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레스트 / 사가르마타 / 초모랑마
에베레스트는 티베트와 네팔 사이의 히말라야 산맥에 위치한 세계 최고봉이다.
네팔에서는 ‘사가르마타’(산스크리트어로 ‘하늘의 이마’라는 의미)라 부르고, 티베트어로는 ‘초모랑마’(세상의 어머니), 중국어로는 티베트어의 한자음인 ‘주무랑마펑’(珠穆朗瑪峰, Zhūmulǎngmǎ Fēng)이라고 부른다. '에베레스트'는 영국의 조지 에버레스트 경(1790~1866)의 측량 공적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공인된 에베레스트 높이는 8,848m인데, 이는 1950년대 인도 측량국에서 확인한 것이며, 이에 대해 중국 정부는 2005년 8,844m로 측정 결과를 발표했다.
1998년 미국 탐사대가 에베레스트 꼭대기에 설치한 GPS 기록으로 2008년 기준 8,850m이며, 1년에 5cm씩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에베레스트 최초 등정은 1953년 존 헌트가 이끄는 뉴질랜드 원정대의 에드먼드 힐러리 경(1919~2008)과 셰르파족인 텐징 노르가이(1914~1986)가 성공하였다. 한국인으로서는 1977년 9월 15일 대한산악연맹 에베레스트 원정대(대장 김영탁) 소속 고 상돈이 셰르파 펨바노루부와 함께 세계에서 14번째로 성공했다
지구의 가장 높은 수직점에서 준비일정
이번 에베레스트 원정은 국립공원관리공단 염태영 상임감사(현 수원시장)와 엄동설한 연하천대피소에서의 인연으로 시작됐다.
당시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뒷방에서 추위도 잊은 채 나는 지금까지의 7대륙 최고봉 등반 여정과, 이번에 오를 에베레스트 원정계획을 자세히 설명했고, 이에 염 감사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날 밤 연하천대피소 뒷방은 겨울바람에 덜컹거리는 문소리와 여기저기서 숭숭 들어오는 찬바람에 소란스러웠다.
난방도 안 된 바닥에 깔린 작은 매트리스 하나와 희미한 랜턴 불빛이 전부였다.
이렇게 나는 에베레스트원정단 단장과 첫 대면을 했고, 희망을 보았다.
그리고 따뜻한 봄날이 찾아왔다.
출발 하루 전 이발소에 들러 머리를 짧고 잘랐다.
원정기간 긴 머리로 인한 불편함을 미리 없애고 각오를 새롭게 다지기 위해서였다.
지난 2년간 준비는 20년의 세월을 보낸 것처럼 멀고 험난해 뒤돌아보기조차 싫었다.
능력도 없고 자질도 변변찮은 주제에 에베레스트원정대를 꾸려간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과연 호응해줄까?
추진 중 두려움, 외로움, 그리고 끝없는 생각에 매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가족과 같이한 시간도 굉장히 적었다.
쉬는 날에는 원정대 홍보와 자금 마련, 훈련, 행정처리, 계획 수립 등 다양한 준비 스케줄을 짜느리 시간이 화살처럼 흘렀다.
대원들도 각자 직장생활을 하며 원정을 준비하느라 출발하는 그날까지 고생이 많았을터다.
에베레스트 등정을 성공한다면 세계 5대륙 최고봉 등정 목표을 세계 7대륙 최고봉 등정으로 업그레이드시킬 생각이었다.
에베레스트는 1차 목표인 세계 5대륙 최고봉 등정의 마무리이자 새로운 7대륙 최고봉 등정의 시작이 되는 셈인가?
이번 원정이 가장 힘들고 위험하다.
그간 남의 일로만 여겼던 에베레스트 등반사고가 나와 대원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그러니 당사자인 우리도 고민이지만, 가족들의 걱정도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인호의 아내는 만삭으로, 원정기간 중 출산할 예정이 아닌가.
지난번에 만난 인호 가족 앞에서 나는 괜히 죄인이 된 심정이었다.
