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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무 May 02. 2024

디지털 망각자가 사는 법

너의 기억을 의심하라. 

핸드폰을 껐다 켜는 바람에 잘 쓰던 e-book 앱의 로그인이 풀려 버렸다. 그동안 로그인이 풀린 적이 없었기에 당황했지만 곧바로 평소에 잘 쓰던 아이디와 비번을 입력했다. 그런데 맞지 않는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뭐였더라. 


보통은 하도 많은 사이트에 로그인을 해야 하는 터라 아이디나 비번 등을 적어 두기도 하는데 요즘은 지문으로 등록해 놓으면 굳이 아이디, 비번을 입력하며 로그인을 할 일이 거의 없어서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게 패착이라면 패착이었다. 이 앱은 지문으로 로그인이 되지 않는 거였는데. 


비번을 바꿔가며 시도해도 접속되지 않자 그때부터 당황하기 시작했다. 혹시나 다시 핸드폰 자체를 껐다 켜면 자동 로그인이 될까 싶어서 여러 번 시도해 봤지만 야속하게도 한 번 풀린 로그인은 반드시 아이디와 비번을 넣어야만 입장이 가능하다는 듯이 결코 열리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는 백날 찾기 어려울 것 같아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비밀번호 변경이었다. 계정 찾기를 해서 들어가니 다행히 비밀번호를 변경하는 칸이 있었다. 비밀번호를 변경하고 다시 로그인하는 차례가 오자 변경된 비밀번호를 입력했는데 계속 다시 확인하라는 메시지가 떴다. 무슨 일이지? 앱 오류인가?  


그때부터는 화가 나기 시작했다. 겨우 겨우 인증 절차를 걸쳐 비번을 변경했는데 또다시 로그인이 안 되는 그 패턴이 계속되었다. 여기에 인터넷으로 로그인이 안될 때의 방법들이 나와 있어서 계속 시도해 보았으나 전혀 먹히질 않았다. 데이터를 삭제했다가 캐시를 삭제했다가. 


안 되겠다 싶어 고객센터로 전화를 했는데 아뿔싸 공휴일인 관계로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말은 이 상태로 하루를 더 견뎌야 한다는 뜻이었다. 


하루 동안 기다리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어떻게 시스템을 이렇게 만들어 놓을 수 있어' 하는 생각부터 '이게 뭐라고 그렇게 신경 쓸 필요가 있냐'까지. 나중에는 '이래서 종이책을 읽어야 한다니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디지털에 대한 불신으로까지 이어졌다. 다시는 전자책으로 안 읽어야지 하는 다짐과 함께. 


그러는 사이 '다음 소희'라는 영화를 봤다. 콜센터로 실습을 나갔던 학생의 극단적인 선택을 모티프로 만든 영화였다. 이 영화를 보면서 콜센터 직원들의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고, 고객센터에 전화하더라도 최대한 예의를 갖춰 앱 오류를 말한 뒤 깔끔하게 계정을 삭제해 달라고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여러 가지 감정이 혼재된 시간을 건넌 뒤, 드디어 고객센터의 안내직원과 통화할 수 있었다. 직원은 먼저 계정을 확인해 본다고 했다. 핸드폰 번호를 알려주니 계정이 있는 것이 맞다고 확인해 주었다. '그러니깐 있는데 안된다니까요' 말하려고 하는 순간, 직원이 먼저 아이디가 뭔지 물었는데 내가 뭐라고 대답하니 그게 아이디가 아니라고 핸드폰 번호 자체가 아이디라고 말해주었다. 


그렇다. 애초부터 잘못된 아이디를 넣었으니 비번을 변경한 후에도 계속해서 로그인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하루 동안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알겠다고 시도해 보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고 다시 비밀번호를 변경한 아이디를 핸드폰 번호로 넣고 하니 드디어 로그인이 되었다. 


디지털에 불신이고 뭐고 전자책에 대한 회의감이고 뭐시고 그러면서도 고객센터 직원에게는 친절하게 해야 지는 무슨, 문제는 똑바로 아이디 하나 외우지 못한 내 탓이었다. 나름대로는 핸드폰 번호 자체가 로그인이니 따로 저장해 놓을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다시 로그인을 해야 했을 때는 정말 까맣게 잊어버렸고, 아이디 자체가 잘못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디지털 시대에 망각자란 이렇게 사는 게 힘든 법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고객센터 직원이 아이디 물어보기 전에 먼저 앱 오류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었다. 아이디가 이거라고 말해주는 순간 자연스럽게 '아 그런가요? 다시 해보겠습니다'라고 넘어간 것이었다. 하루 동안 난리 부르스를 친 것이 아니라는 듯이, 그냥 잠시 아이디를 착각했다는 듯이. 


이제는 하나하나 꼼꼼히 어디다 적어놔야겠다. 나의 기억을 절대 신뢰해서는 안 되겠다. 이제 메모는 디지털 시대에 망각자가 살아가기 위해서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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