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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마 Feb 21. 2022

단골은 아니지만

뿔테 안경을 쓴 남자

 단골은 아니지만 생각날 때마다 찾아가는 손칼국숫집이 있다. 누가 봐도 아빠, 엄마, 아들로 보이는 단란한 세 가족이 운영하는 작은 가게다. 오늘은 딸인지 며느리인지 아리송한 아담한 여성까지, 총 네 명이 작은 주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인다.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은 키가 작지만 몸이 단단하고 얼굴이 검고 이마 주름이 깊다. 늘 인상을 잔뜩 쓰고 있지만 화난 것처럼 보이거나 무섭지는 않다. 엄마처럼 보이는 여성도 늘 눈썹을 찌푸리고 있다. 키가 작고 통통하고, 우리 집에도 계시는 보통의 한국 어머니와 매우 비슷한 푸근한 인상이다.


  아들로 보이는 젊은 남자는 덩치가 산처럼 크고 어깨가 굽었다. 검은색 뿔테 안경을 썼는데 밀가루를 반죽하고 자르고 삶는데 불편하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안경알에는 늘 김이 서려 있었다. 남자는 이런 것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가끔 손등으로 안경테를 밀어 올릴 뿐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뿌연 렌즈로도 반죽 덩이를 주무르는데 문제가 없어 보였다.


  나는  사람을 보러 칼국숫집에 간다. 가끔 생각이 난다는  칼국수가 아니라  김서린 뿔테 안경을 쓰고 묵묵히 밀가루를 치대는 커다란 남자인 것을 부인할  없다.


  이 집에 여러 번 발을 들였지만 딸인지 남자의 아내인지 생판 남인 직원인지 알 수 없는, 저 여성은 오늘 처음 본다. 키가 초등학생처럼 작고 체격이 아담했다. 머리통이 작고 팔다리도 가늘었다. 마스크 너머로 보이는 이마와 눈가의 주름, 서글서글한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외양만으로 학생인지 성인인지도 가늠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여자는 네 사람 중에 제일 말을 많이 했다. 홀에서 주문을 받고 주방에 바삐 들어와서 '오빠, 보통 칼 2개요'라고 남자에게 속삭이면, 남자는 뿌옇게 김이 서린 뿔테 안경을 내버려 둔 채 묵묵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둘은 남매일까 부부일까. 아니면 단순히 사장과 직원 사이일까. 가게 안으로 발을 들였을 때 저 낯선 여자가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심장이 내려앉았다. 볼 것을 보고야 말았다는 생각에서였다. 추측 건데 여자는 아마도 뿔테 안경 남자의 아내일 것이다.


  좁은 주방에서 네 사람이 복작스럽게 움직일 때, 뿔테 안경 남자가 가스레인지로 다가가기 위해 아담한 여자를 옆으로 밀어냈다. 어깨를 잡고 옆으로 비켜서게 하는 다정한 동작으로 보아 두 사람이 부부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하긴 애초에 친남매라면 '오빠, 보통 칼 2개요'라는 공손한 문장을 쓰지도, 귓속말로 주문을 전달하지도 않을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남자가 기혼자임을 확인한 순간 안도감이 들었다. 삼십 대 중반 미혼여성의 눈에 띄는 연애 가능성이 있는 신원미상의 남자는, 여간해서는 유부남이거나 이미 수년간 교제 중인 여성이 있거나 모 회사 TV광고처럼 남자 애인이 있었다. 나는 이 조그만 칼국숫집 벽면에 붙어있던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라는 액자 하나로 이 가족이 기독교 집안임을 짐작하고 '가능성이 있군'이라고 지레 김칫국을 마셨었다(대체 무슨 가능성?).


  두 남녀가 부부 사이라는 게 확실해지자 기묘한 흥분이 사라지면서 '역시 그랬군'하며 씁쓸해졌다. 완연한 삼십 대 후반의 길에 들어선 나는 어렵사리 찾아낸 하나의 가능성이 파스스 증발되는 기분이었다(대체 무슨 가능성?). 나의 공허감과 상관없이 손칼국수는 참으로 풍성한 맛이 났다. 그래 이 맛이야. 후루룩 훌훌.


