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적응을 마쳤으니 또 올라야 한다. 오늘은 호름보대피소를 출발해 키보대피소(4,750m)까지 갈 예정이다. 역시 하루만에 1,000m 이상을 오르는, 만만치 않은 일정이고. 키보대피소는 킬리만자로 정상을 향하는 마지막 대피소다.
3,000m 이상의 고도에서 하루 1,000m를 오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에 모두들 조심스런 걱정을 했다. 이곳에 오기 전 쉽게 그리고 대충 오르면 되겠지 라고 생각했던 나의 자만에 부끄럽기 짝이 없다.
아니나 다를까,
어제부터 재수 형은 쉬는 시간마다 머리를 감싸 쥐며 두통을 호소 하였고 뒤쳐진 늦은 오후 4시가 되어서야 키보대피소에 도착했다, 아무래도 식사는 무리인 것 같았다. 다들 먹는 둥 마는 둥 시늉만 하고는 각자의 침낭 속으로 들어가기 바쁜 하루 일정이 마감 된다.
저녁 11시 기상으로 마지막 정상 운행에 들어가야 하기에 조금이라도 잠을 자야하나 옆의 준영이의 고소 증세가 심한 듯 끙끙~ 앓는 소리가 끈이질 않는다. 나 역시 두통증세가 계속되고 있어 아스피린 한 알을 먹고 잠을 청했지만 허사였다.
뒤척거리고 있을 쯤 현지인으로부터 출발 신호가 온다. 밖에 나가서니 이미 앞서 출발한 원정대의 랜턴 빛이 드문드문 보이고 우리도 불빛을 따라 발을 내 딛었다.
이곳의 길은 어제와는 사뭇 다른 푸석푸석한 화산흙과 자갈 바위들이 뒤엉킨 급경사면의 너덜지대다.
한 발 디딜 때마다 아래로 밀려나는 발걸음이 제자리 걸음하듯 허탈하지만 돌아가거나 우회할 길은 없다. 어쩌랴, 앞을 보니 이런 경사로가 하늘까지 이어져 보인다.
낙오
얼마나 올랐을까?
갑자기 재수 형이 털썩 주저앉더니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그간 먹은 게 별로 없으니 나올 것이라곤 누런 액채 뿐이었지만, 그 모습이 참 힘겨워보였다.
물을 건네는 것 말고는 딱히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여기서 내려가야겠다.”
스스로 등반을 포기하겠다고 말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만감이 교차했다.
한편으론, 스스로 어려운 결정을 해준 것에 감사했다.
여기에서 내가 우긴다고 해서 같이 갈수 있는 것도 아니고, 본인이 우긴다고 해도 같이 갈수 없는 게 분명했기에.
재수 형에게 가이드 한 명을 붙여 안전한 하산을 당부 했다.
재수형은 이곳에서 발길을 돌렸다.
동틀 무렵 겨우 능선 중간지점의 길만스포인트(5,682m)에 도달하니 저 멀리 대지 끝에 붉은 태양의 일출이 시작된다.
이어 밝아진 여명 아래 펼쳐진 아프리카 평원이 근사하고 광활하게 이곳을 떠 받치고 있는 듯 하고 오늘 일출은 분명 어제와 달랐다.
오른 높이 만큼 온도는 뚝뚝 떨어져 추위가 목과 가슴을 파고 든다.
아프리카라는 막연한 생각에 얇은 우모복 하나 챙기지 못한 댓가 이다.
“추우면 더 걸어야지 별 수 있나.”
혼잣말을 하며 정상부 거대한 분화구 능선을 타고 오르길 두시간 가량 더 오르니 이 길의 끝이 비로소 눈앞에 다가와 있다.
우후르피크-정상
2005.12.28
5,895m. 킬리만자로 정상 우후트피크 아프리카 지붕이다.
발 아래로 온 천지가 대 평원의 지평선이다. 사방을 둘러 아침햇살을 받고있 정상 분화구는 오늘도 새로운 영적인 힘을 내뿜을 준비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곳 우후르피크는 산정상의 꼭지가 있는 정상이 아니다. 정상을 빙 둘러 거대한 분화구 능선 중 가장 높은 곳이 정상이다.
우후르피크 좌로부터 가이드, 나, 태삼형
아마 킬리만자로가 화산활동이 없었다면 그 높이가 7,000m급 이상의 산이 됬을지도 모른다. 상단부가 싹뚝 잘려진 정상 우후르피크다.
적도의 꿈꾸던 만년설은 정상 부근에만 아주 조금 남아있었다. 조금이라는 표현이지만 억겁년의 적설량의 존재인지라 두께는 상당히 되어 보인 단면층이 있어 고마울 따름이다. 조금 늦게 이 오게 된다면 못볼 수도 있을 것으로 아마 내 생애에는 이 만년설도 다 사라지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해가 떠오르니 온기가 밤의 취위를 물리고 몽롱한 정신이지만 아침 하품이 연거푸 나온다. 풀썩 주저 않아 곤 하게 한잠 하고 싶다.
걱정했던 준영이도 무사히 정상에 도착했다.
따뜻한 바위에 기대어 몽롱한 기색이 역역하다. 처음 내딛는 이런 기분과 분위기는 평생 잊지 않겠지.
드디어 우리팀의 사진촬영 순번이다. 태삼형, 나, 준영이 각자 목적은 달랐지만 이 순간은 함께였다.
내려서는 길에 몇 번을 주져 않았을까? 화산흙과 밀려 내려서기를 얼마나 했을까?
키보대피소에 도착하니 다행스럽게 재수형은 기운을 되찾아 우릴 마중 나온다. 난 끌어 않은 재수형에게 미안하다는 짧은 말을 보냈다.
오늘 오후 호름보대피소 까지 내려와 종일 깊은 잠을 잤다.
2008. 12. 29
아침 기분이 한결 상쾌하다. 화창한 날씨에 어제 오른 우후르피크 정상이 선명하게 하늘과 맞닿아 있다. 이렇게 난 세계 7대륙 최고봉 중 4번째 행보를 성공했다.
앞으로도 순탄할 것이란 기대가 넘친다.
“이제 가야할 곳은 세계의 지붕 에베레스트”
하행 카라반 준비를 마치고 그동안 같이 했던 가이드와 포터들 그리고 우리는 한 무리가 되어 등정을 축하하는 세레모니로 몇 곡의 노래에 어깨동무로 우린 하나였다.
킬리만자로의 표범
산을 오를 때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볼 수 있을까?’ 생각이 문든 문득 떠올랐다. 하지만 현실은 녹아내리는 만년설이었다. 지금 남은 작은 눈덩이도 다 녹아 없어질 것이다.
아프리카의 하얀 지붕이 황량한 화산재로 변할 것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
이제 킬리만자로의 만년설은 한쪽 모서리만 걸려있을 분이다.
함께 올랐던 포터와 가이드에게 고맙다는 생각에 울컥한다. 그들은 친절했고 성실하게 이번 원정의 각자의 소임을 다 해주었다. 그동안 내가 순간순간 무지하게 가졌던 아프리카에 대한 많은 부분이 달랐다라는 것을 이번 원정을 통해 많이 깨닳았다.
처음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본 검은 피부에 유난히도 흰 눈동자의 이들이 무서웠지만 이제는 이런 부분이 눈에 밝히지 않아 보이고 환한 미소가 그리워 질 것 같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