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부재는 당신 자신도 소멸했음을 뜻한다.
“이 다채롭고 사랑스러운 세상이여
싸워서 지킬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너와 난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난 이 세상을 사랑하네
어려움과 갈등이 있어도
지구는 내게 아름다운 곳
태초에 그랬던 것처럼.”
어나더 라운드&토마스 빈터베르 감독,
그가 이 영화를 계획하고 촬영을 진행할 때쯤 아내와 딸이 타고 가던 차가 교통사고를 맞아 아내는 중상을 입고 딸은 병원에서 끝내 하늘나라로 떠났다. (이 사실은 네이버 백과를 인용.) 그는 이 영화로 수상을 했을 때 딸 덕분에 이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영화는 삶, 인간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다. 언뜻 보면 풍족한 삶과 자본적 안정에 근접해 있는 평범한 중산층 혹은 지식인 주인공들의 내면을 깊게 파고 들어가 그들의 삶과 인간의 진실을 비춘다. 고통은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어 철저히 제거되고 제외되는 이 자본주의 삶 속에서, 그들은 술이라는 실험을 통해 서로를 애타게 부르기 시작한다. 사회의 엄격한 규율과 제도 및 이성에 의해 통제되며 행복이라는 삶의 환상 속에 숨어있던 내면의 충동들은 술이라는 기폭제를 맞아 터져 나오기 시작하고 그들은 오히려 절망하는 모든 순간 속에서 뜻밖의 자신을 발견한다. 안정적이고, 이성적인 모든 사회적(자본적) 통제에서 벗어나 자신 안의 감정을 마주할 때 그들의 얼굴은 하나의 얼굴이 아닌 찢겨 나간 진정한 자신, 고통의 얼굴로 변모한다. 그리고 마주한 그들의 삶 속에서, 그럼에도 살아야 하는 아니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굴레를 비추며 지켜야 할 인간의 가치에 대해 논한다. 어쩌면 우리는 안정과 행복이라는 자본의 단일화된 개념과 제도들 안에서 자신 안의 진실한 감정을 외면하고 합리화해버린 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타인과의 진실한 컨텍, 감정과 몸의 만남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타인을 만나고, 서로 더 이상의 고통은 감수하지 않은 채 딱 필요한 만큼, 일회성의 편안함만을 추구하며 타인을 이용하고 소유하려는 세상에서 어나더 라운드는 당신에게 묻는다.
“그리웠어. 아주 오랜 시간. 당신- 그러니까 타인이(자신)”
“우린 이미 늦었지만 나도 당신이 그리워.”
건들면 깨질 것 같은 유리창 같은 관계와 삶의 안정은 결국 언젠가 불어오는 바람에 의해 깨지기 마련이다.
차라리 새벽에 바다에서 씻겨낸 마르틴의 고통에 절인 핏방울이 훨씬 가치가 있다.
적어도 그것은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니까.