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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Sep 23. 2023

"스릴러는 일종의 경고다"

수목 ENA 드라마 <유괴의 날(2023)>

재개발이 결정된 동네는 한 낯에도 인기척을 찾아보기 힘들다. 폐지 줍는 아저씨만 동네를 배회할 뿐. 아이가 잠든 걸 확인한 명준(윤계상 분)은 일을 보기 위해 늦은 밤 집을 나선다. 그곳을 지키던 단 한 명의 어른이 사라지자, 옥탑의 낡은 집은 너무도 쉽게 외부인의 출입을 허락했다. 그리고 방에 잠들어 있던 아이가 사라진다. ENA 수목 드라마 <유괴의 날>은 아이가 유괴되는 날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하지만 그날이 서두에 말하고 있는 그 유괴의 날이 아니다. 명준의 집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유괴를 당한 아이는 사실 명준이 유괴한 아이다. 그렇다, 로희(유나 분)는 두 번이나 유괴를 당한다. 하지만 이 두 번이 마지막일까?



드라마 <유괴의 날>은 ‘한국 스릴러의 대표작가로 발돋움하는’ 정해연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작가 소개 인용). 얼마 전 우연히 작가의 책 <홍학의 자리>를 읽었다. 우연히라고 표현한 건,  책 <유괴의 날>이 드라마로 제작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책 <홍학의 자리>를 읽었기에 정해연 작가에게 사로잡혔고, 드라마 <유괴의 날>까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잠깐 책 <홍학의 자리>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면, 이 책은 다현이를 죽인 범인이 밝혀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식상한 표현일지 몰라도 아주 오랜만에 뒷 내용이 궁금해 손에서 책을 놓지 못했다. 책이 준 짜릿한 몰입감은 추리소설의 꽃이라 불리는 ‘반전’에 있었고, 이 책에서 내가 가장 큰 충격을 받은 반전의 실체는 내가 가진 선입견에 있었다. 때문에 사건의 전말이 드러날수록 나는 이야기와 함께 높이 들어 올려졌다, 마지막 순간에 땅으로 내쳐지고 말았다. 독자를 들었다 놨다 하는 수준이 아닌, 독자가 가진 생각을 뒤집어버리는 책 <홍학의 자리>는 일의 형세를 뒤바꾼다는 ‘반전’의 뜻을 제대로 보여준다. 추리 소설이라면 응당 있어야 하기에 존재하는 수동적인 형태의 ‘반전‘이 아닌, 그 자체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살아 숨 쉬는 ’ 반전‘을 경험하면서, 정해연 작가의 이야기를 통해 뒤바뀔 것들을 자연스레 기대하게 되었다. 그리고 드라마 <유괴의 날>는 아직 4회밖에 방영하지 않았지만, 반전을 가져 올 이야기의 실마리를 이미 여럿 풀어놨다.


명준이 로희를 유괴한 이유는 아픈 딸 희애(최은우 분)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명준에게 로희 납치를 사주한건 도망간 아내 혜은(김신록 분)이다. 집에 있던 돈을 모조리 들고 사라진 아내가 몇 년 만에 나타나 딸의 병원비를 벌 방법으로 부잣집 딸인 로희를 유괴해 오라고 한다. 얼토당토않은 말이었지만, 희애의 골수이식이 급한 상황인지라 명준은 알겠다고 한다. 하지만 대궐 같은 집에서 사는 로희를 유괴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일까. 무엇보다 천성이 나쁜 사람이 아닌지라 명준은 유괴하는 날까지 계속 망설인다. 결국 유괴를 포기하고 차를 돌려 떠나는데, 그런 명준의 차로 누군가 뛰어들었다. 로희였다. 명준은 자신의 차에 부딪혀 정신을 잃은 로희를 차에 싣고 떠난다. 엉겁결에 유괴에 성공하고 만 것이다.


많이 어설픈 유괴범 명준은 정신을 차린 로희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자 안심한다. 아이를 도망가지 못하게 묶어 놓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준은 자신이 누구인지 묻는 로희에게는 딸 희애라고 답하고, 당신은 누구인지 묻는 질문엔 아빠라고 아이를 속인다. 하지만 로희는 그 말을 선뜻 믿지 않는다. 충분히 믿을법한 상황이었지만, 로희의 온몸이 지저분하고 가난한 옥탑을 거부하고 있었다. 기억을 잃은 11살짜리 치고는 매우 영민한 처사다. 게다가 로희는 효자손 하나로 명준과의 관계에서 바로 우위를 잡는다. 반나절 만에 명준은 담배를 입에 물다가도 로희의 타박이 떠올라 담배를 내려놓고, 유괴한 아이의 까다로운 입맛을 맞추기 위해 몇 번이고 요리를 새로 해 온다. 희애가 입원하고 집에서 요리를 한 게 처음이다.

