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아내가 될 자격이 박탈되셨습니다
소개팅을 하는 자리 혹은 취미생활을 위해 가입한 독서 모임 같은 곳에 나가면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하는 일이 생긴다. 그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가장 표면적인 나의 정체성일 것이다. 음악 관련 일을 하고 있고, 삼십 대 후반이고,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이라는 게 가장 모나지 않은 자기소개일 것이다. 좀 더 세부적으로 나를 알리고 싶다면 토요일에는 혼자 집 근처 공원에서 산책하기를 좋아하고(싱글임을 알림), 일요일에는 교회를 가고(기독교인임을 알림), 평소 책과 영화와 커피를 즐기는 사람이라는 점을 이야기한다(대화 주제가 고갈되었을 때 세 가지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면 환영한다는 것을 알림).
그러나 깊이 관계를 맺다 보면 언젠가는 꼭 이야기해야 하는 게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 아토피 환자라는 점이다. 드러난 목선이나 뺨의 상처에서, 흉터가 오래된 손등과 검고 흰 각질이 들뜬 팔꿈치에서 이미 눈썰미가 있는 사람은 아토피 피부염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날씨가 더워지면서 몸을 노출하는 옷을 입게 되거나, 상대와 함께 음식 메뉴를 골라야 할 때, 단지 몸에 해롭기 때문이 아니라 아토피 부작용이 심각해지기 때문에 인스턴트 음식이나 밀가루를 피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해주어야 한다. 특히 돼지고기는 체질적으로 상극이어서 반드시 피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꼭 덧붙인다.
돼지고기라는 걸 의식해서 몸이 더 아픈 거 아냐? 이런 것도 '먹어 버릇'하면 없어질 수 있는데. 블라인드 테스트처럼 ‘돼지고기인 걸 모르고 먹으면 괜찮지 않을까'라고 생각하셨던 친구 어머니 덕분에 나는 재료도 알지 못한 채 돼지고기가 잔뜩 들어간 음식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피부가 무참하게 뒤집어진 적이 있다. 집으로 돌아가 구토와 설사에 시달린 뒤 내 몸이 '살아있는 돼지고기 감별사'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삼겹살, 족발, 감자탕, 수육, 고기만두 같은 것을 먹는 날에는 아토피 피부염이 걷잡을 수없이 번져 올라온다. 발진, 가려움증, 진물이 나면서 일상생활은 물론 밤에 잠을 잘 수도 없게 된다. 속옷을 버릴 만큼 피와 진물이 흘러나오고, 피부 겉과 속이 햇볕에 하루 종일 활동한 날처럼 뜨거워진다. 열을 식히기 위해 찬물 샤워를 하면 피부 표면이 건조해지고, 보습을 위해 꾸덕한 로션을 바르면 상처에 닿은 로션 때문에 따가움과 열기가 더해져 이루 말할 수 없이 괴롭다.
그럼 평생 돼지고기 못 먹어요? 돼지고기가 얼마나 맛있는데. 그 행복을 영원히 못 느끼다니 안됐다. 전 애인과 막 썸을 타고 연애를 시작하려고 할 때 그가 그렇게 말했다. 처음 듣는 말도 아니어서 그렇게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또 돼지고기를 너무 좋아하지만 체질 때문에 참는 경우가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돼지고기를 맛 본 일이 몇 번 없기 때문에 돼지고기를 못 먹는다는 게 애통할 만큼 큰 비극은 아니어서 정말 괜찮았다. 고기도 먹어 본 놈이 안다고, 애초에 돼지고기의 맛을 모르니 평생 못 먹는다고 해도 그렇게 서운하지는 않은 것이다.
내가 생각에 잠긴 듯 보이자 그는 재빨리 덧붙였다. 뭐 어때요, 치킨 먹고 소고기 스테이크 먹으면 되지. 오리고기, 양고기도 얼마나 맛있는데. 돼지고기 빼고 내가 다 사줄게요. 그렇게 말했던 그가 2년 뒤 헤어질 때 즈음엔 ‘너 돼지고기 못 먹잖아. 우리 결혼하면 평생 나 돼지김치찌개도 안 끓여 줄 거지?’라는 말로 나를 황당하게 했다. 식성이 안 맞는 것, 즉 내가 아토피가 있어서 돼지고기를 못 먹는다는 사실이 헤어짐을 결심하게 된 이유 중 하나라고 했다.