이제 이 밤이 지나면 네팔로 향한다.
그동안 힘들고 어려웠던 준비기간의 모든 과정이 막을 내리면서 한순간 홀가분한 기운이 온 몸으로 퍼지고 있음을 느낀다.
다시 한 번 두려운 에베레스트 등반의 시작과 끝을 생각했다.
4월 3일
인천을 떠나 카트만두에 도착하니 후텁지근하다.
등에 땀줄기가 흘러내린다.
출발 전 이메일로 이곳 사정과 정보에 관해 의견을 나눈 한국대사관 김미란 씨가 마중나왔다.
차량에서 대기하고 있던 우리의 쿡 덴지와 함께 카트만두 시내를 가로지른다.
카트만두는 2000년 초오유 원정 때 보았던 그대로다.
마치 지난 8년의 시간이 정지되어 있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의 빠른 발전 속도에 비하면 여기는 변화가 거의 없는 편이다.
지금 네팔에서는 왕정정치에서 의원내각제로 국가체제가 바뀌고, 곧 네팔 최초 국회의원 총선이 실시될 예정이란다.
이곳 사람들은 공산당이 집권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리되면 현재 국왕의 위치가 어떻게 될지 매우 불확실해서 왕정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불안해하는 눈치다.
네팔은 176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해 네팔왕국으로 건국, 우리가 에베레스트를 등정하던 시기인 2008년 5월 28일 네팔연방민주공화국으로 나라이름과 체제가 바뀌었다.
그리고 국왕은 왕궁을 떠났다.
투만두 거리 풍경, 8년전 초오유 등반 당시와 달라진 모습을 찾을 수 없다
4월 4일
오늘부터 3일간 카트만두 체류 일정이 매우 바쁠 것이다.
이곳에서 산소통 등 장비를 구입하고 원정에 합류할 쿡과 셰르파와의 고용 계약, 그리고 입산신고까지 모두 마쳐야 한다.
제일 먼저 우리와 호흡을 맞출 셰르파와 쿡 고용을 위해 면담을 실시했다.
이곳 빌라에베레스트의 상황은 2000년 초오유 등반 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게 없다.
이곳은 원래 박영석 대장과 앙도로지 사장이 공동으로 운영하던 곳이었다.
지금은 앙도로지 사장 혼자서 운영한다.
이곳은 한국 히말라야파 산악인들에게는 고향집처럼 편안한 곳이다.
매년 등반 시즌이 되면 이곳에서 여장을 정리하고 행정을 처리하는 카트만두의 중요 거점이다.
4월 5일
이곳에서 대여하는 장비를 설치해 보고, 앞으로 두 달 동안 먹을 김치를 담았다.
또 히말라야 등반기록 데이터베이스 창구에 에베레스트와 로체 등반을 신고했다.
이제 카트만두를 떠나 무사히 등반을 마치고 다시 이곳을 와서 우리의 성공 기록을 알리는 일만 남았다.
오늘 대원들과 함께 셰르파와 쿡을 선발했다.
앞서 협상한 두 명의 셰르파는 노임 흥정이 맞지 않았는데, 세 번째인 도로지와 밍마가 흔쾌히 우리와 같이하기로 했다.
쿡으로는 덴지와 상게가 죽음을 담보로 한 계약서에 지장을 찍었다.
숙소 빌라에베레스트에서 셀파와 쿡을 선발하는 모습. 서로간 목슴을 담보한 계약이기에 의미가 크다.
이곳 사람은 동명이인이 많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태어난 요일을 이름으로 쓰는 풍습이 있어서 '도로지' 라고 부르면 여러 사람이 동시에 대답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도로지와 밍마는 이미 에베레스트와 로체(8,516m)를 등정한 경험이 있고, 또 베이스캠프 쿡인 덴지는 엄홍길 대장팀에 참여한 적이 있다.
ABC캠프 쿡인 상게 또한 국내 많은 팀과 호흡을 같이한 경험이 있다.
