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그림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만큼 이야기할 수 있는 존재들이지요. 저는 참 여러 시간동안 죽음과 마주하고, 사색하고, 상상하며 살아온 듯 해요. 그렇게 살아왔기에 분명히 전할 수 있는 말은 '슬프고, 아프고, 괴로운 상상만 해온 것은 아니랍니다'
이번주에 곁에 두고 눈으로, 입으로 읽어본 그림책은
'사람들은 내가 홍차를 기다리는 줄 알아요.' 문장으로 시작해서
"설탕 두 스푼 넣어 줘요. 고맙습니다." 대화로 끝나는 주디스 커 작가의 『누가 상상이나 할까요?』 그림책이에요. 죽은 남편 '헨리'와 매일 네 시부터 일곱 시 사이 상상 속에서 만나 이곳 저곳, 여러 가지 일을 함께 하는 이야기가 그려져있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 여전히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영원히 즐겁게 함께하고픈 마음. '죽음'이라는 키워드로 이렇게 기분 좋은 상상을 할 수 있음을 표현해주어 참으로 고마운 그림책입니다. 저도 '죽음'에서 시작하는 여러 상상의 길 위에서 때때로 기쁨, 자유로움, 모험 심지어 행복함까지 느끼곤 해왔거든요.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궁금하신가요? 주디스 커의 사랑스러운 이야기는 책에서 만나실 수 있으니, 브런치에서는 저의 이야기를 살짝 보여드릴께요. 작년에 저희 친할머니께서 돌아가셨어요. 늘 부지런히 요리하고, 밭일하고, 집안 구석구석을 지휘하는 분이셨답니다. 워낙 가난한 시절을 살아내셨기에 자식들이 모두 출가하고, 경제 사정이 괜찮아졌을 무렵부터는 '밥은 무조건 흰쌀밥' 규칙이 할머니 주방의 규칙이었어요. 어찌나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가지셨었던지 이 글을 적으며 추억하는 귓가에 활짝 웃는 할머니의 멋드러진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저는 친할머니와 네 시부터 일곱 시 사이에 만난다면 배부르게 짬뽕 한 그릇을 먹을 거예요.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 하늘을 날며 할머니가 사셨던 동네를 한 바퀴 돌고, 그토록 좋아하시던 UFC 격투기를 구경하러 갈래요. 구름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나오는 구름 평원에 누워 넓게 펼쳐진 하늘에 한 장씩 나타나는 할머니의 옛날 기억을 한 장씩 살펴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아! 따뜻한 믹스커피 한 잔도 함께 나누어 마시면서요! 그리고 할머니의 장례식이 어땠는지 제 기억을 한 장씩 보여드리며 이야기해드리고 싶어요. 할아버지부터 손자들까지 모두 모여 울고, 다독여주고, 의지하고, 이끌며 함께 마주해낸 그 순간이 얼마나 의미 깊었는지 말씀드리고 싶어요. 때때로 당신과의 추억 덕분에 다같이 웃기도 하고, 당신과 함께여서 행복했고, 당신이 얼마나 멋진 사람이었는지 우리가 나누었던 이야기를 말해주고 싶어요. 그러다보면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갈 것 같네요. 하지만 아쉬운 마음은 없을 것 같아요. 내일 또 만나면 되니까요. "내일 오후에 다시 만나요. 이번에는 바다로 소풍 가볼까요?" 약속을 잡고, 꽉 끌어안을 거예요. 그런 다음 제가 주문 한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셔야겠어요.
저는 참 여러 시간 죽음을 마주하고, 사색하고, 상상하며 살아왔어요. 슬퍼하며 운 날도 참 많았어요. 숨길을 찾을 수 없어 벽을 짚고 하염없이 무너져 아파하던 날도 참 많았어요. 가슴을 내리쳐도 응어리진 마음이 풀리지 않아 괴로워한 날도 참 많았어요. 하지만 그런 날만 있던 건 아니었어요. 죽음을 마주하고, 사색하고, 상상하며 기뻐서 얼굴 근육이 욱신거릴만큼 웃은 날도 있었고, 눈물날만큼 행복했던 날도 있었고, 둠칫거리며 춤을 출만큼 즐거운 날도 있었어요. 그토록 다양한 감정, 순간, 날들이 '죽음'을 마주하고, 사색하고, 상상하며 살아왔기에 만날 수 있었다는 걸 『누가 상상이나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