사실 이미 사랑의 감정이 다 말라 없어진 판에, 비겁하게 돼지고기 핑계를 대다니 우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니, 살면서 먹는 것이 중요하고 맛있는 음식 먹는 것을 삶의 가장 큰 낙으로 삼았던 그의 입장에서는, 내가 돼지고기를 먹을 수 없는 체질이라는 게 이별 사유가 되기 충분했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방영하는 주말 드라마 <오케이 광자매>에서도 나오지 않는가. 평생 어머니가 차려주는 정성스러운 아침밥을 먹고 자랐던 아들이 변호사가 되었고, 결혼 후 집밥을 전혀 차려주지 않는 아내와의 관계에서 결핍을 느끼고, 매일 아침과 저녁식사를 해결하는 회사 앞 식당 아줌마와 어쩌다 감정이 동하여 하룻밤 사랑을 나누게 되는 이야기. 고작 돼지고기, 가 아니라 누군가에겐 먹는 일이 죽고 사는 일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토피 때문에 돼지고기를 못 먹는다는 나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여러 가지인데, 여자 친구들과 남자 친구들의 반응은 상당히 다르다. 여자 친구들은 자신들이 가진 몸의 불편함에 대입하여 내 질병을 이해하려 애썼다. 나도 화농성 여드름 때문에 미치겠어. 나도 악성 곱슬인데 이건 치료도 안되고 삶의 질을 떨어뜨려서 죽을 것 같아. 나도 심각한 하체비만이잖아. 상체는 44인데 하체는 77이라 맞는 바지가 없고 뭘 입어도 태가 안 살아. 그리고 그 끝엔 우습게도 다들 나를 부러워했다. 그래도 넌 얼굴은 깨끗하니까 천만다행이다. 난 얼굴을/머리카락을/다리를 가리고 다닐 수도 없고 안 예쁜데, 넌 그래도 가릴 수 있으니 괜찮잖아.
소녀들에게 몸이란, 얼마나 잘 활동할 수 있는가 하는 기능적인 면보다는 남들 눈에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미적인 면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소녀들 스스로도 자신의 몸을 그렇게 인식하고 있고, 타인들의 눈과 사회 속에서 그와 같이 세뇌되고 억압당해왔다. 아무도 아토피로 인한 내 생활의 불편함을 첫 번째로 공감하지 못했다. 아토피로 인한 식생활 제한, 학습능력 저하, 수면의 질 저하, 고액의 치료비를 감당해야 하는 부담감 같은 건 언제나 둘째였고, 아토피 피부염으로 인해 얼마나 ‘남들 보기에 안 좋은지’를 가장 먼저 걱정하는 것이다. 사람은 시각적인 동물이니 어쩔 수 없다고 치고 넘어가야 할까.
나는 함께 사는 가족들과 교회 사람들, 친한 친구들의 배려 속에서 커왔기 때문에 나의 특이 체질이 타인에게 불편함을 끼친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드실 구수한 돼지찌개와 내가 먹을 맑은 국을 항상 따로 끓여야 했던 엄마의 수고가 당연하다는 것은 아니다. 나 때문에 돈가스 집이나 무한리필 삼겹살 집을 가지 못하는 언니의 희생이 당연하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체질 때문에 가장 불편한 사람이 있다면 부모도 친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 아닐까. 가족들과 친구들, 주변 지인들은 항상 나를 배려해 주었다. 선택권이 많은 사람들은 선택권이 상대적으로 적은 나를 만날 때면 내 선택지 안에서 기꺼이 식사 메뉴를 고르도록 배려해 주었다. 나 역시도 그들이 나를 만나지 않을 때는 내 선택지에 없는 다양한 메뉴들을 즐길 거라 믿으며 너무 미안해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나의 특이 체질이 타인의 미식권(?)을 침해한다는 생각은, 남자 친구들의 반응을 보며 처음 하게 되었다.
