장 쓰레기라는 글자가 감정 쓰레기로 보인 것은 연말이라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한 해의 끝이 다가오니, 사람들 역시 한 해 동안 쌓인 자신들의 감정 쓰레기를 비워낼 공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11월 김장철이 되면 특별 배출되는 김장 쓰레기처럼, 감정 쓰레기 역시 특별 배출 기간이 있다면 어떨까. ‘배출요령 : 감정쓰레기는 종이에 적어서 배출, 눈물 자국은 최대한 말린 후 배출’. 이렇게 말이다. 연말이면 집집마다 100L짜리 종량제 봉투에 꽉꽉 눌러 담아 내놓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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