  뿔테 안경 남자는 눈을 치켜뜨며 벽시계를 계속 확인한다. 그의 아내인 것 같은 젊은 여자는 매장을 일찍 마감한다는 말을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하고 있다. 나는 마지막 손님이 되지 않기 위해서 남은 손님들이 얼마나 남았는지 둘러보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뿔테 안경의 남자가 말했다.


"영아, 엄마 잘 모시고 들어가라. 수고하고."


남자가 앞치마를 풀어 식탁 위에 던졌다. 밀가루 반죽이 엉겨 붙은 앞치마에서 흰 가루가 푹 피어올랐다. 남자의 어머니가 '시간 됐나? 오늘 목요일이었나?'물었고 아버지는 '너무 밤늦게 오지 말고' 했다. 뭐지? 무슨 말이지? 나는 계산을 하려고 일어섰다. 그러면 안 되지만 네 사람의 대화를 자세히 들으려고 귀를 쫑긋 세웠다. 젊은 여자는 주문을 받고 전달하던 때와 완전히 달라진, 중학생 여자애 같은 활기찬 목소리로 남자에게 장난스럽게 물었다.


"니, 그렇게 좋나?"


  뿔테 안경 남자는 하 참, 하면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의 웃음기 섞인 사적인 목소리는 처음 들어본 것 같다. 그러더니 뭔가 생각난 듯이 내 간다, 외치고는 뒷문으로 급히 나갔다. 잘 가라, 하고 여자는 남자의 뒤통수에 하늘하늘 손을 흔들었다. 남은 세 사람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매장을 마감한다. 두 사람은 부부가 아니었다!


갑자기 가슴이 벌렁쿵쾅거렸다. 왜 빨라지는지도 모르게 심장이 급히 뛰었다. 그가 어디를 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데이트를 하러 가는 건지 헬스장에 가는 건지 자기 계발을 도모하러 가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고단한 하루 일을 끝내고 가족에게서 벗어나 남은 체력을 동원해 '목요일'마다 하는 것 같은 어떤 가슴 뛰는 일을 하러 간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누구를 만나는지 무엇을 하려는 건지 알고 싶었다. 관심이 간다는 이유로 사람의 뒤를 미행하는 것은 스토킹이라는 중대한 범죄이니, 제대로  사람이라면 그런 짓을 하면  된다. 나는 호기심을 해소하고 싶은 마음을 고쳐먹고, 손칼국수를 먹고  더부룩한 속을 달래기 위해 후식으로 개운한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때마침 그가 나보다 앞서 걷고 있었고 나는 공교롭게 같은 방향에 있는 카페를 향하고 있었다. , 절대 그를 뒤따라가는  아니다.


  뿔테 안경 남자는 스포츠 가방 같은 것을 어깨에 메고 오른손을 가방 안에 내내 찔러 넣고 있었다. 운동을 하러 가는 걸까. 그는 카페와 헬스장, 약국, 법무사, PC방, 노래방, 소아과, 휴대폰 대리점,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 전문점이 다 붙어있는 한 플라자 상가 앞에 섰다. 그리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나는 마음속으로 감점이군, 생각했다(아니 대체 뭐가 감점이라는 거지?). 나는 머리를 가로젓고 그와 몇 걸음 떨어진 커피 전문점에서 아메리카노를 샀다.


  담배를 다 태운 남자는 가방 속에 손을 넣어 무엇을 꺼냈다. 뜨거운 커피를 불어 마시며, 나는 남자의 손에 들린 물건을 제대로 알아보았다.


단지 그 소품만으로 그가 오늘 무슨 일을 하려는 건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머릿속에서는 물건을 매개로 한 온갖 상상이 활개를 쳤다. 그가 밀가루가 엉겨 붙은 김서린 안경알을 닦을 새도 없이 달려 나온 이유가 데이트도 피시방도 헬스장도 아닌 저것이라니 파스스 날아갔던 가능성의 씨앗(무슨 가능성?)이 다시 흙을 다져 자리를 잡고 움트는 것 같았다. 멀리서 시커먼 패딩을 입은 건장한 남자 둘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뿔테 안경 남자는 재빨리 손에 든 물건을 가방 속에 쑤셔 넣고 그들 쪽으로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뿔테 안경 남자의 손에 들려있던 것은 팁이 닳아 없어질 것 같은, 매우 낡은 드럼스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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