남자들은 나와 애인 사이가 아닌 그저 동성 친구와 다름없는 사이라 할지라도 나를 미래의 아내, 내 아이의 엄마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있는 어떤 존재로 보았다. 남편을 위해 밥상을 차리는 아내, 아이를 위해 요리하는 엄마, 시부모님에게 생일상을 차려드리는 며느리. 돼지김치찌개를 못 얻어먹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별을 결심한 전 애인이 그랬듯이, 그들에게는 내가 그들이 선호하는 식재료로 밥상을 차려줄 수 없는 여자라는 것은 도저히 미래를 함께 할 수 없는 큰 장애를 갖고 있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종교적인 이유나 가치관 때문에 내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못 먹는 게 아니라 안 먹는 거잖아’라고 말하며 아마도 돼지김치찌개를 식탁 위에 가득 차려놓고 내 입술에 갖다 댔을지도 모르겠다. 무지의 폭력으로 여러 번 당해 보았던 일들. 자기 접시 위의 돈가스를 썰어 내 숟가락 위에 얹어주던 무심한 다정함. 삼겹살 쌈을 만들어 내가 받아먹을 때까지 눈앞에 들고 흔들며 웃던 소름 끼치는 기억.
만약 내가 남자였어도 상대방이 그렇게 생각했을까. 네가 돼지고기를 못 먹으니 갓 김장한 뒤에 먹는 김치와 수육 맛을 모르겠구나. 중국 요리시킬 때 네가 탕수육을 못 먹으니 소자 시켜도 남으니까 우린 평생 못 시켜먹겠네.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며 상대에게 은근한 죄책감을 씌웠을까. 아내와 함께 돼지고기 요리를 즐길 수 없는 남편, 아이들 밥상에 돼지고기를 차려줄 수 없는 아빠. 그게 이별을 결심할 만큼 큰 ‘하자’ 일 수 있나? 남자들에게?
남자 입 속에 들어가는 음식을 여자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 오빠, 남동생, 남편, 시아버지처럼 역할이 특정 지어지는 남성들은 더더욱 대접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식사권. 나는 살면서 아버지 밥상을 차려드린 일이 없다. 딸 둘 중에 둘째 딸이기도 했고, 엄마가 밥과 반찬을 바로 꺼내 먹을 수 있도록 늘 정성껏 준비해 두고 가셨기 때문이다. 부모님 두 분이 맞벌이셨는데도, 엄마는 새벽부터 일어나 아침과 저녁의 국물이 겹치지 않게 찌개와 국을 늘 두 개씩 만들어 두고 가셨다. 엄마가 완벽히 준비해 놓은 반찬과 밥을 언니가 접이식 식탁을 펴서 부려 놓으면, 나는 달랑 수저를 놓고 편하게 집어 먹을 줄만 알았던 철부지 둘째였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 같은 반 친구가 초등학생 남동생과 고등학생 오빠, 딱히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아버지의 식사상을 차려드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경악한 적이 있다. 남동생은 나보다 어리니까 내가 챙겨야 한다고 치자. 하지만 오빠는 왜? 아니, 그보다 보호자의 도움을 받고 성장해야 할 중학생이 도리어 보호자의 식사를 챙긴다? 아버지가 병상에 계시거나 몸이 편찮으신 경우도 아닌데 말이다. 만일 오빠나 남동생이 아니었다면, 언니와 여동생이었다면 어땠을까. 세 자매는 사이좋게 자신들의 식사를 분담하여 준비했거나 고등학생인 첫째가 두 동생의 식사를 챙겼을지 모른다. 따로 직장생활을 하지 않고 배우자의 경제권에 기대어 있는 보호자가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였을 경우, 높은 가능성으로 세 자녀의 식사를 어머니가 몸소 차려주었을 것이다. 어머니라면 몸져누운 병상에 있었어도 그랬을 거란 확신마저 든다. 내 생각이 너무 지나친 걸까.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내 질병에게 더 무거운 굴레를 덧씌우는 것은 사양한다. 돼지고기는 안 먹는 게 아니라 못 먹는 것. 먹을 수 있다고 해도 안 먹겠다고 결정한 내 의사는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 예쁘지 않아서 힘든 게 아니라 불편하니까 불편한 내 질병은, 더 편안하고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다른 신체적인 문제와 비교할 수 없는 개인적인 것.
건강하고 주체적인 내 몸과 내 삶을 위해 오늘도 한 걸음씩 천천히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