새로운 가족이 된 이들에게 등반과 캠프생활에서 우리와 동등하게 생활하며 서로를 존중해야 하고 각자의 일에 빈틈없이 해주기를 당부했다.
오늘밤 우리 대원과 이들이 만찬을 가지며 의기투합했다.
4월 6일
오늘 출발할까 했다가 상황이 여의치 않아 하루를 더 준비하기로 했다.
그나저나 이곳의 정치 상황으로 인해 사회가 불안하다.
혹시 우리 팀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노심초사다.
이제는 챙겨야 할 식구가 더 늘었다.
우리 원정대 3명에 이곳에서 계약한 도로지, 밍마, 덴지, 상게까지 총 7명이 됐다.
4월 7일
카트만두→루클라(2,840m)→팍딩(2,610m)
새벽에 짐을 실을 트럭이 숙소에 도착했다.
소규모 원정대라 조그마한 트럭 한 대뿐이다.
새벽 공항에 도착해 바로 예티항공 20인승 경비행기에 올랐다.
이 비행기는 우리가 가는 쿰부(Khumbu) 지역과 안나푸르나(Annapurna) 지역을 수시로 운항하는 유일한 교통수단이다.
가끔은 추락사고가 있어 내키지는 않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이륙하고 40여 분 루클라(Lukla) 비행장까지 가는 동안 히말라야의 만년설이 구름 사이로 얼굴을 살짝 내민다.
무사히 루클라 비행장에 우리를 내려주고 돌아가는 비행기를 보니 괜히 마음이 찡해진다.
이제부터는 깊은 산속으로 하염없이 들어가야만 한다.
우리가 등정을 성공하고 다시 이곳에서 저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리라고 마음을 다잡는다.
짐을 찾고 나서 카라반 운행을 위한 좁교(야크와 물소의 교배종)를 수배했으나 없단다. 할 수 없이 현지 포터를 섭외하여 오늘 일정인 팍딩(Phakding)까지 운행키로 했다.
해발 2,800m를 넘었다.
우리 대원들 모두 건강하게 자기 일을 잘 해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인다.
루클라에서 물자운송을 위한 좁교나 포터 섭외에 문제가 생겨 한없이 기다리는 중
4월 8일
팍딩→남체(4,300m)
오늘은 남체(Namche)까지 무조건 진입해야 한다.
다행이 오늘은 좁교가 섭외되어 운송이 부드럽다.
좁교는 60kg 무게를 짊어지고 느릿느릿하지만 잘도 오른다.
좁교들은 경사가 급하고 완만하고를 가리지 않고 여유 있게 오른다.
오늘 일정은 이들 좁교 속도와 비슷한 듯하다.
하지만 내일 그리고 또 다음날은 아마 나보다 훨씬 빨리 진행되겠지.
아니 내가 느려지겠지.
대원들과 들어가는 이 걸음은 세상을 두달여 등지는 숙명의 길이다
중간 중간에 음악을 틀어 팀 분위기를 띄워본다.
그런데 남체 도착 직전의 기다란 비탈길은 숨이 턱턱 막힐 정도다.
남체에 오르니 바로 앞산에 위치한 그 유명한 꽁데(Kongde) 폭포가 한눈에 들어온다.
장관이다.
하늘에서부터 낭떨어지 아래로 떨어지는 꽁데 폭포의 물줄기는 수천 m나 된다.
이곳 남체는 쿰부 쪽 방향의 마지막 바자르(bazaar, 시장)가 있어 많은 트레커들이 북적거리는 중요한 곳이다.
우리도 혹시 빠트린 물품이나 장비가 있으면 이곳에서 마지막 보충을 해야 한다.
고도가 4,000m를 넘다보니 머리가 띵하고 속이 메스껍다.
당연히 와야 할 증상이 오고 있지만, 그래도 조금 걱정이다.
저녁식사는 고소 적응을 위한 체력보강 차원에서 닭백숙으로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