로희에게 장난을 치는 명준을 보고 있으면 유괴범이 아닌 진짜 아빠, 그런데 철이 좀 없는 아빠 같아 보인다. 명석한 로희 때문에 명준이 상대적으로 더 어설프고, 철없이 해맑아 보이기도 하다. 아픈 어린 딸에게 희망을 보여줘야 했을 아버지가 고통과 절망을 이겨내는 방식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명준은 로희와 웃고 장난을 치다가도 문득 병실에 누워있는 딸이 떠올라 슬퍼한다. 유괴 한 아이에게 조련된 유괴범이라. 드라마는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들을 연출해 내며 복합적인 감정을 만든다. 두 사람은 이후로도 계속 티격태격하지만, 로희는 낯선 이로부터 한 밤중에 유괴당한 자신을 구해 낸 명준을 신뢰하게 된다. 이런 스토리의 진행은 휴머니즘을 자극하는 영화와 드라마의 소재로 자주 등장했다.  드라마 <유괴의 밤>은 이런 친숙한 구조를 활용해 긴장의 문턱을 낮추면서 시기적절한 순간 사건의 국면을 바꿀 단서를 공개하며 지혜롭게 긴장감을 조절해 극에 몰입하게 만든다


그런데 왜 하필 로희였을까? 유괴할 부잣집 아이는 로희 말고도 많을 텐데? 그 이유는 혜은이 이 유괴가 성공할 거라는 확신을 준 이유와 같다. 명준의 집에서 옷을 갈아입던 로희는 자신의 팔에 든 멍과 주삿바늘을 보고 명준에게, 그러니까 아빠라고 알고 있는 그 사람에게 자신을 때렸는지 묻는다. 아이의 몸엔 학대를 당했다고 믿을법한 증상들이 보였다. 혜은은 로희가 학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다. 학대받는 아이였기에 상당한 재산가이자 병원장으로 명성까지 있었던 최 원장은 딸의 유괴 사실을 경찰에 알릴 수 없을 것이고, 이들이 요구하는 5억은 그들에게 그리 큰돈이 아니니 이 계획은 무조건 성공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예상치도 못한 일이 벌어진다. 사랑받지 못한 아이였기 때문일까, 로희가 유괴되고 이틀이 지나도록 최 원장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심지어 전화기는 꺼져있었다. 혜은의 등쌀에 못 이겨 로희가 살던 집에 가본 명준은 그곳에서 차갑게 식은 최 원장 내외다 경찰과 구급대원에 의해 밖으로 나오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리고 명준은 로희 유괴범이자 로희 부모님 살해 혐의까지 받는 용의자가 된다.


정해연 작가는 책 <홍학의 자리> 작가의 말에서 자신에게 ‘스릴러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경고’라고 말한다. 앞서도 살짝 언급했지만 책 <홍학의 자리>를 읽으며 내가 받은 충격과 공포는 범행의 잔혹함에 있지 않았다. 나란 사람이 가진 편협함과 이 끔찍한 일들이 인간이라면 모두가 갖고 있는, 내면에 숨겨진 욕구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선입견’, ‘욕구‘와 같이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일상적인 요소가 더 공포스러울 때가 있다.  드라마 <유괴의 밤>에는 학대를 당하는 아이가 등장한다. 그 학대는 유괴로 이어졌고, 유괴는 또 다른 유괴로 이어질 뻔했다. 보호받지 못하는 위험에 노출된 아이는, 당연한 말이지만 또 다른 위험에 너무도 쉽게 노출된다. 그리고 굉장히 아이러니하게도, 위험에 노출된 로희를 지켜주는 어른이 가장 위험할 수 있는 유괴범 명준이란 사실이다. 과연 드라마 <유괴의 밤>에서 들려주려는 경고는 무엇일까?


유괴를 당하고, 또 유괴를 당해도 괜찮다고 말하는 이유가 학대받는 아이라서라는 혜은의 말이, 로희네 저택 지하에 있던 수술실이, 명준이 로희에게 가지는 안쓰러움과 서서히 명준을 신뢰하게 된 로희 그리고 1화 오프닝에 본 사건까지 전부 마음에 걸린다. 스릴러라는데 공포보다 연민의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조각조각 흩어진 파편들이 모여 완성될 유괴의 날, 지금 느끼는 이 감정들로 인해 더 큰 충격에 사로잡힐까 봐 겁난다. 하지만 그래야 진정한 공포다. 사실 최근 복합장르가 유행하며 로맨스, 코믹 장르에 스릴러를 사용하는 비중이 늘었지만 스릴러는 주체성 없이 주인공의 발목을 붙잡는 공포정도로 사용되면서 단조로운 느낌을 받았다. 그렇기에 모처럼 공포라는 감정 안에 뒤엉킨 수많은 감정을 끄집어내어 심연의 나를 보게 할, 제대로 된 옷을 입은 스릴러를 만난 것 같아 설렌다.


경고든 뭐든 다 좋은데, 작가의 1순위는 재미라고 했다. 책을 다 읽고 덮을 때 누군가 ‘재미있었다고’ 말해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고. 스릴러는 경고라는 자신만의 철학을 가진 정해연 작가의 책을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 <유괴의 날>, 책 장을 펼친 것과 다름없는 극 초반, 벌써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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